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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덕선-돈은 벌줄도 알아야지만 쓸줄을 알아야
조글로미디어(ZOGLO) 2006년2월17일 09시14분    조회:9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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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덕신실업유한공사 동사장 서덕선의 이야기 서덕선, 심양시 내지는 성적으로 기업에 종사하는 조선족들은 물론 일반주민들 사이에서도 그닥 생소한 이름만은 아니다. 80년대 옹근 10년간 심양시 조선족음식업계를 풍미했던 그 유명한 대동강식당의 주인이였던탓도 있겠지만 근년간 꾸준히 기업경영에 종사함과 아울러 조선족사회의 각종 유익한 행사에도 적극 참여하며 경제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은것 역시 중요한 원인이 아닐수 없다. 얼마전에는 타성인 반석시 한 조선족 동네에까지 찾아가 로인들의 낚시용 양어장을 마련하라며 돈 만원을 주고왔다지 않은가. 일전 기자는 그를 취재, 기업경영담을 비롯해 일부 생활이야기를 듣게 되였다. 덕선(德善)이란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리 우리의 대화는 그의 최근의 반석행으로부터 시작됐다. 반석시 연통산진에 장복촌이란 동네가 있는데 한족과 조선족 혼합촌인 이동네에 70여세대의 조선족이 살고있다. 9월말 서덕선은 우정품을 내여 이 동네로 찾아가 촌에 조선족로인들을 위한 낚시용 양어장을 건설하도록 돈 만원을 기부한후 자기가 직접 달아다니며 관련 수속까지 해주었다. 그가 이 동네와 인연을 맺게 된데는 별 특별한 사연이 깃들어있는것도 아니였다. 4년전의 어느날 겨울 어떻게 되여 이 동네 학교마당 옆을 지나며 조선족로인들이 한데 모여 손을 부비며 한담하는 모습을 보게 되였다. 로인들이 활동실이 없어 이 추운 겨울에 이처럼 바깥에서 지낸다는것을 알고 그는 무작정 동네 간부를 찾아가서 자기가 이 동네 로인들을 위해 활동실 하나를 지어드리겠다고 자청했다. 그후 약 1년후 이 동네에 4간짜리 로인활동실이 덩실하게 세워졌다. 활동실이 문을 열던 날 빈곤하게 살며 생기가 없던 이 동네가 잔치분위기로 들끓었다. 로인들은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판을 벌리였고 반석시 시장이 직접 동네까지 찾아와 서덕선을 접견하며 그의 선행에 대해 높이 치하하였다. 당시 타성의 한 기업인이 10만원 거금을 들여 자기와 아무런 친분관계가 없는 타지 농촌 로인들을 위해 활동실을 지어주었다는 기사가 길림일보(한족신문)를 비롯한 여러 신문에 널리 실렸었다. 《이렇게 맺어지게 된 인연이 그후 쭉 이어졌고 지금은 그곳 사람들과 허물없는 사이가 돼버렸습니다.》 동네 로인들은 활동실이 지어진후 약간의 오락시설을 갖추려 하니 자체의 힘으로는 그것마저 해결하기 어려웠다. 생각다 못해 렴치불구하고 다시 서덕선동사장을 찾아가기로 했다. 심양까지 찾아온 그들이 《서동사장, 도와줄바엔 끝까지 도와주구려… 우리가 참 렴치가 없지비.》라고 했을 때 그는 그들이 렴치없다는 생각이 들 대신 내가 왜 오락시설 갖추어줄 생각까지 하지 못했느냐는 자책감에 오히려 제쪽에서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이튿날 그는 그들을 데리고다니며 텔레비죤 3대와 노래방기계 2대 그리고 주방에서 쓸 그릇 등 3만원어치의 물품을 사서 보냈다. 그후부터 그는 1년에 꼭꼭 한번씩 장복촌에 다녀오군 하는데 갈 때마다 이런저런 물품을 장만해가서는 로인들을 기쁘게 해드렸다. 작년에는 고급낚시대 50대를 갖고 갔었는데 그 주변에 마땅한 낚시터가 없는것을 알고 이번 걸음에는 또 낚시용 양어장까지 만들도록 한것이였다. 《덕을 많이 쌓고 착한 일을 하면서 살라, 아마 이런 뜻에서 부모님은 저의 이름을 덕선이라 지었겠지요. 그러니 저는 울며겨자먹기로라도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남들로부터 <모조품>이란 말을 듣기 쉽상이니깐요.》 말은 이처럼 롱조로 하였지만 그는 진정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모름지기 애써왔다. 10여년전 그는 강평의 두 빈곤학생을 위해 4년간 모든 학업비용을 대주었고 최근년에는 여러 조선족학교에, 각종 조선족행사에 어림잡아 십수만의 후원금(혹은 찬조금)을 기부하였다. 황소울음 터뜨려가며 어렵게 일구어낸 업체 이런 저런 행사에 또는 불우한 이웃돕기에 목돈을 척척 내놓는다고 그의 돈이 하늘에서 떨어진것은 아니였다. 그의 재산 역시 뭇사람들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온갖 시련을 이겨내며 천신만고 어렵게 모아진것이다. 나라적으로 개혁개방이 갓 시작되였을 때 서탑거리에서 개체식당으로서는 가장 먼저 일떠선 대동강식당은 그의 어머니가 300원의 밑천으로 허름한 판자집에서 첫장사를 시작, 후에 규모가 커지면서 온집식구가 동원되였다. 1983년 성조립공사에서 퇴직하고 나온 그는 식당에서 주로 음식재료 구입과 모든 잡일을 도맡았다. 매일 새벽 일찍 삼륜차를 몰고 시장에 나가 각종 남새와 고기류를 사들여야 했고 식당에 돌아와서는 또 손님들이 불고기를 구을수 있도록 숯불을 피워야 했다. 《밤중에 삼륜차 안장을 뽑아가질않나. 식당에서 총싸움이 벌어지지 않나 하여간 별의별 일로 무진 애간장을 태웠어요. 그때 버티여내지 못하고 뒤걸음쳤다면 후날 성공의 희열을 맛보지 못했겠지요.》 《대동강》은 점차 외성에까지 소문을 놓기 시작했고 《대동강》의 불고기는 심양시 음식업계의 한 브랜드로 떠올랐다. 당시 일반 공무원들의 월 평균로임이 100원도 채되지 않는 상황에서 《대동강》은 하루 2-3만원이란 놀라운 매상고를 올렸으며 시와 성의 령도들까지 가끔 이 식당을 찾았다. 9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식인테리어로 꾸며진 식당들이 차츰 나타나면서 지난날 서탑거리에서 독주하다싶이 한 《대동강》에 위기가 닥쳤다. 서덕선은 집사람들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과감히 부동산개발이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다. 《그때의 형세를 나름대로 분석한후 건설업이 전망이 밝아보여 92년 혼하민족개발구에 40만원을 투자하여 수천평의 땅을 사들였습니다. 남들은 저를 보고 미친놈이라고 손가락질했어요.》 하지만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 그는 이곳에다 임대용 공장건물을 지으려 작심했다. 그러나 일은 첫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토지국, 도시관리국, 전업국, 지질국 등 무려 10여개에 달하는 부서의 도장을 맞는데만 6개월을 넘길줄이야. 가는 곳마다 이러저런 트집을 잡고 늘어지며 질질 미루기만 했다. 속에서는 욱하고 불기둥이 치솟았지만 곁으론 끝까지 웃음을 게발라가며 굽석거려야 하는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비참했다. 어느 한 부서에 가서는 무릎까지 꿇고 애걸하다싶이 하고 나와서는 눈덮인 광야에 대고 황소울음을 터뜨렸다. 피타는 노력을 들여 공장건물을 지어놓으니 이번에는 또 임대자들이 인차 나타나지 않아 속을 졸였다. 요행 하나 나타났다 싶었는데 3년동안 임대료 한푼 내지 않고있다가 슬쩍 한국으로 뺑소니를 칠줄이야. 다행히 후에 공장건물 한채가 900만원에 팔려 사업을 이어나갈수 있었다. 현재 그는 덕신륙통인쇄공장(남과 합자)까지 하나 운영하고있다. 어머님은 영원한 나의 우상 서덕선의 마음속에 어머님은 영원한 우상이다. 《흔히들 어머니를 묘사할때 위대하다는 단어를 즐겨쓰는데 우리 어머님이야말로 위대하다는 단어에 추호의 손색도 없습니다.》 그의 어머니 김영숙로인은 그의 생모가 아니였다. 그이 생모는 1950년 그를 낳고 3개월만에 불행히 병사했다. 그의 생부는 혼자 애기를 키우기 곤난하니 리석채의 집에서 강보에 애기를 싸안고 심양역에 도착, 대합실 의자에 애기를 슬그머니 내려놓고 멀찌감치 서서 누가 안아가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한식경이 지나도록 안아가는 사람이 없자 이번에는 애기를 다시 안고 서탑거리의 한 개인려관에 주숙했다가 화장실에 가는척하며 혼자 슬그머니 사라져버렸다. 《그때 그 려관의 주인이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보따리장사를 하며 조선에서 이곳으로 왔다가 국경이 막혀 중국에 머물게 된 분이였는데 당시 이미 아이 넷이나 딸린 홀애비와 새가정을 뭇고있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님은 저를 남한테 주지 않으시고 당신의 친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뿐이 아니였다. 후에 서덕선의 생부가 재취하고 이 집과 래왕이 이루어지자 김영숙녀성은 서덕선의 배다른 형제들에게도 친절을 베풀어 후날 그들이 큰어머니처럼 김영숙녀성을 따랐다고 한다. 남을 사랑할줄 알아야 한다. 남돕기를 즐겨야 한다 등등 이런 말들은 그가 어려서부터 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이야기다. 이러한 어머니의 언행이 자식들에게 거울로 비쳐져 본받게 될것은 당연한 리치이다. 인간적인 교양외에도 어머니는 그한테 장사를 어떻게 하는가를 가르쳐준분이기도 하다. 해방전부터 보따리장사, 려관경영 등 상업활동에 종사한바 있고 개혁개방이 시작되자 또 선참으로 개체업에 뛰여든 어머니는 장사에서 그의 계몽선생이 되기에 충분했다. 1996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뜬 그의 어머니는 만년에도 종종 그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주었다. 돈을 벌줄도 알고 또 옳게 쓸줄을 아는 사람만이 참된 기업인이라 할수 있다. 힘겹게 벌어진 돈을 눈덩이 굴리듯 굴려 사업을 부단히 확대하는 과정자체가 사회를 위한 공헌이며 창조한 재부로 여러 사람들의 리익을 도모했을 때 그 재부는 갑절 빛을 발산하게 된다. 서덕선, 그 역시 참된 기업인이 되기를 원하며 이를 실천해가고있다. 태산 룡파 "심양조선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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