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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녕 조선족문단의 ‘징검돌’
조글로미디어(ZOGLO) 2022년5월18일 14시39분    조회: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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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광명
    료녕 조선족문단의 ‘징검돌’
 
-김광명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림금산  김창영
 
료녕 조선족문단이 전반 중국 조선족문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겸손’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료녕 조선족문단도 그 나름대로의 형성과 발전을 거치면서 무에서 유로, 작은 데서 큰 데로, 얕은 데서 깊은 데로 커온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김광명 선생
 
료녕 조선족문단이 1957년에 학생작품집 《첫 수확》(등사본, 비공식 출판)을 펴내서부터 2018년에 95만자에 달하는 《료녕조선족문학통사》(상, 하)를 출판하기까지에 이른 데는 료녕 조선족문단의 1세대 문학인들의 애끓는 피와 흥건한 땀이 슴배여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평생 ‘문학’을 숙명으로 여기면서 사명감을 갖고 료녕의 척박한 조선족문단에 꽃을 피우기 위해 묵묵히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온 한 대선배가 있었으니 우리는 그의 이름을 ‘김광명’이라고 쓰고 료녕 조선족문단의 ‘징검돌’이라고 읽는다.
 
1937년, 무순에서 태여난 김광명 선생님의 리력을 보면 1950년대 말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대 중앙민족학원을 졸업하였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심양의 한 한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한때 심양시조선족문화관에서 근무하였으며 1979년 《료녕신문》이 제2차로 복간되면서 〈압록강〉문예부간의 편집을 맡아 1997년에 정년 퇴직한 것이 전부이다. 너무도 ‘심심한’ 리력인 데다 문학인으로서 문단에서 회자될 만한 작품을 내놓은 것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료녕의 조선족문단에서 여든을 훌쩍 넘긴 오늘날까지도 그 이름이 색 바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가?
 
김광명 선생님의 ‘문학’ 생애는 그가 지금까지 써온 그때 그때의 필명에서 그 궤적을 찾아볼 수 있다. 중학생 시절 그는 ‘먼동’이라는 필명으로 문학창작에 열을 올렸고 《료녕신문》 문예란 〈압록강〉 편집으로 있을 때는 ‘금빛’이란 필명으로 주로 작가 작품에 대한 평론글(본인은 자신의 글을 ‘평론’이라 하지 않고 ‘만평’이라고 함)을 쓰며 신진 작가 양성에 정진하였으며 정년 퇴직한 후 지금은 ‘노을’이라는 필명으로 여러 장르의 글을 쓰며 로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다른 듯 같은 그의 필명 속에는 ‘문학’에 대한 그의 소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사실 김광명 선생님은 중학교 학창시절부터 열렬한 ‘문학 애호가’였다. 그 시절 학교에서는 조선의 문학 교과서를 직접 들여와 가르쳤는데 독서를 즐겼던 그는 자연스럽게 조선 문학에 흥취를 가지게 되였다. 따라서 초중시절 글짓기에서 솜씨를 보여 그가 쓴 작문이 자주 반급에서 랑독되면서 ‘문학’에 뜻을 품게 되였고 고중시절에는 학교 문학써클의 주요한 멤버 중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며 3만여자에 달하는 중편소설 〈투사〉를 써내기도 하였다. 이 작품은 교내(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 응모에서 1등으로 입선되여 입선작품집 《첫 수확》(등사본)에 게재되였다. 그러나 그 기세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건강에 이상이 온 데다 긴장된 대학 생활이 이어졌고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한족학교에 배치를 받아 교편을 잡은 데다 ‘문화대혁명’이라는 악재까지 겹쳐 어쩔 수 없이 ‘문학’과는 ‘담’을 쌓게 되였다.
 
그러다 1970년대 말, 《료녕신문》이 제2차로 복간되여 〈압록강〉 문예란 편집으로 전근되면서 꺼졌는가 싶었던 ‘문학’의 불씨가 되살아나 ‘금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료녕 조선족문단은 초창기로서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휘청거릴 정도로 빈약하였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작가 대오의 양성이였다. 이 사명이 숙명인 듯 김광명 선생님의 어깨에 놓여졌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료녕의 조선족문학도들이 자기의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원지는 〈압록강〉이 유일하였던 것이다. 후에 심양시조선족문화관에서 부정기 내부 간행물 《군중문예》를 발간하고 료녕민족출판사에서 종합 잡지 《새마을》을 발간하여 원지가 다양해 지기는 하였지만 잡지 특성상 초학자들의 마른 목을 축여 주기에는 력부족이였다.
 
‘문화대혁명’ 후, 료녕의 1세대 ‘문학인’들은 접었거나 숨겨 두었던 문학의 ‘끼’를 되살려 작품 창작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냄으로써 문학 후배들에게 본보기를 보여주었다면 김광명 선생님은 묵묵히 새일대 양성이라는 ‘외곬’을 터벅터벅 걷기 시작하였다.
 
신진작가 양성에서 김광명 선생님이 택한 길은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찾아 나서는 것이였다. 우선 그는 편집부로 보내온 작품 원고에 대해서 그 원고가 채용되든 채용되지 않든 빠치지 않고 일일이 손편지로 회답을 보냈다. 채용된 원고에 대해서는 그 작품이 실린 신문과 함께 편지를 보내 고무격려해 주는 동시에 미흡한 점을 지적해 주었고 채용되지 않은 원고에 대해서는 그 원고에 대한 수정 의견을 적어 보내면서 작자와 함께 고민을 나누었다. 당시만 해도 문학 초학자들에게 있어서 신문사나 출판사의 문턱은 너무나 높아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니 그런 곳으로부터 회답 편지를 받게 된 초학자들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자기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이들은 신심을 갖고 ‘작품 창작’에 더욱더 정진하게 되였고  ‘퇴자’를 맞은 이들 또한 희망을 갖고 ‘문학 공부’에 열을 올리게 되였던 것이다.
 
작품 원고에 대한 회답 편지에 이어진 것은 ‘삼고초려(三顾草庐)’였다. 사실 김광명 선생님은 건강상으로도 그렇고 성격상으로도 먼거리 출장에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든 ‘가능성’이 있는 작품을 보내오면 그가 어디에 있든 꼭 발품을 팔아 그 집을 방문하였고 그 집에서 작자와 함께 밤을 지새우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료녕에는 심양시 외에 무순, 철령, 영구, 단동, 안산, 대련 등 시와 신빈, 환인, 관전 등 편벽한 시골에 문학 애호가들이 적지 않았는데 무릇 신진 작가들이 있는 곳이라면 김광명 선생님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것도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삼고초려’하였다. 그때는 교통이 불편하고 교통 수단이 락후하여 심양 시교를 한번 다녀오려고 해도 기차나 자전거를 리용하지 않으면 발품을 팔아야 했다. 더구나 신빈이나 관전 같은 시골에 내려가려면 덜컹거리는 뻐스를 타고 오불고불한 산길을 기본적으로 7, 8시간은 달려야 했고 뻐스에서 내려 동네까지 찾아가는 데는 두 다리로 걷기가 일쑤여서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마저도 산골 현성에 내려가기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김광명 선생님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그곳에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였다. 그래서 산골에 한번 다녀오면 며칠씩 앓기도 하였지만 또 가야할 필요가 생기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갔다.
 
필자와 김광명 선생님 사이에도 이 방면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때는 1970년대 말, 당시 필자는 대학에서 공부하면서 ‘허파에 바람이 들어’ ‘문학’을 한답시고 설치던 때였다. 심양시 소가툰구의 한 농촌 마을에 살고 있던 필자는 1980년 여름방학에 집에 와 있으면서 단편소설을 써서 〈압록강〉 부간에 투고하였다. 투고할 때 한 방면으로는 원고가 퇴자를 맞으면 쪽팔릴 것 같고 다른 한 방면으로는 곧 졸업을 앞둔지라 앞으로 련락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해 작자란에 본인의 이름 대신 누님의 이름을 밝히고 주소도 고향 주소를 적어 보냈다. 후에 누님에게서 들었지만 며칠 후 누님이 집에서 가마니를 짜고 있는데 신문사에서 왔다며 웬 사람이 찾아와 작품 이야기를 꺼내기에 어리둥절했다가 아마 동생이 한 ‘짓’일 거라고 알려주었다고 하였다. 그때 그 단편소설 〈출가 전〉은 1980년 10월 22일자 《료녕조선문보》〈압록강〉 부간에 실렸는데 그것이 필자의 첫 단편소설로서 거기에 힘입어 필자는 1980년대, 1990년대 나름대로 열심히 ‘문학 공부’를 하였다. 필자가 별치 않은 일을 가지고 이렇게 또박또박 구체적인 날자까지 밝히면서 장황설을 늘어놓는 것은 한 초학자에게 있어서 첫 작품의 발표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그 날짜까지 기억할 정도로 그 의미가 깊으며 한 사람의 인생 진로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따라서 당시 료녕 조선족문단의 초학자들은 절대 다수가 난생 처음으로 《료녕조선문보》라는 공식 간행물에 작품 원고를 투고하였고 처음으로 김광명 선생님의 손을 거쳐 〈압록강〉에 첫 작품을 선보이면서 문학인으로서의 립지를 굳히게 되였던 것이다.
 
김광명 선생님의 이런 저자와의 일 대 일 교류 방식은 저자와 편집 사이의 ‘벽’을 허물고 저자에게 힘을 북돋아 주며 저자 각자의 특성을 살리는데 있어서 자못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광명 선생님이 문학도들에게 다가가는 또 하나의 방법은 언제 어디든 문학인의 모임이 있는 곳이라면 달려가는 것이였다. 료녕 조선족문단이 초창기를 거쳐 활약상을 띠기 시작해서부터 각종 문필회, 창작 좌담회 등 활동이 잦아졌다. 이런 활동이라면 술자리가 빠질 수 없었는데 김광명 선생님은 술자리라면 딱 질색하여 단위의 회식 때마저도 술을 입에 대다 말다 하다가 서둘러 식사를 하고는 중도에 간다 온다 말도 없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기가 일쑤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평생 술친구라고는 단 한명도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런 그였지만 문학인의 모임이라면 경우가 달랐다. 언제 어디서 어떤 형식의 모임이라도 문학인의 모임이라면 가급적 빠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모임은 짧은 시간에 많은 문학인들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였다.  
 
문학인 모임에서 저녁 만찬은 왕왕 술판, 노래판, 춤판으로 이어져 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이다. 김광명 선생님은 술도 좋아하지 않고 춤과 노래에도 절벽강산(필자는 김선생님과 거의 20년 함께 신문사에서 근무하였지만 그의 노래와 춤은 단 한번도 듣고 보지 못하였음)이라 이럴 때면 ‘동병상련’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피해 어느 한 숙소에 ‘진’을 치고 ‘문학 세미나판’을 벌여 밤새 목에 피대를 세웠다.  
 
이렇듯 그는 ‘집요’하게 료녕 조선족문단의 신진들을 양성하기 위해 나름의 혼신을 다하였고 그것은 고스란히 풍성한 결실로 맺어졌다. 그 가장 대표적인 실례로 료녕의 ‘본토배기’ 작가, 시인들인 고 최렬(본명 최태렬), 강재희와 고 김군(본명 김진수), 편도현, 김례호 등을 들 수 있다. 소설가 최렬은 당시 료녕조선문보의 통신원으로 보도기사를 써서 신문사 편집부를 찾군 하였다. 그때마다 김광명 선생님은 그에게 소설원고를 부탁하였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썼던 소설 〈약속〉이 〈압록강〉에 발표되면서 최렬은 동기를 부여받아 수필과 단편소설을 련이어 발표하였고 특히 중편소설 창작에서 범상치 않은 재질을 과시하면서 인정받는 소설가로 자리매김 하였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항상 김광명 선생님의 입김을 느낄 수 있었다. 소설가 강재희는 최초 철자도 바로 쓰지 못하고 언어 구사 능력도 많이 뒤떨어져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하는 사람은 작품을 읽어내려가기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김광명 선생님은 그의 작품 구상 능력과 실생활에 대한 감수 능력을 보아내고 그것을 높이 사서  〈압록강〉을 통해 그의 창작 능력을 키워주었고 몇번이나 그의 집에 찾아가 무릎을 맞대고 앉아 밤을 지새우며 작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강재희가 《소설집》까지 펴내며 조선족문단에서 소설가로 인정받기까지에는 김광명 선생님의 조언이 ‘밑거름’이 되였다는 것은 주지하는 사실이다. 고 김군 역시 〈압록강〉의 ‘단골손님’으로 각광받으면서 조선족문단에서 인정하는 벽소설작가로 거듭났으며 편도현 또한 부지런히 〈압록강〉의 물을 마시며 중견 시인으로 발돋움하였고 김례호도 김광명 선생님이 그의 집을 찾아 ‘문학의 밤’을 밝힌 것이 계기가 되여 본격적으로 필을 들었고 소설, 수필,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재능을 자랑하게 되였다. 그 외에도 료녕 조선족문단의 일부 중견 작가, 시인들이 시대적 환경의 영향으로 붓을 꺾었다가 〈압록강〉과 연을 맺으면서 다시 부활하여 지금까지도 문단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고 1970년대-1990년대 료녕 조선족문단에 데뷔한 거의 모든 젊은이들이 〈압록강〉의 기고자, 애독자가 되여 자기의 문학 기량을 미음껏 펼쳤다.



료녕성조선족문학회 회장단 부분적 성원들이 김광명선생을 모시고 찍은 사진
 
료녕 조선족문단에서 김광명 선생님은 그 발전의 고비마다에 자신의 자취를 뚜렷이 남겼다. 비록 본인이 직접 전면에 나서거나 직접 책임을 지고 리드한 적은 거의 없어 공식적인 기록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그가 남긴 흔적이 력력하였다. 그 실례로 ‘심양시조선족문학회’(2018년 ‘료녕성조선족문학회’로 승격)의 설립 과정을 들 수 있다. 심양시조선족문학회는 1987년에 설립되여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30여년간 료녕 조선족문단의 구심점역할을 해왔다. 이런 문학단체의 설립에 김광명 선생님이 빠질리 없었다. 그는 문학단체 설립 최초 발기자의 한 사람으로 문학인들의 뜻을 모으는 데 일조하였고 몇몇 선두주자들과 수차 특별 모임을 갖고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론의하였으며 문학단체 설립을 확정짓고 구체적인 추진 단계에 이르기까지 1세대 문학인으로서 조언과 성원을 아끼지 않고 큰 힘을 실어주었다. 물론 문학회가 정식 설립될 때 그의 이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초창기 멤버들은 누구나 ‘김광명’이란 이름을 마음속에 새겨두고 있었다.  
 
료녕 조선족문단의 일대 희사인 《료녕조선족문학통사》의 출간(2018년 2월 출판)과 관련해서도 김광명 선생님은 일찍부터 문학인들의 사사로운 모임에서 료녕의 조선족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볼 때가 되였다고 화제에 올렸고 여러번 문학사를 집필할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직접 몇몇 사람을 찾아 문학사 집필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2000년에 들어서 료녕민족출판사에서 《료녕조선족문학통사》를 출간하기로 결정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누구보다 기뻐하였고 이와 관련된 행사에 적극 참가하여 자신의 견해를 소상히 밝혔고 사후에는 자기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서문화하여 관계자에게 전해주는 등 방법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다.
 
한마디로 말하면 재직 기간 김광명 선생님은 제 한몸을 불태워 ‘금빛’으로 료녕 문단의 초학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비춰주었고 ‘징검돌’이 되여  문학도들이 건너야할 강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1997년, 김광명 선생님은 정년 퇴직을 맞았고 그 후로는 문학 행사에 발길이 뜸해 지다가 언제가부터 사모님이 몸져 누워 병 간호에 정신없다는 소문이 돌면서 한동안 발길이 끊어졌다. 모두가 부인의 병 간호 때문이라고만 알았는데 후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 사이 본인도 불치의 병으로 10여차 수술대에 오르면서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 했던 것이다. 워낙 주위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페’를 끼치기 싫어하는 그였기에 가족 외에는 그런 사정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 와중에 사모님이 타계하면서 김광명 선생님은 인생 자체가 와르르 무너지는 한계에 직면하였다.
 
삶의 끝자락에서 극도의 비통과 고독 속을 헤매일 때 결국 그의 손을 잡아주고 그에게 살아야할 리유를 안겨준 것은 역시 ‘문학’이였다. 그는 독서로 고독을 달래였고 ‘습작’으로 적막을 밀어내였다. 그는 다시 필을 들고 ‘문학 동네’를 찾아 나섰고 평생의 삶의 추구였고 보람이였던 그 ‘사명’을 실천하는 길에서 ‘노을’로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때는 바야흐로 여든을 바라보는 년세였다.
 
김광명 선생님의 만년 문학 행보는 작품 창작으로 시작되였다. 평론글만을 고집했던 그의 필끝에서 수필, 시가 씌여져 심심찮게 간행물에 발표되였고 그의 행보는 젊은이들에게 무언의 힘이 되여주었다. 작품의 진가 여부를 떠나 만년에 자기의 작품을 내놓았다는 것만으로도 김광명 선생님에게는 자못 의미가 있는 일일 것이다.
 
비록 작품 창작으로 문단에 다시 부활하였지만 그의 가장 큰 관심사는 예나 지금이나 역시 문단 후비군 양성이였다. 예전엔 작품 발표의 주무대가 신문, 잡지의 제한된 공간이였지만 지금은 위쳇이라는 ‘무한한’ 공간으로 주무대가 바뀌면서 집에 앉아서도 실시간으로 문학 교류가 가능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신세대 문학인들과의 소통을 위하여 스마트폰 행렬에 가담하였다. 컴퓨터를 다루는 데도 서툴었던 그는 지금 ‘료녕성조선족문학회’ 위쳇 채팅방의 ‘단골손님’이 되였다. 그리고 채팅방에 오르는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빠치지 않고 평을 달았고 특히 2, 30대 젊은이나 처음 작품을 선보이는 초학자들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써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따라서 ‘문학회’ 채팅방에서 문학 작품과 관련한 조회수만을 따지자면 당연 김광명 선생님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지금도 문학인들의 모임이 있을 때면 젊은 친구들을 찾아가 상대방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나누군 하는데 상대방이 최근에 쓴 작품의 줄거리를 작자 본인보다 더 상세히 기억하고 있어 상대방을 놀래우기도 한다.
 
료녕 조선족문단에서 김광명 선생님은 종래로 ‘장’자 한번 달아본 적 없었고 문단의 발전 력사를 집대성한 장장 95만자에 달하는 《료녕조선족문학통사》에도 그에 대한 그렇다할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광명’이란 이름은 료녕의 조선족문학인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여 있고 그의 문학 행보는 료녕 조선족문단의 전체적인 발전 려정에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따라서 김광명 선생님의 한결같은 인격적 매력, 항상 낮은 자세로 문학도들에게 다가가는 친근감,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도 끝내 저버리지 않은 문학에 대한 사명감은 료녕 조선족문단의 모든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2017년, 심양시조선족문학회에서는 문학회 설립 30주년을 맞아 성대한 경축 대회를 가졌는데 이 대회에서 주최측에서는 김광명 선생님에게 ‘공로패’를 수여하였다. 이는 김광명 선생님의 문학 인생에 대한 긍정으로서 본인도 이를 그 무엇보다도 값진 영예로 간주하였다.
 
‘먼동’이 터서 ‘금빛’을 발하다가 ‘노을’로 불타오르고 있는 김광명 선생님의 문학 행보는 지금도 변함없이 현재 진행형이다.

림금산 김창영/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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