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의 가장 가까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까지 사진 한장에 담아 전해야 하는 직업이 촬영기자이다. 오인철(70세)은 평생을 《연변일보》 촬영기자로 뛰면서 뉴스현장을 누볐고, 자치주의 변화를 고스란히 사진으로 기록하고 방대한 자료를 남겼다.
3일, 오인철은 자택에서 인터뷰를 받으면서 컴퓨터에 일목료연하게 정리해놓은 사진자료들을 보여줬다. 거기에는 연변의 력사적인 사건으로부터 골목골목의 사소한 변화까지, 유명인물들의 력사적인 순간으로부터 인민군중의 일상적인 생활상까지 다양하게 담겨있었다. 몇십년이 되는 자료사진 속에서도 오인철은 특정사진을 별 어려움 없이 콕콕 집어내는 것이였다.
일찍 양봉장 취재를 위해 차도 통하지 않는 산길을 도보로 다그치다가 벌에 쏘여 눈도 뜨지 못한 채 헤맸던 적도 있었고, 악천후 속에 장백산 기상소를 취재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가 전복돼 목숨을 잃을번 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지금도 사고 후유증으로 한쪽 청력을 잃고 보청기를 사용하지만, 그래도 오인철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것은 촬영기자로 종사해왔다는 그 자부심이다.
화룡 태생인 그는 1968년에 초중을 졸업하고 업여로 로과소학교 소선대 보도원을 맡았다. 그때 처음 사진기를 만져본 그는 대뜸 촬영에 큰 흥취를 갖게 되였고 드디여 1971년에 1년의 수입 180원을 모아서 상해 갈매기표 쌍안렌즈사진기 한대를 사기에 이른다.
농촌의 뉴스거리들을 찍어서 매체에 투고를 하기 시작한 것이 촬영기자의 밑거름이 된듯 싶다. 그렇게 찍어둔 사진들을 모아서 마을에서 사진전시를 개최하기도 했다.
“마을에서 로천영화를 방영하는 날이면 영화 방영에 앞서 마을 사람들의 이모저모를 담은 사진작품들을 띄웠는데 그 인기가 대단했어요.”
그렇게 농촌의 삶의 현장에서 촬영가로 활약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 길림성촬영사업회의에서 ‘농민촬영가’라는 칭호를 수여받기도 했다.
1975년 연변대학 화학학부에 입학한 오인철은 학교 정치부의 위탁을 받고 촬영기자로 활약했고 1978년에 졸업을 하면서 화학 분야가 아닌 연변일보 촬영부에 배치받아 사업하게 됐다.
“요즘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1인 미디어도 발달해서 휴대폰 하나로 세상만사를 열람할 수 있지만 그때는 인터넷이나 커뮤니티가 전무한 시기였어요. 모든 사진은 촬영기자가 현장을 누비면서 직접 찍어야 했지요.”
촬영기자들의 발길이 연변의 구석구석을 제때에 누벼 뉴스단서를 찾기에는 시간적으로나 범위적으로나 힘든 부분이 많았으므로 오인철은 각 현시에 촬영 전문 통신원들을 지정해서 그들의 투고를 받기로 했다.
“각 현시 문화관의 촬영일군들이 통신원으로 활약했습니다. 그들이 사진을 찍어서 현상한 후 우편으로 보내오면 선정해서 신문에 실었습니다. 덕분에 신문에 8개 현시의 뉴스가 골고루 실리고 사진기사의 량이 충족해지기 시작했죠.”
무거운 촬영장비를 들고 취재 제1선으로 가장 빠른 시간에 달려가야 하는 촬영기자의 로고는 웬만한 정력으로 버티기 힘들다. 8개 현시를 메주 밟듯이 누비면서 사심없이 일해온 오인철은 가족에게 소홀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가장 응어리로 남는다고 한다.
외동아들이 페염으로 입원했을 때도 곁을 지켜주지 못했고, 퇴근해서 잠간 들린 병원에서 의사로부터 “오늘 저녁을 못넘길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억장이 무너졌지만 이튿날 훈춘으로 취재를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고 웃으면서 추억을 더듬었다..
50여년 간 오인철은 뉴스사진과 예술사진 6000여폭을 국내외 간행물에 발표했다. 그중 1981년에 촬영한 <동기훈련>은 중국 제1회 청년촬영예술전에서 우수상을, 전국대중촬영콩클에서 3등상을 받았다.
그날 풍경사진을 찍기 위해 안도현 이룡산을 찾았다가 우연히 산기슭에 자리한 안도현4중 빙장에서 아이스하키 훈련을 하는 안도현체육학교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렌즈에 담았는데 중앙방송학원 주이군이 1982년에 《상해문예보》에 평론을 발표, “높은 산우에서 망원렌즈로 부각을 리용해 빙장에서 훈련하는 아이스하키 운동원들의 모습 및 비춰지는 그림자가 마치 하나의 점을 이루는 듯한 형태를 촬영작품에 담아냈다. 촬영물의 하나의 점이란 특징을 포인트로 이끌어냈다.”고 높이 평가했다.
오인철의 또다른 작품, 1982년 자치주 창립 30돐 기념경축대회장에서 촬영한 <황소는 누가 탈가>는 조선족씨름경기장에서 붉은 띠를 띤 큰 황소를 전반 화면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전경(前景)으로 처리하고 씨름경기가 화면의 먼 거리 3분의 1을 차지 하도록 하는 독특한 구조배치로 중국 제1회 농촌체육촬영화란덕컵 콩클에서 우수상을 탔고 1994년 전국 제1회 청년촬영전문작품콩클에 입선됐다. 그밖에도 <분투> 등 100여점의 작품이 국내외 촬영콩클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고 오인철도 1986년에 주정부 제1회 진달래문예상을 수상했다.
오인철은 중국촬영가협회, 중국신문촬영학회, 중국체육촬영기자협회 등 회원이며 길림성청년촬영가협회 부주석, 연변대학 예술학원 촬영학부 초빙교수, 연변촬영가협회 부주석으로 활약해왔다.
“촬영기자는 기자의 뉴스민감성과 촬영가의 예술기교를 모두 갖춰야 되는 매력적인 직업입니다.”
촬영기자라는 직업을 열애한 그는 《연변일보》가 창간돼서부터 2000년도까지 신문에 실린 모든 뉴스사진을 정리해 전자파일로 묶어뒀다.
“사진은 력사를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이 파일속에는 자치주가 걸어온 발자국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2000년 이후에 실린 사진의 량도 방대하지만 조금씩 정리 작업을 꾸준히 이어나가려 합니다.”
글∙사진 리련화 기자/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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