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명한 우표수집가 전광하씨의 우표애환
《가난으로 하여 더덕더덕 기운 바지를 입고 헌신을 끌고다니던 소학교(1995년)때부터 우표수집에 집착했으니 반세기도 넘지요. 한두번만 미쳤따는 소리를 들은거 아닙니다.》
요즘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주우취의 집(州集郵著之家)》으로 출근하는 전광하씨는 자신의 우표수집의 길을 뒤돌아보면서 미소를 띠운다.
어느날부터인지는 모르나 우표에 푹 바져버린 소년 전광하는 우표만 보면 닥치는대로 모아 깡깡마른 조밥풀을 덕지덕지 발라서 노트에 붙여놓았다. 원시적인 우표수집이기는 했지만 1년 남짓 지난후 초라한 우표앨범 바라보는 소년의 마음은 무지개처럼 현란하기만 했다.
《이 출세 못한 미친 놈아,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좀스럽게 이따위 그림딱지를 아까운 공책에 붙여가지고 다니느냐? 냉큼 부엌에 넣지 못할가!》
아버지한테 그만 앨범이 발견된것이다. 아버지의 불호령은 소년의 꿈을 사정없이 부엌아궁이에 쓸어넣었다. 《미친 놈》이라는 첫 칭호도 이렇게 수여받았다. 그너데 며칠후 느닷없이 어버지로부터 수십장의 우표를 선물받게 된 소년은 그만 얼떨떨해지고말았다.
《우표수집을 할거면 좀 착실하게 하면서 끈기있게 견지해야 한다.》
알고보니 아버지는 소년의 우표수집을 지도하던 담임선생님의 권고를 받은것이였다. 담임선생과 교장이였던 남편 김상현선생은 그후 북경에 가서도 편지로 우표수집을 지도해주었을뿐만아니라 외국류학생들한테서 받은 귀중한 우표도 수두룩하게 보내주었다. 하여 소년은 더욱 깊숙이 우표수집의 꿈밭에 빠져버리고말았다.
소년의 집은 너무 가난하였다. 하여 짬만 있으면 누나와 함께 묘포장에 가 힘든 일 어려운 일 가리지 않고 하여 푼돈을 벌어왔다. 이렇게 벌어온 돈을 어머니께 맡기면 학용품 살 돈과 신발 살 돈을 받는다. 소년은 남들이 쓰다버린 종이 뒤면을 공책대신 썼고 해진 신은 깁고 또 기워 신었다. 이렇게 모은 돈으로 서적과 우표를 샀다. 그러나 요구되는 우표를 다 살수 없었다. 하여 남의 편지를 전해주고는 심부름값으로 우표를 달라고 졸랐고 현정부의 휴지통까지 들추어 우표를 모았다. 이렇게 한장한장의 새우표로 앨범을 장식하는 재미 신나기만 했다.
학교를 졸업한후 민영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소년은 이젠 어엿한 청년으로 되였지만 우표수집의 버릇만은 점점 더 굳어져버렸다. 나들이 옷 한벌밖에 없어서 《단벌신사》로 불리웠지만 우표수집에는 통이 커서 호주머니를 툭툭 털어냈다. 하여 친구들로부터 《미친 놈이 미친짓을 한다》는 악의 없는 욕도 먹었다.
수년동안의 노력으로 우표앨범 몇권 묶어졌고 우표수집의 요령도 제법 늘었다. 이렇게 우표수집에 깨알을 쏟고있을 때 난데없는 생벼락이 떨어질줄이야. 《문화대혁명》의 불길이 그를 향해 번져왔던것이다. 1966년 11월의 어느날, 반란파들이 달려들어 《검은 재료》를 들추어간다면서 다섯개의 마대에 귀중한 책과 7권의 우표앨범을 쓸어넣었다. 다른 나라 우표를 가지고있기에 국제간첩이며 자본주의 복벽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본주의 복벽을 바라는 마음에서 자본주의 나라의 우표를 갖고있다고 억지를 쓰는가 하면 쏘련우표를 갖고있는것은 쏘련수정주의에 대한 동경이라고 했다. 반란파들은 빼앗아간 책과 우표를 학교운동장복판에 무져놓고 불을 질렀다. 그 불길과 함께 나젊은 우표수집가는 마음마저 까맣게 타버렸다. 그러나 우표에 대한 애착만은 버릴수 없었다.
《1967년 4월 20일, 첫번째 <문화대혁명>우표가 발행되였지요. 나는 옛병이 도져 다시 우표를 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안 아버지는 주먹으로 땅을 치면서 <이 미친 놈아, 개새끼도 한번 얻어맞은 골목에는 들어서지 않는다는데 넌 우표 때문에 골탕먹고도 또 지랄이냐! 미친짓 걷어치워라!>고 호통치더군요.》
그러던 1971년, 림표사건이 터졌다. 전광하는 가슴이 털컹 내려앉는것 같았다. 그가 모은 우표속에는 모주석과 림표가 있는 우표도 있었고 림표의 친필제사우표도 있었기때문이였다. 전광하는 로동개조를 하고있던 스승 김상헌선생을 찾아가 우표수집을 지하공작처럼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선생은 《문화대혁명우표》는 이제 가치가 높은 우표가 될것이라고 귀띔해주기도 했다. 아닌게 아니라 지금 《문화대혁명우표》는 값이 상당한 귀중한 우표로 되였다. 전광하는 로동자, 교원, 문화관 관원, 시문련비서장, 시문화관 관장 등 직업을 이어오면서도 시종 우표수집만은 놓을줄 몰랐다.
《속담에 구술이 서말이라도 꿰여야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직 우표만 수집하고 작품과 우정력사를 도외시한다면 그것은 수집인것이지 우취인이 아닙니다. 저는 이미 수만장의 우표를 수집했고 <조선민족의 민속풍정(朝鮮民族的民俗風情)>이라는 테마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작품화가 완성된 카드를 하나하나 펼쳐보이는 전광하씨의 기색은 아주 흐뭇해보였다. 민족혼 민족교육, 혼인풍속, 민속, 의식주행, 음악무용 등이 체계적으로 배렬된 우표들은 말그대로 우리 민족의 력사를 한눈에 보게 하고있었다.
전광하씨는 이미 제1차자치주창립40주년우취활동 1등상, 2004년 전 성 로인우표전람 1등상 등수많은 상을 수상했을뿐만아니라 1989녀 맨처음으로 한국에다 중국우표활동을 소개하여 대만만을 인정하던 한국의 우표활동력사를 종결짓게 했으며 2001년에는 한국 서울에서 《조선민족 민속과 문화》라는 테마로 전시회를 펼쳐 한국우취계를 들썽해놓았다. 그때로부터 일본, 한국 등 나라의 우표수집가들은 전광하씨를 찾아 연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전광하씨가 주도하는 《장백산》우취회를 후원해주기도 했다.
전광하씨는 설립된지 14년째를 맞는 《장백산》우취회를 지도해오면서 후더운 마음을 많이 베풀기도 했다. 누가 어떤 테마의 우취작품을 창작하는데 자료가 부족하면 수십년간 수집해두었던 우품을 조금도 린색함이 없이 무상으로 지원해주기도 했다. 어떤 우품은 시가로 천원을 웃도는것도 있었다. 이렇게 지원해준 우표는 몇천장 된다고 한다. 지난해 훈춘시제4중학교가 전 주 중소학교우취시범기지로 되였는데 전광하씨는 4000~5000천장의 우표를 선뜻 내놓았다. 또 회원지 《장백산》의 주필을 맞으면서 잡지를 잘 꾸려 2004년 전국우취활동에 참가한 277종 잡지중 유일한 소수민족문자의 잡지로서 2등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를 두고 소설가 차중남씨는 《가난한 부자》라는 글에서 《60이 되도록 자기 집 한칸 없는 가난뱅이다. 안해는 딸집에 얹혀살고 사무실에서 자취를 하고 빨래질도 손수하는 그를 뵉에도 궁상스럽지만 하냥 웃으며 사는 그는 고등빈민이다》고 쓰고있다.
그렇다. 그는 부자다. 우취의 길을 생의 마지막 날까지 걷겠다면서 얼굴에 하냥 맑은 미소를 담고있는 그는 궁색할수가 없었다.
김철호기자 jzg@ybrb.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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