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제의 폭압을 피해 화폭속으로 현실도피한 대부분의 당시 화가들과 달리 붓으로 일제에 저항한, 그리 흔치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광복이 된지 반세기가 넘도록 그는 우리에게 잊힌 존재였다. 일제와 맞서 싸우기 위해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한 그의 이력 때문에 남과 북 어디서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광복 전 중국대륙에서 활동하던 ‘연안파’가 광복 후 남북 양쪽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나 비슷한 이유다.
조국의 광복을 그토록 원했으면서도 광복 조국의 땅을 밟아보지 못한 한낙연,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인 그의 그림조차 그의 사후 반세기가 흐른 다음에야 비로소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아직도 이 땅이 입은 분단의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못한 탓이다.
반세기만의 귀향
미술에 문외한인 필자가 한낙연의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중국과 수교이후 실크로드의 길목에 있는 둔황(敦煌)을 발빠르게 다녀온 사람들에게서이다.
“둔황 석굴 어딘가에 한낙연이란 조선족화가가 남긴 글이 있대. 그 사람은 국공내전시기 아무도 관심 갖지 않던 둔황벽화를 발굴한 공적을 중국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지금도 둔황벽화 모사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명성을 따라올이가 별로 없는가봐. ”
그들도 한낙연에 대해 잘 알고 얘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둔황 어디선가 주어들은 이야기를 그 때만 하더라도 중국대륙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필자에게 그들은 역사의 현장인 실크로드를 제 발로 걸어본 여행의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약간은 과장된 듯한 그들의 여행담도중에 나온 둔황석굴이야기는 그 후 내게 한낙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 시발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주고받은 이야기는 술이 깨고 나면 대개 잊히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시테크니 뭐니 해가면서 노동 강도가 점점 높아가는 현대인의 생활에서 자신의 현실적 이익과 별 관련이 없는 대상에 관심을 오래 둘 여유는 별로 없었다.
다만 그들이 말한 것처럼 환한 보름달빛아래에서 모래사막을 거닐고 싶은 꿈만은 버리지 못하고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도 한번 가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중국에서도 오지 중 오지인 그곳에서 1940년대 중반부터 고대석굴의 벽화발굴을 주도했다는 그가 누구인지 불현듯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를 찾아가는 작업은 생각마냥 쉽지는 않았다. 중국에서 활동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연구는 제법 진행되고 있었지만 임시정부나 김산(金山)을 비롯한 몇몇 특별한 인물에 국한됐을 뿐, 특히 미술이나 음악 같은 예술분야에서 활동한 인물에 대한 연구는 황무지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자료부족이라는 현실적 장애에 부딪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그 시간이 오래 지속되면서 누구의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혼자 힘으로 이미 수십년의 세월 저 너머로 사라져버린 그의 흔적을 찾는 작업은 힘에 부쳤다. 그가 삶의 마지막을 보냈다는 둔황을 꼭 한번 가보고 싶었지만 그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무렵은 먹고 살기에도 빠듯했던 까닭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것이 차라리 속이라도 편한 것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고 지내던 차에 잊고 있던 그가 다시 다가왔다.
지난해 추석 무렵 베이징에서 중앙당학교 철학과에 재직 중인 최용수 교수를 찾아본 적이 있다. 물론 그때의 취재대상은 한낙연이 아니라 중국에서 활동했던 다른 조선인 독립가였다. 인터뷰도중에 우연히 한낙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최 교수는 그에 대해서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전해주었다.
“우리는 지금 그를 단순히 화가라고만 알고 있는데, 사실 한낙연은 현실을 떠나 그림만 그리던 화가가 아니었습니다. 3.1운동과 임시정부에도 참여하고, 더 나아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항일전을 수행한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붓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자고 했던 혁명가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계속) 글쓴이 이종한
[*신동아] 통권554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