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력사에 혼 앗긴 리광인씨 《잠적》 10년동안에도 수백만자 력사서 써내
력사학자 리광인씨한테서 도합 4권으로 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한국학술정보[주])를 받아든 기자는 책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느낄수 없었다. 《남성편》(1, 2권), 《녀성편》, 《소년아동편》으로 묶어진 책은 총 125만자, 140편의 전기가 수록되여있는데 군체(群體)까지 164명의 렬사가 소개되여있는 두터운 책이였기때문이다.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에서 단편이상으로 정리된 항일렬사가 도합 180명좌우, 이번에 출판된 이 책에 오른것까지 합하면 260명좌우 되는데 그중 160명 렬사의 전기를 리광인씨가 혼자 힘으로 발굴과 정리를 마무리했다고 한다.
《렬사전ㅡ<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를 정리, 출판하는것은 저의 오랜 념원이였습니다. 2003년 10월 15일, 전 4권으로 된 이 책의 타자와 교정을 마쳤을 때 저는 그 감회가 참으로 깊었습니다. 이날을 위해 로심초사한지가 몇해였던가요. 이번에 쌍둥이 딸 설이와 향이가 이 많은 자료를 다 타자해줬고 아내의 도움도 퍽 컸습니다. 잊을수 없군요. 그리고 사실 <선렬들 찾아 천만리>의 발자국을 뗀지는 30년전부터라 해야 옳을겁니다.》
1973년 고중을 졸업한 리광인씨는 두만강상류에 위치한 화룡현광평농장에 자리잡았다. 20살 한창 나이인 리광인씨는《광평농장사》편찬과업을 맡고 답사하는 가운데서 농장일대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방면군이 활동하던 유서깊은 고장이라는것을 알게 되면서 항일투쟁사에 흥취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후 독물(讀物)을 통해 양정우, 진한장, 주보중, 리조린도 알게 되였다.
《1978년 대학시험에 합격되여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되였는데 공부를 잘해서 조선족항일력사소설을 쓰려는것이 저의 리상이였습니다. 때마침 중공당사를 배워주던 최후택교수님의 도움으로 난생 처음 수많은 력사자료와 접하게 되였고 할빈에 가 동북렬사기념관까지 견학하게 되였습니다. 거기서 조선족항일투사 김순희렬사를 알게 된 저는 돌아온후 화룡현 약수동에 가 김순희의 투쟁사실을 취재하게 되였습니다. 이것이 저의 첫 력사답사였습니다.》
그런데 력사공부에 너무 깊숙이 빠지는통에 차츰 허구에 의한 소설보다도 진실한 력사를 쓰는데로 돛을 올리게 되였다. 하여 대학 재학시절에 벌써 항일전적지를 답사하고 항일렬사가족을 방문하면서 정리한 항일인물과 이야기를 신문잡지에 척척 발표하기 시작했고 졸업후에는 연변일보사 기자로 뛰다가 아예 연변력사연구소로 전근되여가 조선족투쟁사연구에 몸을 담그기도 했다.
리광인씨는 선렬들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북경, 천진, 산해관, 청도, 상해, 남경, 항주, 소주, 남창, 구강, 서안, 연안 등지와 하북성, 동북 각지 취재길에 얼마나 많은 땀방울을 흘렸는지 모른다. 연변의 산과 들은 물론 두만강, 압록강을 답사하고 여러 독립운동전적지와 항일근거지, 전적지를 메주밟듯했다. 항일련군 제2군의 발자취를 따라 지난날의 동만과 남만의 항일 싸움터들을 주름잡기도 했다. 이러는 가운데서 보관서류관, 기념관, 박물관 등을 통한 력사자료수집작업을 제외하고도 100여명 항일투사와 력사의 견증자들을 찾아볼수가 있었다.
그후 다시 연변일보사 기자로 복귀했다가 어쩌구려 하해(下海)하여 무술학교를 경영한다는 소문이여서 력사고 뭐고 아예 손털고 나앉은줄 알았더니 이렇게 두툼한 책을 척 출간할줄이야.
《하해한 10년간 저는 한번도 력사를 잊은적 없었습니다. 짬만 있으면 새롭게 답사하고 방문하기도 했으며 그동안 모아진 자료들을 정리하군 했지요. 지금 정리를 미룬다면 허다한 렬사들을 영원히 해빛을 보지 못하게 할것이며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게 할것이라는 사명감, 긴박감에 늘 모대기기도 했지요.》
지난세기 80년대에 방문했던 100여명 항일투사를 지금엔 거의 찾을수 없게 되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번 방문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면서 리광인씨는 안도의 한숨을 톺기도 한다.
리광인씨의 력사에 대한 추적은 단순히 사건이거나 수자를 고증하는것이 아니였다. 한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그 사람이 겪은 모든 일을 깡그리 알아내는것이였다. 이것은 아마 문학을 배워서 그런것 같다고 한다. 반일투사 김숙경녀사의 딸 황정일을 취재할 때였다. 꼬박 이틀간이나 항일투사였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대부분의 이야기가 생소한것이여서 력사자료에만 의거했던 빈약점을 메울수 있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묻고 또 묻군 했습니다. <깡치>를 냈지요. 항일투사 려영준아바이를 모시고 연변의 전적지들을 답사할 때였는데 장마에 갇혀 어떤 마을에 묵게 되였지요. 말문을 조만해서는 열지 않는 려영준아바이도 권한는 술을 몇잔 받아 마신후 끈질게 달라붙는 나의 성화에 끝내 말문을 여는데 밤낮 사흘동안아나 구수한 전투이야기를 엮더군요.》
고요한 산촌의 깊은 밤, 주룩주룩 내리는 비소리를 들으면서 리광인씨는 취재수첩을 퍼그나 축내야 했다. 그가 이렇게 방문하여 말문을 열게 한 로인들은 200여명 되는데 많이는 당시 부득이한 상황과 핍박에 못이겨 기순한 사람들이였다고 한다. 그들은 정치운동때마다 두들겨 맞아 최하층의 따라지생활을 하고있었지만 한때는 목숨을 내걸고 혁명에 참가했던 사람들이며 력사의 견증자였다. 력사의 뒤안길에 《더럽게》 쓰러진 이들을 취재한 자료도 잘 정리해 이제 한책 꾸미겠다는것이 리광인씨의 소망이기도 했다.
《력사는 어디까지나 진실하게 서술해야 한다는것이 나의 신조입니다. 공개된 항일녀투사 최희숙의 사적가운데 많은 부분이 나의 조사와 다르더군요. 나는 수차 본 남편인 박원춘로인을 찾아가 당시의 정황을 조사했댔습니다. 이번에 이 책에 올린 최희숙투사의 사적은 진실한것입니다.》
력사에 대한 외곡을 절대 용납할수 없었던 리광인씨는 지난해 년초에 한국서 저명한 녀류작가 강경애를 김좌진장군암살동거범으로 몰아붙일 때에도 많은 자료속에서 력사의 진실을 찾아낸후 인터넷을 통하여 시비를 벌린후 한국을 상대로 력사의 진실을 돌려놓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리광인씨가 지금까지 인터넷을 통하여 론문, 력사전기, 기행문 등을 100여만자 발표했고 40여편의 력사, 문학 론문을 지상을 통해 발표하기도 했으며 300만자의 원고를 작성해놓고있는 상황이였다. 이 원고로 이제 《력사속의 1910년—1920년대》, 《력사문화기행》, 《꼬마항일영웅들》,《리광인론문집 <조서족력사문학연구>(1, 2집)》, 《나의 문학예술세계》, 《윤동주연구문집》, 《강경애연구문집》 등 수두룩한 책들을 펴내게 된다고 한다.
10년 하해에 돈은 벌지 못했지만 이런것을 벌었다고 스스로 흐뭇해하는 리광인씨다.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학술교류부 부장, 연변동북아문화연구원 부원장, 중국조선민족사학회 부비서장, 연변중년문제연구소 소장 등 직을 맡고있는 리광인씨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조선족력사연구란 주선률을 틀어쥐고 부지런히 뛸 참이였다.
김철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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