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조선족 화가 한락연
조글로미디어(ZOGLO) 2005년9월18일 10시28분    조회:1397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한락연은 1898년 12월 8일에 룡정에서 태여났다.

한락연이 최초로 참가한 항일활동은 1919년 룡정에서 있은 《3 13》운동이다. 이 시기 그는 초기 고려공산당활동에 참가, 《3 13》 시위자들이 들었던 태극기 대부분이 한락연이 만든것이다. 1923년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한락연은 이때로부터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민족해방운동에 적극 뛰여들었다. 1923년말, 한락연은 상해미술전문閨낯?졸업하고 당의 파견을 받고 동북에 왔다. 그는 봉천(지금의 심양)에서 개인회화전시를 하는 한편 《향도》, 《중국청년》을 비롯한 진보적인 간행물과 맑스 레닌주의 서적들을 소자원, 염보항 등에게 제공해주었다.

1925년, 한락연은 할빈 보육중학교에서 미술교원으로 있으면서 지하공작을 했다. 그는 초도남, 조상지 , 왕광록 등과 함께 청년독서회를 조직하고 맑스 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1929년 한락연은 서양회화예술을 배우기 위해 홀몸으로 프랑스에 갔다. 1934년 3월 1일, 부의가 황위에 오르고 위만주국을 건립한 소식에 접한 한락연은 프랑스 류학중인 동북학생들을 조직하여 《프랑스 중국 동북 4개성 동학선언》을 발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을 폭로하였다. 그후 한락연은 프랑스 대표로 유럽화교 조직인 전 세계화교구국련합회 제2차 대회에 참석, 후보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1937년, 양호성장군이 프랑스 빠리방문을 마치고 귀국할 때 유럽 중국공산당은 프랑스와 독일에 체류중인 공산당원과 청년단중의 10여명 청년을 선정해 양호성장군과 함께 귀국하게 했는데 그가운데 한락연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한락연은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무한 동북항일구국총회 지도사업에 참가, 이럴즈음에 많은 조선혁명가들을 알게 되였다.

곽말약이 지도하는 제 3청 예술가연안방문단에 든 한락연은 1938년 11월 20일에 모택동의 접견을 받았다. 이 시기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은 인민들은 일떠나 일본제국주의를 소멸하자!》라는 거폭의 유화가 한구( 口)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란 유화는 황학루(黃 樓)에 걸려있었다.

1939년 3월, 국민정부 당정위원회가 설립되면서 한락연은 소장지도원으로 임명돼 위원회의 일을 했다. 위원회 과업은 주로 전지(戰地)의 각 당파 및 각 부대간의 관계를 조절하고 마찰을 제거함으로써 국공합작을 토대로 한 전면항전을 끝까지 진행하는것이다. 장개석이 당정위원회 주임위원이고 리제심이 부주임위원을 맡았으며 주은래가 위원으로 있었다. 임기내 한락연은 두차례에 거쳐 진동남(晋 南)항일전선에 가 고찰하였다. 첫 고찰후 한락연은 자기가 본 군민생활, 전투상황, 산서 희생동맹회( 盟會)의 항일공적을 전지당정위원회에 상세히 보고해 각측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 4, 5월에 한락연은 두번째 진동남행을 했다. 당시 국민당 제1차 반공고조가 일어난후여서 국공량당은 다소 긴장된 상태였다. 한락연은 태항산 항일근거지에 가 팽덕회와 좌권을 만나보고 팔로군 총부의 견해를 93군 참모장 위외(魏巍)에게 전했다. 6월초 서안을 거쳐 중경으로 가는 도중 한락연은 국민당헌병에게 체포되여 섬서성 당부 특종구류소에 수감됐다.

당조직의 활동하에 1943년에 가석방된 한락연은 그림을 그리는 한편 기회를 빌어 서북 소수민족지역에 가 민족단결사업에 진력, 1947년 7월 30일 비행기사고로 한락연은 세상을 하직했다.

최룡수(중앙당학교 교수)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원제: 시 10명 걸출한 법관’에 리성현씨 입선] 반년간의 까다로운 선발끝에 최근 심양시의 1700여명 법관가운데서 ‘심양시 10명 걸출한 법관’이 선출됐다. 그중 리성현씨가 유일한 조선족으로 영광스럽게 ‘심양시 10명 걸출한 법관’에 입선됐다. 이번 선발활동은 ‘료녕성 10명 걸출한 법관’선발활동의 중요한 일환으...
  • 2006-01-23
  • 료녕성 본계소방지대 명산대대 특근중대의 부중대장인 김춘명(29세, 조선족)씨가 건국이래 료녕성 최초의 ’10명 공훈 경찰’로 당선됐다.1995년 12월에 소방경찰부대에 입대한 그는 선후로 1500여차례의 소화작업과 구조작업에 참가해 65명 군중을 구조했다. 2004년 12월에 그는 공안부로부터 ‘모범소방전사’영예칭호를 ...
  • 2006-01-23
  • [원제: 조선족기업의 참여의식이 민족발전의 받침돌] ○ 청도조선족기업협회 회장 정경택 새해 벽두에 들어서《길림신문》 독자들과 만나게 된것을 자랑과 영광으로 생각한다. 민족사업과 민족이 발전하는 과정에 그 큰 틀안에서는 우리 조선족기업의 몫도 크게 작용할것이라고 느껴지고 따라서 청도 조선족기업협회도 그 몫...
  • 2006-01-23
  •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 흑룡강. 이 4개 강 류역에 우리 중국 조선족의 뿌리가 있다. 우리는 한반도로부터 이곳에 이민을 와 이 땅을 개척했고 또 이 곳에서 이 땅을 지켜 일제와 피 흘리며 싸웠으며 감격의 해방도 이 땅에서 맞았고 지난 반세기 남짓한 기간 이 땅을 건설해 왔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는 중국 조선족으...
  • 2006-01-23
  • 저명한 우표수집가 전광하씨의 우표애환 《가난으로 하여 더덕더덕 기운 바지를 입고 헌신을 끌고다니던 소학교(1995년)때부터 우표수집에 집착했으니 반세기도 넘지요. 한두번만 미쳤따는 소리를 들은거 아닙니다.》 요즘 아침밥술을 놓기 바쁘게 《주우취의 집(州集郵著之家)》으로 출근하는 전광하씨는 자신의 우표수집의...
  • 2006-01-20
  • 심양시 소가툰구 홍성촌 조선족농민 조동철씨(28)가 일전 공청단료녕성위, 료녕성농촌경제위원회, 료녕성림업청, 료녕성수리청, 료녕성과학기술청, 료녕일보, 료녕인민방송국, 료녕텔레비죤방송국에서 공동주관하는 제5회료녕성10대걸출농촌청년 공식후보명단에 들어갔다. 조동철씨는 인터넷을 통한 농산물판매와 국제무역에...
  • 2006-01-20
  • 룡정시 시장 차광철 인터뷰 차광철시장은 《11.5》기간 룡정시에서는 공업의 《제2차창업》발전책략에 립각하여 신형공업화를 핵심으로 경제장성방식의 전변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룡정시의 경제총량을 부단히 늘이는 동시에 이를 토대로 각항 사회사업의 조화로운 발전을 도모할것이라고 표했다. 그는 공업은 재정수입에 관...
  • 2006-01-20
  • [원제: 창업문화는 민영경제발전의 근본동력] ○ 길림시선전부 부부장 리천림 문화는 현대경제의 《발동기》로서 문화의 차별 특히 경제발전에 관계되는 창업문화의 차별은 구역경제차별을 조성하는 요소이다. 민영경제를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사상속박에서 벗어나고 관념을 갱신하고 창업문화를 양성하여야 한다. 창업문화...
  • 2006-01-19
  • [원제: 젊음, 창업의 최대 자본] 장춘 용수산숯불구이점 김현구사장을 찾아 2000년 6월에 개업한 용수산숯불구이점은 한국 류학생들의 입소문으로 한국 손님들뿐 아니라 현재 중국 손님들도 즐겨찾는 장춘에서는 유명한 음식점이다. 이 숯불구이점은 김현구사장이 젊은 열정이라는 자본만 가지고 일쿼세운것이다. 창업은 누...
  • 2006-01-19
  • 《돈화시에서 과학적발전관을 견지하고 자체실정에 맞게 구역우세를 발휘하면서 발전속도를 다그친다면 긍정코 기획 제반 목표임무를 완수할수 있다고 확신한다》고 돈화시 류유림시장은 향후 5년간 돈화시의 지속적이면서도 쾌속적인 발전에 확신을 표했다. 류유림시장은 금후 5년간 돈화시에서는 중점적으로 공업화행정진...
  • 2006-01-1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