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강경산-우주정복에서의 조선족과학자
조글로미디어(ZOGLO) 2005년12월5일 09시26분    조회:2018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중국마이크로원격탐지 권위 강경산 원사를 찾아서

그는 중국의 첫 인조지구위성 제조에 참여하였다. 그는 세계 저명한 과학자이며 미크로파 원격탐지창시자인 R. K 모르교수와 합작하여 세계 처음으로 '원격탐지지물미크로파개전성현지측정방법'(遥感地物微波介電性現場測量方法)이란 최첨단 과학원리를 제기하고 국제북극빙천탐측에 응용하여 중대한 성과를 올림으로써 세계과학계에 명성을 떨쳤다. 그는 무인우주선인 '선저우 4호'에 탑재한 원격탐지장치를 설계했다. 그는 달 탐사 우주선 ‘상아 1호’ 프로젝트의 부총설계사이다. 그가 바로 중국조선족 중 유일한 원사인 강경산 교수이다.

얼마 전 경제생활잡지사 취재팀은 중관촌에 위치한 중국과학원 공간과학 및 응용연구센터를 찾아 강경산 원사를 방문했다. 중국의 저명한 과학자를 취재한다니 어딘가 위구심이 없지 않았으나 정작 만나고보니 강경산 원사는 틀거지가 전혀 없는 소박한 분이셨다. 70고개를 바라보지만 전혀 노인답지 않게 기억력이 비상했고 정력이 왕성했다.

고난의 어린 시절

강경산은 1936년 길림성 용정시의 째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뜨는 바람에 생활의 중임이 어머니의 가냘픈 어깨에 떨어졌다. 어머니는 자갈치기, 두부앗기 등 일을 하여 고달프게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굶어죽더라도 자식만은 공부를 시킨다."는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조선족 여성이었다. 경산이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하여 여러 차례 현장상, 우등상을 탔다.

1952년 우수한 성적으로 초중을 졸업한 강경산은 길림고중에 추천받았다. 그러나 맹랑하게 입학시험이 끝나는 바람에 대련으로 갔다가 다시 형님 친구의 주선으로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에 도착하여 여러 공립중학교를 돌아보았지만 모두 시험이 끝난 상황, 수소문하여 찾아간 곳이 바로 사립학교인 대동(大同)중학교(현재 베이징제24중)였다. 대동중학교에서도 강경산더러 입학시험을 치게 했는데 물리와 수학시험은 잘 치렀으나 작문만은 한어로 쓸 수 없었다. 그때 강경산의 중국어 수준이래야 고작 "밥을 먹었나?" 하는 간단한 말들을 알아듣는 정도. 하는 수 없이 조선말로 작문을 썼더니 학교에서는 시험지를 주중조선대사관 대사에게 보였다. 대사가 "아주 잘 썼다"고 해서야 학교에서는 그를 입학시켰다 한다.

고중을 다니는 3년 동안 그는 집에서 입고 간 홑옷으로 추운 엄동을 견뎌냈다. 졸업할 때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구소련유학시험에 합격되어 구소련의 레닌그라드 乌利亚诺夫전기공정학원에 입학했다.

자랑 많은 우주과학연구 생애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 마리… ” 어머니가 자장가처럼 들려주시는 우리 민족의 민요 ‘반달’을 들으면서 자란 나 어린 시골소년의 마음속에는 꿈도 많았다. 저기 저 푸른 하늘에는 정말 계수나무랑 토끼랑 있을까? 이제 커서 꼭 저기 달 속의 ‘계수나무’랑 ‘토끼랑’ 찾아볼 거야.

1957년 구소련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인조지구위성을 발사하였다. 여기서 그는 강한 자극을 받았다. 왜서 중국은 인조지구위성을 발사할 수 없을까? 1962년 우수한 성적으로 유학생활을 마친 강경산이 직접 중국과학원 지구물리연구소에 배치 받아 중국 첫 인조지구위성발사조에 참가하면서부터 우주과학연구의 생애가 시작하였다. 강경산을 조장으로 하는 연구조는 로켓의 위치확정문제를 책임졌는데 이는 로켓을 규정된 위치에로 발사하는 관건기술일 뿐만 아니라 위성을 규정된 궤도에로 보내는 관건기술이다. 강경산은 반복적인 논증과 실험을 거쳐 끝내 갖은 곤란을 물리치고 이 과제를 풀어나감으로써 중국의 첫 인조지구위성발사에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하였다.

문화혁명 기간 강경산은 터무니없는 소련특무, 조선특무라는 감투를 뒤집어쓰고 격리심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 강경산이 없이는 상기 연구 과제를 연구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전문안건소조인원의 감시 하에 연구를 계속했다. 후에 정치상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이 확인돼서야 그는 원래의 사업을 회복하고 직접 첫 인조지구위성의 발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1981년, 국제 상에는 새로운 영역-원격탐지기술이 나타났다. 원격탐지기술에 각별한 흥미를 가진 강경산은 직접 전학삼에게 편지를 써서 중국도 미크로파 원격탐지기술에 대해 연구, 응용할 것을 건의했다. 이 건의는 대뜸 전학삼의 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해 강경산은 방문학자의 신분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저명한 과학자이며 미크로파 원격탐지기술 창시자인 R. K 모르교수와 함께 과학연구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미국에서 강경산은 모르교수와 합작하여 세계상 첫 ‘원격탐지지물미크로파개전성현지측정방법’이라는 새 원리를 제기했다. 이 원리의 발견은 세계 미크로파 원격탐지기술에 빛나는 한 페이지를 열어놓았다.

중국은 자연재해로 해마다 천억 위안 이상의 손실을 보고 있었다. 이런 돌발성적인 자연재해를 즉시 예방하기 위해서는 각종 상황을 즉시 장악해야 한다. 당시 국제 상에는 이 면에 대한 연구가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강경산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

1985년부터 그는 후난(湖南)성에서 간고한 과학연구를 시작하면서 미크로파 원격탐지기술을 응용하여 중대한 돌발성 자연재해를 예측할 것을 제기, 그는 거듭되는 연구를 거쳐 전천후 실시간 시스템인 측량계기를 만들어냈다. 비행기에 장치된 미크로파 원격탐지측량계기는 지면의 모든 상황을 똑똑하게 촬영하여 3만6천 킬로미터 고공에 있는 인조지구위성에 전송하며 정보를 다시 인조지구위성으로부터 즉각 지면지휘부로 전송하는데 전부의 과정은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1990년 중국과학원은 강경산에게 ‘돌출한 공헌이 있는 과학가’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지난세기 90년대 초부터 중국은 유인우주선발사를 꿈꾸었다. 강경산은 유인우주선프로젝트중의 응용시스템 논증조 부조장을 담임, ‘921’임무가 정식으로 항목으로 입안된 후 그는 응용시스템의 부총지휘를 담당했다. 그는 ‘선저우 4호’ 주부하-다모드(多模态)미크로파 원격탐지 주임설계사로 사업하면서 중국 유인우주선의 순리로운 발사를 위해 돌출한 공헌을 했다.

2002년12월30일 중국은 '선저우 4호'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발사하였다. 이로써 중국의 첫 미크로파 원격탐측기가 성공적으로 궤도에 올랐고, 궤도에서 정상적으로 운행할 뿐만 아니라 대량의 필요한 숫자도 얻을 수 있었다. 중국은 우주 미크로파 원격탐지에서 새로운 돌파를 가져왔고, 중국의 미크로파 원격탐지기술을 세계 선진 행렬에로 끌어올렸다. 또한 '선저우 4호발사'는 최후의 무인우주선 발사로서 중국이 무인우주선 시대를 결속 짓고 유인우주선 시대에로 진입하게 했다. 중국은 '선저우 4호'에 이어 '선저우 5호', '선저우 6호'까지 성공적으로 발사했다. 다모드시스템의 성공은 중국 우주지면관측에도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어놓았다. 중국은 풍운(風雲)계열 기상위성에 처음으로 미크로파 원격탐지시스템(풍운3호)을 도입했고, 향후 달 탐사계획에도 이 기술을 이용하게 된다. 달 탐사에로의 이용은 국제 상에서도 아직 공백이다.

2004년12월21일, 강경산 원사 및 우주영웅 양리워이(楊利偉) 등 유인우주사업에 공헌한 과학기술일군들은 ‘曾宪梓유인우주기금회’가 발급하는 '공헌돌출상'을 수여받았다. (양리워이는 특별공헌상 수여받음)

현재 중국은 달 탐사프로젝트도 구상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상아프로젝트', 강경산원사가 바로 이 프로젝트의 부총설계사이다. 바야흐로 달에 올라 '계수나무'며 ‘토끼’를 '볼' 수 있게 된다. 강경산 원사의 말에 따르면 다른 의외가 발생하지 않는 한 중국은 2007년이면 위성을 달에 발사하여 각종 자료를 수집할 수 있고, 2020년이면 달 탐사 유인우주선을 발사할 수 있다고 한다.

성공비결

강경산 원사는 자신의 성공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저는 그다지 총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원대한 포부와 신근한 노력, 그리고 어떠한 기회든지 놓치지 않은 것이 저를 성공에로 이끈 것입니다.”

강경산 원사는 어머니와 부인에 대해서도 감격해 마지않았다. 어머니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강경산을 공부시켰고, 부인은 자신도 사업하는 한편 전부의 가무를 전담당하면서 강경산원사의 사업을 적극 지지했다고 한다. 이들의 지지가 없었더라면 오늘의 강경산이 없었다고 원사는 말한다.

강경산 원사에게는 행복한 가정이 있다. 부인은 베이징대학병원 부원장으로 사업하다가 지금은 퇴직했고, 아들은 운남에서 전자회사를 경영하고 있으며 딸은 중국청년보의 기자로 사업하고 있다. 슬하에 손군과 외손군도 두었다.

조선족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 강경산원사는 우리 민족 젊은이들의 성장에도 무척 관심을 돌리고 있다. 그는 현재 애심장학회 명예고문을 담당하고 있다. 강원사는 우리 민족 젊은이들이 생활수준을 비교하지 말고 능력을 비교하며 널리 민족정신을 발양하며 민족문화를 중시하여 민족을 위해, 인류를 위해 공헌할 것을 희망했다.

프로필:

조선족 1936년 길림성 용정시 출생

중국공정원 원사

중국 달 탐사프로젝트 부총설계사

국가고과학기술우주영역전문가위원회 고문

중국과학원공간센터학술위원회 주임

중국과학원원격탐지연합센터 주임

국제유럽아시아과학원 원사

일찍 국가, 원, 부급 특등, 일등, 2등상 등 십여 항목의 상을 수여받음.

‘曾宪梓유인우주기금회’의 돌출공헌상 수여받음

글/경제생활

월야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룡정시문화관 관장으로 사업하다가 퇴직한 리광평씨는 우리 민족의 력사에서 공백으로 남아있는 집단이민사 연구에 떨쳐나섰습니다. 그는 자비로 오토바이, 사진기,비디오 등을 갖추었습니다. 회갑나이를 넘긴 그가 수십킬로그람 되는 사진기재 들을 지니고 수만킬로메터를 달린다는것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매년 ...
  • 2006-03-02
  • [한겨레] 재일동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아온 ‘권투영웅’ 홍창수(31) 선수가 27일 세계 챔피언의 영광과 짐을 스스로 벗어던졌다. 홍 선수는 이날 세계복싱평의회(WBC) 슈퍼플라이급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 도전자인 동급 1위 호세 나바로(24·미국)를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꺾은 뒤, 타이틀 반납을 선언했다. 그는 “...
  • 2006-03-01
  • [img count='1' width='400' img] 28일 2005전국10대법관으로 당선된 연길시 인민법원집행국부국장 비운룡이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 2006-03-01
  •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 단주앙번 일가견 기자는 25일 오후, 중앙민족어문번역국 당위서기, 국장이며 현재 북경민족대학박사생 도사, 2년간 운남성 성장조리직을 맡았던 단주앙번(장족)을 만날수 있게 되였다. 3년전 처음 연변을 다녀온적이 있는 그는 먼저 연변조선족의 미풍량속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특히 《...
  • 2006-02-28
  • 26일, 최고인민법원, 인민일보, 중앙텔레비죤, 법제일보에서 련합으로 주최한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평의활동이 북경에서 있었다. 연길시인민법원 형사재판정 부정장 비운룡이 2005년 길림성10대 우수법관에 이어 2005년 중국10대 우수법관으로 평의되여 최고인민법원 원장 소양으로부터 《금법추상》(金法槌奖)을...
  • 2006-02-28
  • [한국일보 2006.02.26 18:19:24] “그는 한 많은 이국 땅에서 불꽃 같은 삶을 살다간 작은 거인이었습니다.” 25일 일본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젠덴쓰(全電通)노동회관에서 지난해 12월 28일 타계한 재일동포 고 김경득(金敬得) 변호사를 추모하는 모임이 열렸다. 한국인과 일본인, 민단과 조총련을 가리지 않고 회장...
  • 2006-02-27
  • [원제: '신선족'으로 중국서 떳떳이 살고싶다] -흑룡강지역 첫 한국류학생 김재윤씨 최근년간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이 많아지면서 '신선족'이라는 신조어가 동포사회에서 류행되고있다. 한국 웹사이트인 네이버 오픈사전에 따르면 신선족을 "류 학, 현지 근무 등의 명목으로 중국으로 건너왔다가 아예 중국땅에 눌러앉아 살...
  • 2006-02-27
  • 국내 최장기 연재 집필 이규태 떠나다 [조선일보 2006-02-25 22:03] 조선일보 이규태(李圭泰·73) 전 논설고문이 25일 오후 4시쯤 지병인 폐암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했다. 이 전 고문은 1983년 3월 1일자 본지에 ‘이규태 코너’를 연재하기 시작, 지난 23일자 신문에 독자들에게 보내는 고별사를 싣기까지 모두 6702회...
  • 2006-02-26
  • 얼마전에 연변의 한 문학지가 마련한 모임에서 성보호텔 정영채회장과 자리를 같이하였다. 여러 말이 오간 가운데 연변은 일본, 한국과의 물류관문으로서 장차 동북아물류중심이 될 복된 고장이라는 얘기와 더불어 지금은 문화인들이 어렵지만 이렇게 어려움속에서 성취를 해야 보람이 있지 않겠느냐는 정회장의 말씀이 인상...
  • 2006-02-24
  • 민족력사에 혼 앗긴 리광인씨 《잠적》 10년동안에도 수백만자 력사서 써내 력사학자 리광인씨한테서 도합 4권으로 된 《인물조선족항일투쟁사》(한국학술정보[주])를 받아든 기자는 책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느낄수 없었다. 《남성편》(1, 2권), 《녀성편》, 《소년아동편》으로 묶어진 책은 총 125만자, 140편의 전기가 수...
  • 2006-02-2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