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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의 매력에 취한 리창인 시인의 시조인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5월17일 19시16분    조회: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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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리창인


리창인 프로필
 
1934년 길림성 집안시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료녕민족출판사 편심, 부총편집
심양시조문학회 회장 력임
연변작가협회 료녕작가협회 회원
중국민간문예가협회 회원
 
번역도서 《황하는 동으로 흐른다》(장편소설)
민담집 《천안삼거리 능수버들》, 강론집 《겨레의 꿈》(공저)
시조집 《하늘만큼 땅만큼》, 《리창인시조집》 출간
시조 <사랑편> 연변시조시사 제2회 우수시조상 수상
 
청산도 절로절로 록수도 절로절로
​- 시조의 매력에 취한 리창인 시인의 시조인생
 
리창인선생은 시조쓰기는 취미라고 말한다. 나는 선생의 이 말이 겉말이 아님을 잘 안다. 선생을 만나고 2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이 말을 심심찮게 들어왔다. 하나의 취미를 전 생에 관통시킨 것이 기적이라면 어페가 될가? 어쨌든 선생은 그렇게 퇴직 전에는 사업여가에, 퇴직후에는 전심전의로 시조의 길을 걸어오셨다.
 
선생의 그 시조인생을 엿보고 싶어서 특별히 만나기로 했다. 전화를 드렸더니 사연을 묻고 나서 잠시 망설이다가 흔쾌히 수락하셨다. 전화를 끝낸지 한시간 가량 지나서였다. 선생은 위챗으로 살고 계시는 집주소와 함께 댁으로 찾아가는 안내도를 손수 그려서 보내왔다. 선생의 자상함은 언녕부터 알고 있으나 그 안내도를 보며 또 한번 선생의 따뜻한 인간애를 피부로 절감했다.
 
이튿날 오전 아홉시, 약속시간에 맞춰 선생의 댁으로 찾아갔다. 문앞에 도착하여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드는데 문이 열렸다. 환하게 미소짓는 선생을 대하는 순간 가슴이 그처럼 포근할 수가 없었다. 그 포근함은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내내 내 기분을 감미롭게 하였다.
 
선생은 1934년생으로 올해 8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기억력이 대단했다. 산 속 고요한 호수에 흘러드는 벽계수인양 조용한 목소리로 가족사며 걸어온 인생길을 될수록 자제하며 이야기하는데 말씀이 조리정연하고 사유가 민첩했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큰 울림을 주는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행동은 언제나 웅변보다 났다는 걸 실감했다.
 
선생의 시조인생에 우리말 사랑을 외면할 수 없다. 선생은 마을(길림성 집안시 유림진 고산촌)에 소학교가 늦게 세워져 1943년에야 학교문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할 수 없었다.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어로 말해야 했으며 우리말을 하면 벌받아야 했다. 선생도 어쩔수 없이 성씨를 고쳐 리를 기무라, 창인을 마사히도라 불렀다. 일제의 식민지노화교육이였지만 당시는 몰랐었다. 2년후인 1945년 '8.15'를 맞아서야 우리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역시 그 무렵, 선생의 고향마을에 조선의용군이 들어왔다. 의용군들은 우리말 노래를 많이 불렀는데 선생은 마을사람들과 같이 배웠다. 선생은 지금도 완벽하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20여곡 된다며 <최후의 결전>, <혁명가의 노래>, <고향의 봄>, <봉숭아>, <봄이 왔네>, <유격대행진곡>, <의용군단결가> 등 노래제목들을 떠올렸다. 이런 노래들을 들으며 부르며 선생은 항상 우리 말 정서에 사로잡히군 했었다.
 
선생의 학구열은 대단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더 배우고 싶으나 승학할 곳이 없자 마을에서 누루고개를 사이두고 15리 떨어진 량수천자의 소학보습반에 반년 넘게 다녔다. 어린 나이에 매일 15리 길을 걸어서 오가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1948년 9월 리홍광지대가 다시 통화에 들어와 원래의 조광중학을 통화시조선족중학교로 개칭하고 개교했다. 선생은 이 소식을 전해듣는 즉시 학교를 찾아갔다. 보습반의 경력이 있어 초중 2학년에 편입되였다. 그 시기 전쟁으로 말미암아 누구나 다 그러하듯 가정생활이 곤난했던 선생은 학교에서 방학하면 차비 몇원을 절약하기 위해 이불짐을 지고 300리 길을 걸어서 집으로 가군 했다.
 
1951년 초중을 졸업한 선생은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중에 다닐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 선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당시의 김룡하 교장이 우등생으로 고중에 가지 않으면 아쉬우니 고중에 가면 조학금을 받을 수 있게 소개하겠다며 극력 추천하였다. 하여 선생은 조선전쟁 전선에서 밀려드는 부상자들에게 교실을 내주고 청원현조선족중학교에 둔 고중반에 다니게 되였다. 그후 조선전쟁이 휴전되자 1952년 9월 통화시조선족중학교로 옮겨와 고중공부를 계속했다. 학생회 위생부장직과 반급의 반장을 맡은 외 조선어문과대표도 겸임했다.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압록강 칠백리>를 줄줄 외웠고 민병균의 <굴포의 애가>를 읽으면서는 저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조와 시조의 노래가락에 매료되였다. <청산도 절로절로>를 부를 때면 어깨가 절로 들썩였다. 고시조에 관한 자료는 찾을 수 있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조기천 같은 시인이였다. 시인이 되고픈 마음이 어느새 선생의 가슴 속에 자리잡았다. 선생은 문학을 그처럼 애호하면서도 편과를 하지 않았다. 조선어문 한 과목만 잘해서는 절대 연변대학에 갈 수 없고 연변대학에 가지 못하면 시인의 꿈을 이룰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였다.
 
1953년, 연변대학에서는 조문전업 학생 30명을 모집, 그중 20명은 연변사범학교 졸업생을 추천받았다. 선생은 20명외 시험에 합격된 10명중의 한명이였다. 당시 《연변일보》에 실린 합격자명단에서 '리창인'이란 세글자를 보는 순간의 그 기쁨은 근 70년이 지난 지금도 이루 형용할 수 없단다.
 
선생은 연변대학 1학년 여름방학에 연변대학 문예대의 중창조 일원으로 연변지구순회공연에 참가하여 연변의 문화정서를 만끽했고 3학년에는 대학생장백산유람야영대에 참가하여 민족자부심을 키웠다. 당시 야영대는 120명으로 무장조, 지질조, 문인조, 후근조로 나뉘였는데 선생은 자청 문인조에 들었다. 장춘에서 기차로 통화를 거쳐 림강까지 가고 림강에서 삼림철로를 리용하여 원시림속으로 60여리 갔다. 그 다음부터는 걸어서 장백산 서쪽으로 압록강 원천을 따라 올라 장백산 산정을 눈앞에 둔 곳에 천막을 치고 밤을 보냈다. 천막옆 멀지 않은 곳에선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압록강변에서 자란 선생은 당시의 전경에 압록강 전설을 담아보았다.
 
석간에서 쏟아져나와
굽이굽이 흐른대서
벽강이라 불렀는데
물빛이 이상했대
물빛이
새파란 오리깃이래서
압록강이 되였대
- <압록강> 전문
 
이틑날, 야영대는 장백산 정상에 올랐다. 날씨가 좋아 천지가 한눈에 안겨왔다. 신비로왔다. 장관이였다. 선생은 그 순간 마음이 숙연해지는 가운데 '삼천만이여/오늘은 나도 말하련다'란 조기천의 시 <백두산>이 떠올랐다고 이야기하셨다.
 
선생은 야영대 대원들과 함께 천지로 내려가 천지물에 발을 잠그었다. 발이 시려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천지는 압록강, 두만강, 송화강의 원천이다. 천지는 성산 장백산과 함께 많은 신화, 전설을 안고 있다. 이런 체험은 선생의 시조 창작 밑거름으로 되였다.
 
그중 두수만 옮겨본다.
 
백두에 올라서니
하늘에 이마 닿네
 
천지물 굽어보니
천신이 축배드네
 
단군님
기우신 잔에
넘쳐나는 폭포술
 
- <단군님> 전문
 
압록강 두만강은
두 팔의 푸른 피줄
 
한강 대동강은
한 가슴에 끓는 피줄
 
백두옹
단군님의 피
한 몸에서 흐른다
 
- <백두옹> 전문
 
연변대학에서의 4년 동안 학습생활을 선생은 생생히 기억하고 계셨다. 최윤갑 교수의 '고대조선어' 강의를 통해 민족언어의 뿌리에 대해 료해했고 김창걸 교수로부터 민족문학의 어제로부터 당대문학에 이르기까지 사적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선생은 시인 리욱교수와 후에 연변대학 교장을 력임한 정판룡 교수를 특별히 떠올렸다. 이들 모두 세계적인 안목으로 자신의 흉금을 넓혀준 분들이라고 잊을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선생은 정판룡 교수를 기리여 쓴 시조 한수를 직접 읊는 것이였다.
 
흰눈이 내립니다
슬픔이 젖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도
좋은 일 많이 하라고
또 그렇게 몸소 행한
큰 별이 떨어져서
교단에 핀 뭇별들이
흰꽃을 고이 드리고
바다같은 사랑 잃어
산도 들도 흰옷 입은
스승님
베푸신 사랑의 품
하늘인가 합니다
 
- <마음에 세워진 기념비> 전문
 
1957년 연변대학을 졸업한 선생은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에서 교육사업에 종사하다가 1976년 료녕인민출판사 조문편역실에 전근되였다. 이 때부터 선생은 조문편역실에서 중외고금의 수많은 문학작품들을 번역, 출판하며 본직 사업에 충실하는 외 문학의 바다에서 마음껏 헤염쳤다. 그중 《당시 백수》의 편집, 출판은 선생의 시조창작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선생의 시조 사랑은 민간이야기 수집에도 반영되였다. 선생은 1980년대초, 민담, 민요를 수집, 정리하라는 국가의 지시에 따라 직접 민간이야기 수집에 나섰다. 료녕성의 심양을 비롯하여 무순, 철령, 개주, 환인에 발자국을 남겼고 흑룡강성의 녕안, 해림 그리고 길림성의 연길, 류하, 집안 등 지를 전전했다. 민담집 《천안삼거리 능수버들》은 그렇게 태여났다. 선생은 그 사이 김덕순, 황구연, 차병걸 등 민담구술가들과 심후한 우정을 쌓았는바 이미 고인이 된 그들을 잊을 수 없어 시조에 그리운 정을 담았다.
 
고 김덕순 민담구술가를 위해선 '여든도 넘었건만/청산에 벽계수라//민며느리 머슴살이/항간의 고달픈 삶//밤마다/인생사 매듭풀다/다 못풀고 가셨소//'(<매듭을 풀다풀다>)라고 노래했고 고 황구연 민담구술가의 명복을 비는 마음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새끼 꼬듯 엮었다우//고희도 지났건만/청산류수 끝없더니//끝난건/이승길이나/옛말끝은 없었수//'(<꼬리에 꼬리 물고>)라고 시조에 담았다. '명주실 뽑아내듯/밤마다 뽑아낼제//마흔에 장님 되니/대낮도 밤중이라//밤낮이/따로 없으니/옛말끝이 있을고//'(<명주실 뽑아내듯>)는 고 차병걸 민담구술가를 두고 지은 시조다.
 
1986년 1월, 조문편역실은 료녕인민출판사에서 료녕민족출판사로 독립했다. 선생은 부총편집에 부임했다. 새로운 지도부는 우리 겨레는 언어와 력사의 뿌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민족력사도서의 편집, 출판에 모를 박았다. 하여 《조선족백년사화》, 《압록강 류역의 조선민족과 반일투쟁》, 《불굴의 항일투사 윤희순》, 《조선족혁명렬사전》, 《관내지구 조선인 반일독립운동자료집》 등 책자들을 편집, 출판했다. 편집, 출판에 직접 참여하며 감동을 받은 선생은 조선족 혁명렬사들을 노래하는 시조를 수십수 지었다. 그중 불굴의 항일투사 윤희순을 노래한 한수를 소개한다.
 
나라 잃은 설음 안고
고향 떠나 이국에서
 
로학당 돌담집에
지펴놓은 봉화홰불
 
보가툰
초가집 불사른들
꺼질손가 의분의 불
 
독립단 가족부대
주검으로 뭉친 혈육
 
왜적의 총칼앞에
충혼된 넋을 안고
 
피눈물
수난의 가족사
썼습니다 혼불로
 
자국이야 있으랴만
몸 간다 넋도 가랴
 
로학당의 기념비
해성산의 기념비
 
상금도
메아리칩니다
세월의 벽을 넘어
 
- <몸간다 넋도 가랴> 전문
 
선생은 한 때 종합간행물 《갈매기》의 주필을 담당했다. 1986년에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창간한 《갈매기》 잡지는 《갈매기》 잡지 문필회를 조직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조직하면서 료녕지역 작가, 시인들을 묶어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93년 출판경비난으로 막부득이 페간되자 선생은 아쉬운 심정을 금할길 없어 시조 한수를 남겼다.
 
'7백리 료하벌에/태줄을 묻어놓고//2천리 압록수에/목청을 틔워놓고//천산에/고고성 울린지도/여덟해된 갈매기//발해만 파도속에/걸음 익혀 나래 펴고//앞바다 황해기슭/먼바다 대양기슭//겨레의/품속에 안겨/넘나들던 갈매기//정말로 떠나갔나/영영 아주 떠나갔나//활짝 필 꽃나이에/수중고혼 웬 말이냐//섧도다/청천벽력에/나래접힌 갈매기//'(<갈매기> 전문)
 
1978년 연변일보에 시조 3수를 발표하며 문단에 발을 들여놓은 선생은 1994년에 정년퇴직한 후 본격적으로 시조 창작에 전념했다. 1994년 5월 연변시조시사에서 펴낸 《중국조선족시조선집》에 12수가 발표되고 1997년 료녕민족출판사에서 펴낸 시문학총서 《접동새》에 7수가 실렸다. 퇴직 10주년을 맞는 2004년 선생은 시조 160수를 묶은 단행본 《하늘만큼 땅만큼》을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출판했다. 그리고 또 14년이 흐른 2018년에는 270여수의 시조를 묶은 《리창인시조집》을 출간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고 리상각 시인은 생전에 선생의 시조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리창인 시인의 시조가 주선을 이루고 있는 쩨마는 고향과 인간에 대한 불같은 사랑이다. 그래서 고향의 달은 마음에 영원히 지지 않는 달이요, 사랑은 가슴에 지지 않는 꽃이다. 불같은 사랑이므로 사랑의 상처는 참기 힘든 불의 상처라고 했다. 시인은 사랑과 인정이 쑥밭으로 변해가는 현실에 대하여 풍자와 조소를 퍼부으며 록색세계를 가송하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인정과 믿음을 호소하고 있다."
 
선생은 자신의 시조 창작에 지대한 영향을 준 고 리상각 시인과 고 김성휘 시인을 특별히 언급했다. 리상각 시인과는 심양에서 연길에서 수없이 만나며 시조 창작에 관한 의견을 서로 교환했었고 김성휘 시인은 1989년 연변작가협회에서 조직한 연변작가대표단 내몽골기행창작활동에서 만나 시조 창작에 관한 보귀한 경험을 전해들었다. 그번 활동에서 김성휘 시인의 흰트를 받고 지은 시조 한수가 있다.
 
흰구름/흘러가네/양무리떼 흘러가네//칭키스칸 십만대군/활촉이 울던 곳에//사령은 네 아니런가/채찍을 쥔 목동아//
 
2002년, 선생은 민족적 사명감을 안고 료녕지역의 시조창작을 활성화하기 위해 '심양시조문학회'를 내오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심양시조문학회'는 소학교과서에 시조가 없는 상황을 고려하여 먼저 시조문학강의를 조직했다. 리상각 시인을 초청하여 특강을 하는 한편 선생은 직접 시조문학회 맴버들인 리문호, 류광순, 김희자 등 시인들과 함께 료녕지역 15개 학교를 돌며 '시조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란 주제강의를 진행하는 동시에 《명시조 40수》, 《명시조분석》 등 서면자료들을 제공했다. 선생은 시조문학회 회장으로 있은 4년 사이 시조응모시상식을 4회 조직하고 시조백일장을 2차 진행했다. 선생의 동원하에 료녕지역 각 학교들에서 시조창작붐이 일어났는바 좋은 작품들은 국내외 관련 간행물에 추천하여 발표했다. 특히 한국에서 펴내는 《한국동시조》에 료녕지역 학생들의 우수작 40여수가 발표되고 《시조월드》 특집에 64명 학생의 시조가 발표되는 동시에 '세계 어린이 시조 시인'이란 자격을 부여한 상장을 받았다. 선생의 노력을 헛되지 않아 2006년 료녕지역 조선족학생 210명의 시조 286수가 수록된 단행본 《꿈나무꽃》을 펴내는 데로 이어졌다.
 
취재가 끝난 후 선생은 부인 량금자선생에 대해 특별히 언급했다. 연변대학 선후배로 만나 평생을 함께 하며 가정의 행복을 위해 몸바친 부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부인이 영위한 가정의 행복이 곧바로 자신들의 장수비결이라며 부인에 대한 다함없는 사랑의 정과 사랑에 대한 리해를 시조 <사랑편>에 담았다.
 
두 마음 가고오며
한맘 되면 벗이 오나
 
남남이 한데 모여
함께 늙고 한데 가니
 
아마도 
두 마음 한몸 되면
사랑인가 합니다
 
해볕이 뜨겁단들
맘속이야 덥힐 손가
 
달빛이 환하단들
밤마다야 밝힐 손가
 
심신에
밤낮 타는 불길은
사랑인가 합니다
 
하늘엔 별꽃 피나
동트면 사라지고
 
땅우엔 백회 피나
철따라 지기마련
 
가슴에
지지 않는 마음꽃
사랑인가 합니다
 
- <사랑편> 전문
 
선생과 갈라지며 나는 선생 부부의 건강과 장수를 묵묵히 속으로 빌었다.
 
료녕신문 김창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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