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실크로드에묻힌 조선족화가 한낙연6
조글로미디어(ZOGLO) 2005년11월7일 13시39분    조회:901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상해 미술 전문학교 우등졸업 한낙연이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당시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이란 큰 목표 아래 국공합작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한낙연에게 상부로부터 특별한 임무가 부여됐다. 그것은 국민당에 위장 입당해 대외적으로는 국민당으로 활동하라는 지시였다. 물론 중국공산당당적은 비밀리에 유지한 상태였다. 혁명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그는 그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24년 1월, 상해미술학교 졸업을 앞둔 그에게 조직의 상부에서는 조선인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로 가서 사업할 것을 지시한다. 조선인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는 아무래도 중국인보다는 조선족인 그가 훨씬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사업과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하느라 학업에 그리 많은 시간을 들일 수는 없었지만, 그림에 대한 그의 재능은 남달랐던 것 같다.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것이다. 이때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촉망받는 예비 조선족 화가들을 취재한 신문기사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1924년 1월 25일 ‘동아일보’ 에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다. ‘일월 십오일에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두 청년이 있다. 한 사람은 평안북도 의주군에 본적을 둔 김복형이고 또 한 사람은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한 한광우(한낙연의 본명)군인데 중국의 가장 유명한 미술학교인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4년의 과정을 항상 우등으로 지내고 이제 졸업한 것이다. 한광우군은 생각이 높고 심히 활발한 청년으로 가까운 시일 내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고국에 들를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한낙연이 간도로 돌아가는 길에 조국 땅에 들렸다는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와 달리 그는 고향 용정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처자식과 부모형제가 기다리는 용정대신 당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줄곧 심양에 머물렀다. 아무리 당의 임무가 급하더라고 해도 그가 마음만 먹었다면 한번쯤 고향 용정에 얼굴을 내 비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는 용정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심양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한광우라는 본명 대신 한낙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름을 바꾼 구체적 이유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아마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당시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가명을 흔히 사용했다. 그런데 ‘동아일보’ 기사에 등장하는 또 한사람의 조선인 학생인 김복형은 이후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특기할 점은 그 또한 노선은 다르지만 한낙연처럼 독립운동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그는 상해 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의 한 중학교에서 미술선생을 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흥사단단원으로 안창호선생이 상해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그의 비서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임시정부에도 관여했다. 특히 그는 1932년 윤봉길의사의 홍구 공원 폭탄 투척 당시 임정을 비롯해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한인연맹의 주요인물 들과도 교류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김복형도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재학 중일 때부터 독립운동에 관여한 학생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광복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 그냥 눌러앉은 김복형은 독립운동의 공적을 뒤늦게 인정받아 1998년에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신동아] 통권554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기:교정의 목소리 오늘은 저희 방송국에서 실습을 하고 있는 중앙민족대학 임해숙학생과 얘기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안녕하세요? 임: 안녕하세요? 중앙민족대학 조문학부 4학년을 다니고 있는 임해숙입니다. 기: 줄곧 학교에서 공부만 하다가 사회에 진출해 실습을 하니 느낌이 어떠했는가? 임:처음에는 많이 두려웠어요,하...
  • 2006-03-30
  • [원제: 비판보다 사랑이 연변을 키운다] 연변 성보빌딩 총경리 김성순 출장다니다보면 가는데마다 연변사람들을 만날수 있어 반가웠다. 반가워서 이렇게 저렇게 한자리에 모이다 보면 《연변》이야기가 나오지 않을수 없었다. 《락후한 연변이 언제 연해지구처럼 되겠는가?》 《연변사람 게으르다》 《연변사람 사기군이 많...
  • 2006-03-29
  • 중국 교육부 중앙교육과학연구소 교육이론부의 리수산 주임(49)은 대륙의 새마을운동 전도사로 통한다. 중국동포(조선족)인 그는 중국이 올해 '중앙 1호문건'을 통해 강력한 추진 의지를 밝힌 사회주의 신농촌 건설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중국 언론에서평가받고 있다. "중국 농업부 교육국장이던 93년 베이징에서 ...
  • 2006-03-29
  • 《와-이것이 과연 한복일가?》 기존 전통한복의 단아한 운치와 우아한 스타일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편의성, 개성미, 실용성을 두루 접목시킨 현대풍의 개량한복이 시중에 선뵈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화제를 만발하고있다. 새로운 성향과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이 패션작의 주인공은 류송옥씨...
  • 2006-03-28
  • 《누가 장애자는 자립못한다더냐!》 호트라인전화 접대원 맹인일군과 함께 사업에 골똘하고있는 박일씨(오른쪽) 3월 6일,《장춘시장애자창업협회》가 마침내 설립되였다. 협회는《장애자들을 위해 취업, 창업, 생활안내와 혼인 등 문제를 해결해주고 정부의 압력과 부담을 덜어주며 정부와 사회에 보답하기 위한것》을 취지...
  • 2006-03-21
  • 연길미주통상대사 박현우회장을 만나 일찍 2004년에 연길시정부로부터 미주통상대사로 위임받은 박현우(미국 캔터키한인재단 회장)회장은 그동안 십여차나 연변과 미국을 오가면서 기타 현, 시의 미주통상대사위임사업을 적극 주선하고 추진하여왔다. 박현우회장으로부터 다면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미주통상대사사업계획을 ...
  • 2006-03-21
  • 전자전공 대졸생 리남씨의 두부인생 탱탱한 스케줄때문에 약정된 시간을 두번이나 미루는통에 지난 16일 저녁 6시경에야 어렵게 남산콩제품유한회사 리남(46세)경리와 자리를 함께 할수 있었다. 두부를 만드는 사람이 아무리 바쁘단들 이렇게까지 바쁠수가? 나의 심사를 알아차린듯 리남씨는 《참 미안합니다. 요즘 공장확건...
  • 2006-03-20
  • 81세 최근갑옹 15성상 땀바쳐 오로지 민족의 뿌리찾기에 전념 룡정에 10개의 유적비 세워 한겨울 같은 혹한이 뼈속에 스며들던 지난 3월 13일, 룡정시 동남교외의 합성리 《3.13》반일의사릉에서는 룡정시와 연변 각지에서 온 지명인사 150여명이 모여《3.13》반일운동 87주년기념추모행사를 펼치고있었다. 찬바람에 백발을...
  • 2006-03-17
  • [원제: 조선족농민의 삶의 질 향상 기대] 중국정협 상무위원 김일광교수와의 인터뷰 일전 기자는 중국정협 제10기 제4차회의에 참석한 중국정협 상무위원인 김일광(72세, 조선족)교수를 인터뷰했다. 북경화학공업대학의 김일광교수는 중국의 저명한 과학자로서 중국정협 제8기, 9기, 10기 상무위원이다. 아래 김일광교수와의...
  • 2006-03-13
  • 기자(이하 기로 약칭):인사말 김병민 대표(이하 김으로 약칭): 연변대학 교장 김병민이다. 이번에 인민대표로 회의에 참석했다. 기: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로서 이번 회의에 참석했는데, 지금까지 제기한 건의아 의안에 대해 많을텐데, 간단한 소개 부탁한다. 김: 의안은 제기한적 없고 정부건의안 같은 것을 제기했었다. 그...
  • 2006-03-1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