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실크로드에묻힌 조선족화가 한낙연7
조글로미디어(ZOGLO) 2005년11월21일 08시55분    조회:1169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첫 전시회 한편 상하이 기독교청년회에서 써준 소개장을 들고 선양의 봉천기독교청년회를 찾아간 한낙연은 그곳에서 진보적인 청년들의 의식을 깨우는 조직사업에 열중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는다. 덕분에 ‘상하이미술전문학교 졸업생 한낙연의 유화전시회’라는 이름으로 생애 첫 개인전을 봉천기독교회관에서 개최한다. 이미 ‘동아일보’ 기사를 통해 조선인 사회에 소개된 그의 이력 때문에 첫 전시회는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전시회를 통해 그의 이름이 만주 전역에 알려지자 그에게 그림을 배우겠다는 학생이 많이 찾아왔다. 자신 또한 상하이에 가서야 제대로 된 그림을 배울 수 있었던 한낙연은 그림도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그 많은 학생을 다 가르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그는 친하게 지내던 상하이미술전문학교의 동창생 몇몇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동참해달라는 편지를 보낸다. 얼마 후 루사오페이(魯少非), 루이(陸儀) 등 반가운 얼굴 몇몇이 선양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낙연은 그들과 함께 선양의 소남관 풍우대 근처에서 미술학교를 열고 자신이 직접 교장을 맡아 학교를 이끌어갔다. 하지만 이름만 허울 좋은 교장일 뿐 월급은커녕 오히려 모자라는 학교 운영비를 해결하기 위해 번번이 자신의 그림을 판 돈까지 보태야 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선양 제1사범학교의 미술교원을 겸직하면서 힘들게 미술학교를 운영했다. 하지만 그는 바쁜 와중에도 자신이 왜 선양으로 왔는지에 대한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메이퍼광(梅佛光) 등 진보적인 중국 청년 지식인들과 힘을 모아 쑨원의 삼민주의를 따르는 ‘계몽학사’를 설립한다. ‘계몽학사’의 주요 구성원은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계몽순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했는데 한낙연은 잡지 편집을 맡으면서 청년학생단체들과 연대를 도모한다. 다시 상하이로 그런 가운데 만주에서도 혁명의 기운이 서서히 무르익고 있었다. 1925년에 발생한 5·30운동의 영향을 받아 선양에서도 6월10일 학생 시위가 벌어진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한낙연을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그해 겨울이 끝나기 전 선양에도 중국 공산당 지부가 결성된다. 탁월한 활동을 보인 그를 눈여겨본 상부에서는 한낙연에게 1925년 7월 하얼빈(哈爾濱)으로 자리를 옮길 것을 지시한다. 당시 하얼빈은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국경을 넘어 탈출해온 백계 러시아인이 북적여 ‘중국 속의 러시아’로 불릴 정도였다. 그래서 그 어느 곳보다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을 왜곡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 전파하는 일이 시급했다. 한낙연은 그곳에 설립된 보육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조상지(趙尙志) 등과 독서회와 야학을 꾸리며 조직사업을 병행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당시 중국공산당 동북지구당의 중심지라 할 하얼빈에서는 공산당 계열에서 선전사업의 일환으로 ‘하얼빈일보’를 발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하얼빈일보’의 기사와 논조에 불만을 가졌던 군벌은 끝내 이 신문을 폐간시키고 조직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위험을 직감한 상부에서는 군벌의 주시를 한몸에 받고 있던 한낙연으로 하여금 신분이 드러나기 전에 하얼빈 인근 치치하얼(齊齊哈爾)로 급히 옮기게 했다. 군벌의 체포를 피해 가까스로 치치하얼로 피신한 그는 그곳에서 용강시립공원 도시건설사업의 책임자로 일했다. 지금까지도 치치하얼의 용강시립공원엔 한낙연이 이때 설계한 팔각정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한편 치치하얼에 있는 동안 한낙연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힘을 보태 또 다른 사업을 벌인다. 그리 오래가진 않았지만 ‘낙천사진관’이란 이름의 사진관을 운영한 것이다. 그는 하얼빈에서 틈을 내어 사진 촬영기술을 배운 적이 있었다. 무슨 특별한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배워두면 그림을 그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그때 배운 사진기술을 이용해 사업을 시작할 만큼 그는 다재다능했다. 한편 사진기술은 이후에도 그의 인생에 여러모로 긴요하게 쓰이게 된다. 긴박한 정치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치치하얼에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게 했다. 한낙연에게 다시 상부로부터 활동거점을 옮기라는 지시가 떨어졌던 것이다. 다음 장소는 더 깊은 오지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그의 다음 활동장소는 뜻밖에도 상하이였다. [*신동아]통권554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img count='1' width='400' img] 200 5카이로 세계유도선수권대회 57킬로그람급에서 금메달을 딴 조선선수 계순희가 17일 오후 평양에서 열린 환영행사에서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있다.
  • 2005-09-21
  • 고훈(연변세기팀 감독): 오늘 경기는 아주 어렵게 이겼다. 대방팀이 방어를 견고하게 하고 수시로 역습을 노렸기에 우리를 어렵게 만들었다. 선수들은 난공불락에서 아주 내심했고 끝내 한번의 기회를 잡았다. 지금 한번 승리를 거둔다는것은 정말로 쉬운일이 아니다. 경기에서 위협적인 진공을 많이 했으나 안타까운것은 소...
  • 2005-09-19
  • 주 건설국에서 사업하고 있는 오기준씨가 4만여원을 내 고향마을인 조양천진 다촌에 다리를 놓아주어 촌민들의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조양천진 다촌은 16호세대에 50여명의 인구를 갖고 있는 마을인데 교통이 불편했습니다. 촌민들이 외출하려면 마을앞 개울물을 지나야 했는데 다리가 없어 고생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
  • 2005-09-19
  • 한국축구대표팀을 이끌고 2006년 독일월드컵을 지휘할 딕 아드보카트 감독(58)은 전형적인 네덜란드 스타일의 지도자다. 무엇보다도 경기를 지배하는것을 중시하고 '전원 공격 전원 수비'의 토털사커의 교과서를 철저히 적용하고있다. 네덜란드 토털사커의 창시자이자 1988년 유럽축구선수권에서 네덜란드를 사상 처음으로...
  • 2005-09-19
  • 개혁개방이 심화되면서 중국에 와 투자한 외국기업이 날로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중국사회, 중국인들과 어울리면서 조화로운 사회건설에 기여하고 있고 서로 융합되고 있습니다. 베이징 석경산구역 영락서구에 자리잡고 있는 베이징신기 세라젬 의료계기유한회사가 바로 그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베이징 석...
  • 2005-09-18
  • [원제:효심 애심 량심이 낳은 휘황-전국우수인민경찰 임장하식 공안국장 김동화를 보다] 안도현공안국, 1995년부터 1999년사이 집체3등공과집체2등공을 세우면서 전국우수공안국과 길림성로동모범집단이라는 휘황을 안아온 전투집단이다. 허나 2001년부터 이 공안국은 점점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고 주적으로나 성적으로 뒤...
  • 2005-09-18
  • 한락연은 1898년 12월 8일에 룡정에서 태여났다. 한락연이 최초로 참가한 항일활동은 1919년 룡정에서 있은 《3 13》운동이다. 이 시기 그는 초기 고려공산당활동에 참가, 《3 13》 시위자들이 들었던 태극기 대부분이 한락연이 만든것이다. 1923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한락연은 이때로부터 반제국주의, 반봉건주...
  • 2005-09-18
  • 조선족 작가 장혜영의 저서 가 한국의 인문학계렬의 대학교재로 선정되였다. 흑룡강성 출신인 장혜영씨는 5-6년간 한국에서 장편소설 , 을 출판하였고 2002년에 인문도서 를 펼쳐내였다. 장기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경험한 많은것들을 짬짬이 글에 담아온 소설가는 엄연한 로 변신되여 민족문화학과 사회문화학의 시각에서 한...
  • 2005-09-15
  • 조선족민속학자 천수산씨의 일가견- 1952년 9월3일에 연변조선족자치주(설립시는 구)가설립되였다는 의미는 조선족이 진정 이 땅의 주인이 되여 조선족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양하고 조선족의 민족전통을 대대로 이어나가자는 것이 근본적인 취지이다. 그리하여 많은 유지인들은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단순히 길림성에만 국한되...
  • 2005-09-15
  • 조선족 최군 흑룡강성 '10대걸출한 쳥년'후선인에 당선 흑룡강성 고급인민법원 민사제2재판정 재판장 최군(41세)이 흑룡강성 '10대 걸출한 청년'후선인에 당선되였다. 최군은 사업에 참가한 18년래 부지런히 사업하고 고심히 연찬하며 청렴하고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 전성 법원의 심판수준제고와 량호한 경제법제환경을 조성...
  • 2005-09-1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