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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의 오늘...그리고 래일
조글로미디어(ZOGLO) 2006년5월10일 10시40분    조회:8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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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이 새 도약의 룡트림을 하고있다. 연변 5개 대학의 통합인 새 연변대학이 《211공정》(주: 국가에서 21세기 중점적으로 건설하고 지지하는 100개 대학 항목) 에 진입 ―2001년 국가의 《서부대개발 중점건설대학》 항목에 진입 ― 2005년 《국가교육부와 길림성정부에서 공동으로 중점지원하는 대학》에 선정 국내에서 성정부와 교육부가 공동으로 중점지원하는 지방대학으로는 유일 ― 천추대업으로 불리우는 7억원 투자의 34만평방메터 연변대학 새 캠퍼스가 2006년 6월 착공 예상 이 항공모함을 지휘하는 선장은 바로 연변대학 교장 김병민―김교장과 마주앉아 거변의 연변대학의 오늘과 래일을 들어볼수 있었다. 다부진 몸매에 걸걸한 목소리, 도전적인 눈매에 힘있게 다문 입술, 그러면서 론리성이 치밀한 언변과 몇시간내 하나 흐트럼이 없는 자세가 인상적인 올해 55세의 토끼띠 김병민씨. [길림신문]:연변대학을 《중국 조선족의 최고학부》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중국에서 보면 연변대학은 한개 지방대학이며 또 세계지도에서 보면 동북아에 위치한 한 보통대학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김총장이 보건대 연변대학은 지금 중국과 세계라는 이 좌표계에서 어느 위치에 와 있는가? 또 연변대학은 이제 어떤 대학으로 가고있는것인가? [김병민총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연변대학이 국가 《211공정》에 진입, 국가의 《서부대개발 중점건설대학》항목에 진입,《국가교육부와 길림성정부에서 공동으로 중점지원하는 대학》에 선정 등 연변대학이 이 세가지 항목에 다 선정된것은 참으로 획기적이며 조련찮은 일이다. 이를테면 지난해 《성부공건》계약체결식에는 국가 교육부 부장과 길림성 성장이 직접 내려와서 싸인했다. 이로써 연변대학은 국가중점대학들과 함께 교육부 항목관리 대학으로 된것이다. 이 한가지로만 《11.5》기간에 1억원을 더 투자하게 된다. 또 오는 6월에는 천추대업으로 불리우는 7억원 투자의 연변대학 새 캠퍼스가 기공을 하게 된다. 이 항목들이 완성되면 연변대학은 새 차원에 오르게 된다. 이는 당과 국가의 배려이면서 또 다년간 전임 교장들을 비롯한 학교지도자들이 대량의 사업을 해온 결과이며 현임 지도부가 뛰여다니며 적극적으로 쟁취해온 결과이다. 현재 연변대학의 좌표를 나름대로 체크해본다면―국내 대학의 순위로 보자 현재 국내에는 국립대학 1040개에 민영대학까지 넣으면 2000여개라고 통계가 나와있다. 2005년 우리 연변대학의 순위는 국내 제110위로 나왔다. 그중 우리 대학의 교수조건과 과학연구지표는 100위안에 들어갔다. 또 과학연구지표에는 기초연구와 기술창신 두가지가 있는데 우리 대학의 기초연구는 70위안에 선정되였다. 기초연구지표는 주로 미국 에쓰씨아이(sci― 국제등재론문검색)에 수록된 론문이 몇편인가로 체크하는데 우리 대학은 이미 160편이 되였다. 쉽게 비교한다면 길림농대의 경우는 30편정도, 료녕대학은 50편 정도이다. 특히 우리 대학의 화학, 약학, 물리 등의 기초연구는 국내에서도 정상급이다. 내가 교장에 부임할 때만도 30여편 정도였지만 2년 남짓한 동안에 이렇게 도약, 우리 대학 과학연구수준의 비약을 잘 보여주고있다. 대학순위 배렬은 종합요소를 본다. 우리 대학이 교수지표에서 점수를 따지 못한데서 순위가 처진것이 유감이다. 특히 원사가 없고 장강학자가 없어서 점수가 많이 떨어진것이다. 또 지명도나 학술영향 등 전문가들의 투표에서도 점수가 오르지 못했다. 이를테면 현재 우리 학교는 학생 모집과 취업에서 실제 위상이 상당히 높지만 아직 인가되지 못하고있기 때문이다. 전국 29개 성시에서 학생들이 모집되는데 산해관 안에서만 해마다 천여명씩 들어오며 졸업생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활약하고있다. 연변대학의 지위와 역할은 국내에서 아주 독특하고 중요하다. 건국전인 1945년에 설립된 대학으로 중국공산당이 제일 먼저 꾸린 민족대학이다. 국가교육부는 시종일관 우리 대학을 아주 중시하고 지지해왔다. 매번 교육부에 갈 때마다 실감하는데 언제나 《로대학에서 오셨군요》라고 하면서 류달리 중시한다. 당과 국가에서는 우리 대학을 당의 우수한 민족정책을 보여주는 창구로 건설하고 여러가지 경사정책과 우대정책을 마련해왔다. 길림성 왕민성장은 《연변대학을 중국소수민족대학의 한폭의 기발로 건설하련다》(把延邊大學建 設成中國少數民族大學的一面旗)고 선언했다. 그런가 하면 교육부 부장 주제는 《연변대학을 잘 꾸리는것은 국가리익에 관계된다. 연변대학은 조선족 교육과 문화발전에 필요할뿐 아니라 지역경제를 공고히 하고 동북지역의 발전을 추진하며 동북아 여러 나라들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논다》고 말했다. 우리가 건설하는 연변대학의 목표는 한마디로 《국내에서 중요한 지위가 있고 국제상에서 일정한 영향력이 있는 민족특색의 대학》이다. 《길림신문》: 연변대학의 학교리념은 《진실 선행 융합》()이라고 되여있다. 왜 이 여섯글자를 골랐는가? 이 여섯글자는 어떻게 나오게 되였는가? [김병민 교장]: 《진실 선행 융합》은 2004년에 완성된것이다. 온 일년간 학생으로부터 교직원 모두가 토론하고 고심하여 이 여섯글자에 우리 대학의 정신과 령혼을 다 담았다. 우리는 지난해 연변 5개대학 합병 기념비를 세울 때 기념비 이름때문에 고민했었다. 그러다가 남영전시인의 시집 《원융(蹈融)》에서 계발을 받고 이 시집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심각하고 무한한 뜻을 담고있는 이 비명은 국무위원 리람청이 친필제사를 썼는데 그는 《참 좋은 비명이다》고 재삼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길림신문》: 《연변대학생》 하면 무엇이 떠오를가? 혹은 무엇이 떠오르도록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과거 한때는 《맥주대학》, 《련애대학》이라는 별명이 있은적도 있었다. 《북경대학생》이나 《청화대학생》 그리고 《캠브리지 대학생》이나 《서울대생》이 아닌 《연변대학생》은 구경 누구일가? [배경자료]: 교직원 2500명, 교원 1500명, 교수 150명, 부교수 480여명, 석사연구생 지도교수 240명, 박사연구생 지도교수 25명, 국무원 학과평심위원 1명, 철학사회학 기획기금항목 평심전문가 1명, 대학명교수 1명, 국무원 정부특수보조금 수혜자 20명, 길림성 특수기여전문가 8명, 재학생 2만여명, 그중 조선족학생 43%, 석사연구생 1231명, 박사연구생 76명, 외국류학생 500여명, 대졸생 취업률 95%. [김병민 교장]: 여기서 《복합형》이 아주 중요하다. 복합형의 력점은 언어와 문화다. 우리의 언어와 문화를 버리지 않는 민족특색의 인재양성이다. 다른 민족 학생들도 연변대학 학생이 되면 조선어를 꼭 배우고 조선족문화와 접촉하며 조선반도를 잘 알게 된다. 지난번 산동반도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산동성내에 연변대학생이 무려 5000명이나 포진해있다는 통계다. 봉래시의 경우 7개 구의 초상국 국장이 몽땅 연대졸업생이다. 산동에서 연변대학생의 지명도가 어느 명문대 못지 않게 대단하다. 연태시에서는 연변대학 분교를 꾸려달라고 부지까지 마련해놓고 수차 찾아왔다. 내가 연태시에 갔을 때 연변대학 졸업생들의 간단한 모임으로 일곱상을 준비했다가 200여명이나 몰려오는 바람에 갑자기 20상으로 늘여야 했다. 현재 연변대학생은 전반 연해지역과 대도시에서 활약하고있는데 개척정신과 도전정신이 강하고 적응력이 빠르다는것이 공동한 평가다. 또 한국어나 일본어를 잘하고 민족특색과 국제감각이 겸비된 인재이기에 환영을 받는다고 한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하고있는 대학교 한국어학부가 43개인데 그중 골간교수와 책임자의 90%는 연대졸업생이다. 《연변대학생》은 이미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브랜드로 형성되고있는중이라고 생각한다. 《길림신문》: 연변대학이 선박이라면 김교장은 이 선박의 선장이다. 바다를 경쟁이라고 생각할 때 그동안 선장인 김교장은 이 선박을 어떤 사유로 어떻게 몰고 왔는가? 이 선박이 항행하는 목적지는 어디인가? [김병민 교장]: 한마디로 말한다면 연변대학을 《현대대학의 리념과 정신으로 민족대학을 꾸려보자》는것이다. 《국내에서 중요한 지위가 있고 국제상에서도 일정한 영향력이 있는 민족특색의 대학》이 목적지이다. 우선 인재양성의 질향상이다. 양성한 인재의 질은 대학의 생명선으로 우리 대학의 《인재질공정》은 이미 3년째된다. 다음 지식창조와 기술창조는 대학의 가장 핵심적인 경쟁력이다. 우리 대학의 과학연구지표는 급격히 제고되였는데 교원들의 과학연구항목은 지난해만도 160개가 새로 개설되여 현재 500여개에 달한다. 우리는 《연변인민이 사랑하는 대학으로 만들자》는 구호를 특별히 내걸었다. 셋째, 대학의 사회봉사는 아주 중요한 사명이다. 연변대학이 연변과 길림성을 위해 잘 봉사하지 못한다면 이 지역에서 꾸리는 의의가 없다. 지금도 《맥주는 그냥 마시면서도 지역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대학》으로 되고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전면합작협의를 달성했으며 길림성과 연변의 16개 회사와 본격적인 협력협의를 맺었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이 큰 법이다. 지금 자치주에서 우리 대학에 주는 과학연구경비는 해마다 늘어나고있다. 봉사를 잘하니 보상이 자연히 따라오게 된다. 넷째, 선진적인 대학문화로 사회진보를 이끌어 존중을 받는것이다. 교원에게 과학연구지표와 함께 사회봉사지표를 하달했다. 사회를 위해 좋은 일, 실제적인 기여를 했다면 점수를 올려준다. 연변의 많은 실제문제를 연구와 봉사를 통해 해결하고있다. 연변의 대표적인 상장회사인 오동그룹의 경우 오동의 연구개발중심이 연변대학에 있다. 오동은 2차개발 새 제품도 우리에게 가져온다. 오동《로반》과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서 늘 제품개발을 한다. 현재 1억원항목인 연변황소의 육질개변 항목도 우리가 맡고있다. 중국5대품종의 하나인 연변황소 기술뒤심은 바로 우리대학이다. 우리 연변대학은 중국조선족 고급인재 양성기지이며 동북아연구와 두만강지역 연구기지이며 장백산 보호와 천연자원 발굴의 기지이다. 례하면 장백산자원을 개발한 약재개발항목은 국가에서 중점적으로 투입하는 항목이다. 우리는 우리 대학의 강점인 화학, 약학, 병리 등 분야의 학자, 전문가 40여명을 묶어 전문연구개발팀을 내왔다. 이미 연구한 간경화방지약, 웅담주사약 등은 그 가치가 아주 크다. 《길림신문》: 교장님은 2003년부터 3 년간 연변대학의 총수를 맡아왔다. 이 몇 년간 연변대학은 거대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사람들은 김병민교장이 파격적이고 자신감과 추진력으로 많은 일을 해놓았다고 한다. 이 시기는 전반 연변대학의 발전과정으로 보면 어떤 발전단계라 할수 있는가? 교장으로서 가장 만족할수 있다고 말할수 있는 일 몇가지를 꼽는다면 무엇을 꼽겠는가? [배경자료]―연변대학 국가급 중점학과 1개, 성급중점학과 8개, 성중점건설학과 2개, 교육부 일반대학교 인문사회과학 중점기지, 길림성 철학사회과학연구기지, 대학직속 연구기관 8개― 동북아연구원, 동방문화연구원, 장백산천연자연보호및개발연구소, 민족연구소 등, 학원직속 연구기구 41개―도문강개발연구소, 중일한관계사연구소 등, 전국급 학술단체― 전국일본철학연구회, 중국조선족력사연구회 등, 자매대학 70여개, 외국적 초빙교수 150명 (10개국). [김병민 교장]: 연변대학은 현재 새로운 발전기회의 앞에 서있으며 제2차 창업이 눈앞에 닥쳐있다. 특히 새 캠퍼스를 설립하여 5개 대학을 한곳에 이전하고 집중시키는것은 말그대로 연변대학의 천추대업이다. 이 몇년동안 성과가 있다면 로총장님들을 비롯한 력대의 지도자들과 교직원들이 닦아놓고 멍석을 펴놓은것이다. 학교건설리념과 건설방향을 명확히 하고 현대대학리념과 정신으로 꾸리며 지역종합대학으로 지역경제사회발전에 공헌하고 인재질, 과학연구수준 관리기제가 변하고 명확해졌다. 길림성에서 처음으로 대학초빙제를 실시했다. 내가 스스로 만족하는 일이라면 두가지다. 한가지는 우리 학교 학술풍기가 올라간것이다. 대학은 학술분위기가 중요하다. 이래야 정기(바른 풍기)가 살아있게 된다. 교원도 4급으로 나누고 특등은 국제재선론문 6편이상이여야 하며 초빙받지 못한 교수는 1년시간을 주어 노력하게 한다. 지난해도 26명 교수가 초빙받지 못했다. 잘해도 그만 못해도 그만인 상황이 사라지고 상하가 노력하고 분투하는 풍기가 형성되였다. 두번째 만족되는 점은 연변대학이 연변지역의 경제와 사회발전을 위해 복무하여 성과가 있고 지방에서 연변대학을 아주 지지하고있다는 점이다. 《길림신문》: 교장사업을 잘하자면 안팎으로 주위와 상하의 지지를 잘 쟁취하는 외교가가 되여야 한다고 말하고있다. 연변대학 발전에 고마운 분들이 있다면 누구를 꼽을수 있는가? [김병민 교장]: 참 많다. 그러나 가장 고마운 사람을 꼽는다면 나는 우리 연변대학 학생과 교원들이라고 말한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인재로 자라고있고 교원들이 열심히 가르치고있어 교장으로서 그보다 더 고마운것이 없다. 당과 정부, 국가교육부, 성정부, 자치주정부 참 고맙다. 연변대학의 일이라면 《로대학의 일이라면》 하면서 언제나 있는 특혜는 모두 경사해주는 교육부의 지도자들, 《해야 할 일이면 토론할것 없이 합시다》면서 언제나 제기만 하면 적극 밀어주던 길림성 왕민성장, 연변대학건설을 위해 몇번이나 교육주관 국무위원과의 만남을 주선해주고 구체적인 방안마련까지 해주신 길림성당위 전철수 부서기. 연변자치주 당위와 정부도 참으로 진심으로 관심해준다. 《중국 조선족에게 하나뿐인 대학이고 연변자치주에 하나뿐인 대학인데 우리가 지지하고 관심하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라고 늘 말하는 김진길주장은 최대한의 지지를 주고있다. 그래서 나는 김주장을 보고 《이전에 주덕해주장이 우리 교장이였는데 지금은 당신이 진정한 교장입니다》고 늘 말한다. 연변대학이 그동안 정부의 대폭지지를 얻을수 있은것은 우리가 아래우로 뛰여다니고 적극 쟁취한 결과이기도 하다. 《성부공건》항목 쟁취를 례로 든다면 전국인대회의 기간 국가발전및개혁위원회에 갔다가 정보를 알게 되였다. 알아보니 《서부대개발 중점대학건설》항목에 든 대학은 원칙적으로 이 항목에 들어갈수 없다고 했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가는 곳마다 찾아가 연변대학의 특수상황을 설명하여 국가 해당 부문과 성정부 지도자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내 끝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수 있었다. 《길림신문》: 편벽한 조국변강에 있는 연변대학의 교장으로서 그동안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였는가? 지금 가장 큰 곤난이라면 무엇인가? [김병민 교장]: 연변대학의 가장 어려움은 인재류실이다. 고층차의 인재를 남기기 어려우며 모셔오기는 더욱 어렵다. 가장 가슴아플 때는 골간교원이 떠날 때이다. 지난번 한 교원이 사망했을 때 나의 마음은 마치 집이 허물어지는것 같았다. 나는 그분의 유체가 다 화장되여도 발이 떨어지지 않아 나오지 못했다. 인재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가장 귀중한 존재다. 《길림신문》: 연변대학의 교장이 아니라 연변대학의 한 학자에게 묻고싶다. 김교수님은 연변대학의 첫 박사이다. 학계에서는 김교수를 중―조(한) 비교문학의 거장이라고 한다. 학문에서 가장 큰 성과를 꼽는다면? 이제 학문에서 오르고싶은, 오르려고 하는 고지가 있다면 무엇인가? 만약 교장직무가 아니였더면 지금 어떤 학자로 되여있었을가? [배경자료]: 김병민 학술성과 조선―한국문학, 중조(한)문학비교 등 학과의 교수와 연구에 종사, 중조(한)문학비교연구에서 새로운 령역을 개척했다고 평가받음, 국가급 과학연구항목 2가지 완성, 현재 국가급연구항목과 성급연구항목 두가지 책임, 국무원에서 발급하는 정부특별수당 향수. [김병민 교장]: 연변대학의 조선언어문학과는 국가의 중점학과로서 국가의 투자와 중시가 아주 많다. 중국 조선언어문학과의 인재양성기지, 과학연구와 문헌자료의 중심이다. 우리 대학의 중조(한) 비교문학과 비교언어학과는 국내의 최정상이며 국외에서도 그 정상위치가 인정되고있다. 그러나 학문연구에서 나는 정상으로 가는 길 중도에서 학문을 제쳐놓은 학자라고 해야 할것이다. 총장사업에 몰두해야기에 연구를 제쳐놓을수밖에 없었다. 내가 연구를 했다고 할수 있는것은 두가지다. 신채호문학연구는 내가 제일 먼저 써냈고 박사론문은 일본, 미국, 한국 등에서 출판되고 비교적 인정되고있다. 학자로서 나의 학문연구는 《만족》이 아니라 《아쉬움》이라 해야 한다. 마음 한구석에 큰 구멍이 계속 뚫려있다. 내가 좋아하는 학문연구때문에 고민도 많이 했었다. 교장일을 그만두면 제일 하고싶은것이 책을 쓰는 일이다. 《신채호평전》을 쓰고싶은것이 소원이였다. 국내와 국외 여러 출판사들이 언녕 출판요청을 했다. 쓰면 잘 쓸수 있을것 같다. 그러나 이미 제자보고 쓰라고 했다. 6년 깔고있던 연구도 재간있는 제자에게 주었다. 그것은 공공재산이다. 나보다 조건이 있는 사람들이 연구하여 볕을 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길림신문》: 김교장은 현재 전국인대 대표로 활동하고있다. 조선족 교육계의 대표로서 정부에 어떤 주요한 제안을 하셨는가? [김병민 교장]: 이번 성인대에서는 중국조선족문화건설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부의 부축과 투자가 크게 증가되여야 한다는 의안을 제기하였는데 여러 언론에 실렸다. 나는 이렇게 주장했다. 조선족문화건설은 단 조선족을 위한 문화가 아니라 중국 다원문화형성에 중요한 생산요소로 중시되여야 한다. 한류가 현재 중국을 휩쓸고있는데 조선족문화우세를 잘 발휘하면 우리도 그런 문화정품을 내놓을수 있다. 우리 연변대학에서는 언녕 이 방면의 항목을 립항했다. 《길림신문》: 항간에서는 김교장을 작고하신 정판룡선생님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다고들 말한다. 또 김교장을 두고 선생님의 학문의 제자일뿐만 아니라 인격이나 인품에서 선생님을 많이 닮았다고들 한다. 김교장이 내놓은 인생신조가 《정직하게 바르게 평범하게 살자》라고 들었다.학자로서 교장으로서 또 인간으로서 1인 3역을 어떻게 소화하는가? [김병민 교장]: 정판룡선생님은 바다같은 흉금을 가진 분이기에 언감생심 비할수 없다. 내가 그분에게서 가장 탄복하는것은 그 어떤 사람이나 다 받아들이는 그 흉금이다. 그분은 나에게 늘 인내와 관용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도리를 가르치셨다. 내가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것도 한 평범한 농촌녀성이지만 그 무사(无私)와 넓은 흉금이다. 내가 태여나서 40일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사망후 큰 어머니를 다 모시고 조카들을 키워 시집장가 다 보내시고 농촌에서 부녀주임사업 하시면서 온 마을의 며느리가 되셨다. 나는 계속 편달을 해보지만 이분들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고있다. 나는 교장으로서 《바르게 평범하게 공정하게》라는 신조를 내세우고 노력하지만 아직 도달하지 못하고있다. 《길림신문》: 교장님이 가장 즐기는 명구가 《…더 한층 높은 봉에 오르라》(라고 알고있다. 인생이나 사업이나 학문에서 김교장이 바라보고있는 더 높은 봉은 어디인가? [김병민 교장]: 어릴 때 문학공부를 좋아하신 형님이 종이에 이 시를 써서 벽에 붙이고 계셨다. 이 시가 내 좌우명이 되였다. 자기를 승화시킨다는것은 욕심을 버리는것이다. 욕심을 가지면 일을 못한다. 가지지 않는것이 갖는것이다. 연변대학을 위해 내가 할수 있는 일을 모두 하는것이 내 갈길이다. 연변대학 새 캠퍼스건설이 바로 연변대학이 《더 한층 오르는》 공정이다. 연변대학의 제2차 창업으로 불리우는 이 공정이 건설되고 대학의 이전이 완성되면 연변대학은 한층 더 높은 봉에 오르게 된다. 이는 연변대학 력사에서 교육부 지도자의 말처럼 《천추대업》이다. 이 공정을 하지 못한다면 연변대학은 경쟁시대 출로가 없다. 지금 대학들이 저마다 시대와 경주하며 탈바꿈을 하고있다. 합병을 해놓았다지만 그냥 저마끔 갈라져있다면 진정 종합대학의 분위기가 없다. 의대, 농대, 과기대, 예술대들이 서로 어우러지고 여러 학과들이 서로 침투하고 교류하고 배우는것이 바로 문을 열고 승화시키는것이다. 의대생이 예대생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교류하고 농대생이 문학원생과 조선족문화를 의논하는 분위기가 돼야 한다. 지금 연대는 기회와 곤난이 병존한다. 주동적으로 도전을 접수하고 이 절호의 기회를 꽉 잡아야 한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락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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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05-29
  • 일제 강점기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와 해방 직후 '부용산'에 곡을 붙인 월북 음악가 안성현(1920-2006)씨가 지난달 25일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27일 입수된 북한의 문학신문 최근호(5.13)는 "민족음악 전문가인 공훈예술가 안성현 선생이 노환으로 4월25일 오후 3시 86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했다"고 보도했다. 신...
  • 2006-05-29
  • [원제:사상 첫 美프로풋볼 한국계 형제 선수 탄생] 한인 이민 역사와 미식축구 사상 처음으로 한국계 美프로풋볼(NFL) 형제 선수가 탄생했다. 사진은 올 시즌부터 뉴욕 자이언츠에서 뛰는 친형 윌 뎀프스(왼쪽)와 디트로이트 라이언스와 1년간 계약한 동생 마커스 뎀프스. 형은 모델로도 활약..동생 데뷔 눈앞 한인 이민 역...
  • 2006-05-29
  • ——— 연변대학예술학원 무용학부 박설화안무를 찾아서 먼저 박설화의 춤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안무가를 만나러 가는 사람이 그 사람의 무용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는 사실은... 비로소 메신저와 사진을 통해 익히 보아온 박설화의 얼굴이 나타났다. 요즘은 잘 안 쓰지만 안무가 박설화...
  • 2006-05-29
  • 네살짜리 재미 동포소녀가 바이올린 연주에 천재성을 보여 화제에 올랐다. 화제의 주인공은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사는 최우희(42세, 미해군연구소 연구원)씨와 피아노연주가 정영은(40세)씨의 딸 유경양이다. 3살때인 지난해 7월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유경양은 1년도 안돼 벌써 8차례의 연주회에 참가했...
  • 2006-05-29
  • 필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러시아동포 5세 미하일 박(오른 쪽) 최근 필자는 프랑스 물랭호텔에서 그림작품전시회를 열고있는 러시아동포 5세 미하일 박을 만났다. 미하일 박은 환갑에 가까운 분이었다. 보통 키에 좀 마른 편이였는데 첫눈에 과묵하고 믿음성 있어 보였다. 그의 조상은 1860년에 러시아로 이주해 갔는데...
  • 2006-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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