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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제1대 축구인 이광수옹을 기리어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1월28일 12시17분    조회:6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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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 바래지 아니 할 '영원한 화신'
 
 
 
실로 빠른 것이 세월인 것 같다. 벌써 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바로 5년전의 그 여름밤, CCTV 제5채널의 2002한·일월드컵의 생방송을 보다가 까닭없이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팀을 비하하는 해설원의 언사에 참지 못해 전화통을 들고 그 해설원 유건홍과 설전을 벌이다가 쓰러진 이광수옹, 그대로 병원에 실려 갔으나 다시 깨여나지 못하고 그 비운으로 속세를 하직한 중국 조선족 제1대 축구인 이광수옹이다.
말 그대로 중국축구에 대해 그토록 관심하고 좋아하면서도 중국축구의 부패측면과 선수들의 처진 자질 등을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잘되는 호박에 손가락질 하지 말라”,“그래 못먹을 밥에 재 뿌릴 작정이냐?!”고 대성질호하시다가 끝내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셨다. 중국축구발전에 그만큼 기여를 하셨고 또한 중국축구의 발전을 그토록 열망하셨기에 조금도 숨김없이 그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이옹의 삶- 그건 그래로 한국축구나 조선축구가 아닌 중국축구와 끈끈한 인연으로 얽혀 있었다.

   
 ▲ 1958년 중소평가전에 참가했을 때 모쓰크바 붉은광장에서 남긴 사진(가운데사람)
(1)


1930년 이광수옹이 태여난 곳은 중국 길림성 연길현의 물리거우(지금의 룡정시 조양천진 덕신촌)이라는 곳이었다. 그때는 한창 일제가  “9.18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전해라 용정과 연길을 포함한 연변 각 지에 반일애국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기었다.

그리고 당시 진보적인 조선인들은 서방의 선진사물을 대량 흡수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 선진사물 속에는 축구, 야구와 삥뽕(탁구)를 비롯한 체육종목도 많이 망라돼 있었다. 목적은 선진적인  체육활동으로 민족의 신체소질을 증강시키는 한편 계몽사상을 취입시키자는데 있었다.

바로 이렇게 격변기에 태어난 이광수옹이었기에 새로운 사물에 대한 흡수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당시 이광수옹의 모친인 안일심 여사는 인근동네에 소문난 그네뛰기, 널뛰기, 달리기 능수라 이옹은 모친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1937년 허진네 형제라고 부르는 두 선생이 물리거우에 와서 서당을 차리자 이옹은 선참으로 서당에 붙었다. 그대 서당에 다니는 학도들로는 거개가 12살, 13살씩 되는 애들이었고 지어는 15살씩 되는 애도 있었다. 그중 8살짜리는 오직 이광수옹 혼자뿐, 하지만 그는 제일 영리하고 약삭빠른 소년이었다. 때는 한창 조선청년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마라톤우승을 했다는 소식이 전반 동만을 휩쓰는 때라 어린 이옹의 가슴에도 어느 덧 꼭 손기정처럼 이름난 체육인이 되겠다는 불티가 심어졌다.
그때로부터 이광수옹은 체육에 대한 그 어떤 이념을 갖고 거기에 몸을 담그기 시작, 하긴 그때까지도 자기가 스포츠의 어느 종목을 전공하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없었고 그렇다고 이끌어 주는 이도 거의 없었다. 그저 용정이나 조양천에서 운동회가 열릴 때마다 가서 보고는 그대로 흉내를 내군 했는데 거기엔 축구외에도 삥뽕, 스케이팅, 야구, 정구 등 벼라별 종목이 다 있었다. 하긴 당시 모든 여건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이옹은 곧잘 머리를 쓰군 했다. 예하면 축구공이 없자 헝겊공을 만들어 차기도 햇고 장소가 없으면 감자를 파낸 밭이나 강변 백사장을 택했고 일본인들이 쓰다 버린 밥주걱을 탁구채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2)

1945년 1월 가정에서는 연길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이옹의 요구대로 연길로 이주했고 그는 연길에 있는 간도국민고등학교(현재의 연길시 2중 전신)에 입학했다.
그뒤 얼마 안있어 드디어  “8.15광복”이 됐다. 이는 망국노의 설을을 안고 방황하던 수많은 조선인청년들한테 해방의 새 기쁨을 안겨줬다. 이광수옹도 마찬가지었다. 일제의 구속에서 벗어나 맘꺽 자기의 글도 배우고 체육기량도 닦고 싶었다. 광복은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들어서는 이광수옹한테 무궁무진한 용기와 희망을 줬다. 이옹은 학습에서뿐 아니라 체육종목인 축구, 스케이팅, 농구, 야구 등 종목에서도 남다는 재능을 보여 줬다. 
헌데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개석이 하발령을 넘어 연변으로 쳐들어온다 했다. 이옹은 그래서 적극 탄원해 전선으로 달려가 4개월간이나 쌀과 포탄을 나르는 등 전선원호사업을 했다. 
그후 전선에서 돌아온 그는 연길시 하남소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자기의 지식이 짧음을 감안, 재차 연변고중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했다. 
하지만 동란시기 이옹한테는 공부할 기회조차 길게 차례지지 않았다.
1950년 6월 25일, 이웃나라 한반도에서 내전이 발발했고 그해 9월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인천에 등륙, 한반도정세는 급변해 북측에 몹시 불리하게 됐다.
학교에서는 전시동원령이 내려졌고 학생들은 분분히 탄원해 참군했다. 당시 학교 청년단 총지위원이며 중점당원양성대상인데다 신체까지 좋은 이광수옹은 단연 모든 심사에 합격, 지원군 모 사의 통역원으로 배치 받았다. 
이 부대는 원 중국인민 해방군의 왕패부대인 제38군 소속으로 그해 10월 19일 압록강을 넘자 바람으로 유엔군에 향해 첫 총포를 쏜 부대었다. 그것을 계기로 부대는 청천강에서 대동강으로, 대동강에서 “3.8선”으로, 다시 “3.8선”에서 한강으로 이렇게 큰 전역을 벌일 때마다 항상 선두부대로 나섰다.

이렇게 부대를 따라 남진하면서 이광수옹은 부대에서 맡겨준 통역임무를 훌륭히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오매에도 갈망하더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었다.

(3)

1953년 5월 지원군 총정치부에서는 이옹한테 전근령을 내렸다. 그가 전근통지서를 갖고 안동(지금의 단동)에 도착하니 기다리는 이는 바로 이전의 축구계몽선생인 임근원씨었다.

“광수야, 이 2∼3년 뭘했어? 난 널 죽도록 찾아 다녔다. 지원군에 축구팀이 있는데 잔말 말고 이제부턴 볼이나 열심히 차거라.”

이광수옹은 오래간만에 다시 축구장에 나서게 됐다. 동시에 이전에 몸을 쇠소리 나게 단련한 덕분이랄가? 인차 주력멤버에 들게 됐다.

당시 지원군축구팀은 국내의 여러 경기뿐 아니라 조선인민군축구팀과도 자주 친선경기를 치르군 했다. 경기에서 이광수옹의 강유력한 공격조직, 정확한 패스와 출중하 드리블 등은 늘 대방팀 감독의 호기심을 자아내군 했다.

후에 조선인민군축구팀에서는 이광수옹이 조선족임을 알자 공개적으로 끄당기기 시작했다.
“이군이 우리 쪽으로 오고 싶다고만 하면 조직적으로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소. 그러니 아무때건 생각나면 우릴 찾소.”
조선족으로서 조선을 대표하여 뽈을 찬다는 것 역시 영광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이옹의 생각은 달랐다.
“저는 중공당원입니다. 당앞에 한 맹세를 전 저버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권고를 말아주십시오.”

이렇듯 이옹은 입장이 견정하고 자신이 설 자리를 잘 아는 인간이었다.
그후 1954년에 지원군축구팀이 해산되자 이광수옹은 8.1축구팀에서 오라는 것도 마다하고 공부를 더 할 일념으로 연변으로 돌아왔다. 헌데 연변3중에 붙어 얼마 안되어 원 만주국 축구팀 선수였으며 당시 길림성 축구팀 감독이었던 박노석선생이 어떻게나 지청구를 들이대는지 이옹 역시 나중에는 거절 끝에 길림성 축구팀 전포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로부터 길림성 축구팀에는 이광수란 덩치가 큰 선수가 나타나 전반 축구장을 좌충우돌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특히 이광수옹이 지청용, 손중천 등 선수들과 묵계배합으로 공세를 들이댄다치면 대방은 흔히 진영이 흐트러지고 갈팡질팡하기가 일쑤였다. 그래서일가? 길림성 축구팀은 1957년부터 1960년사이에 전국축구갑급경기에서 두번 4등하고 두번 5등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이광수옹은 당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었던 하룡원수로부터 “길림성 축구팀의 중형탱크”란 별호까지 얻게 됐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들어서서 길림성 축구팀은 신로교체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으며 특히 1963년에는 갑급에서 탈락, 을급권으로 내려가는 불운까지 지녔다. 그때 이광수옹은 이미 나이가 많아 유니폼을 벗은 뒤었다. 하지만 이옹은 길림성팀의 상황을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그는 당시 감독이었던 박만복씨를 협조하여 경기방안을 짜는 한편 수시로 유니폼을 입고 재출전할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런 보람이랄가? 1964년 을급권의 준우승으로 갑급권으로 진입한 길림성 축구팀은 1965년 중국축구갑급권 무대에서 우승보좌에 오르는 빛나는 한페지를 엮게 됐다.

(4)

그후 문화혁명이 터지자 이광수옹 역시 “파쑈감독”,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투쟁받다가 훈춘현 영안공사의 한 농촌으로 쫓겨가기까지 했다. 이렇게 추방됐지만 당시 농민들만은 이옹을 아주 높이 우러러 보면서 운동대회 때마다 이옹을 부르군 했는데 이옹네 내외간(부인 최혜숙 여사는 일찍 1950년대 요녕성 여자배구팀의 선수로서 중국에서 제일 선참으로 건장칭호를 수여받았음)가 경기장에 나서기만 하면 전반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소문을 놓군 했다.

그러던 이광수옹이 복직받아 연변대학에 발을 붙인 것은 1975년, 대학학력이 없는 이옹이 대학교원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크나큰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다년간의 실천경험은 그이로 하여금 대학교수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하게 했으며 1975년부터 1992년 정년퇴직할 때까지 줄곧 연변대학 체육학부 부주임, 주임직을 역임할 수가 있었고 2000년에는 길림오동팀 고문으로 연변축구를 위해 모든 정력을 다 바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육성해 낸 제자들로는 허준호, 방인권, 이호은, 주청열, 김민영, 최영숙, 김복순, 박경희 등 1000여명에 달했는데 그들 모두가 연변대학, 연변축구팀 및 여러분야에서 선후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한편 이광수옹은 대학 체육학부 주임이요, 대학교 교수요, 축구건장이요 하는 틀에서 벗어나 아주 터푸한 노인이었다.

필자는 이광수옹을 늘 취재해왔던 기자로 그 분의 성격과 취미를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저택에서 격에 어울리지 않게 두부찌개에 양주를 마시면서 필자를 “조카”라고 불러주던 이옹, 한잔이 잘 되면 노래방에 가서는 당신의 18번지인 “젊은 병사 고향 그리워 야자수 부여잡고…”를 부르시던 이옹 아니 “고까짓 봉급으로 어떻게 사냐?”하며 “애한테 옷이라도 사주라”며 300원, 200원씩 억지로 넣어주던 이옹…
그 이광수옹이 우리 곁은 떠난지도 어언간 5년철을 잡고 있다. 이옹이 없는 5년간 우리 중국의 체육은 이미 아시아패왕을 벗어나 세계패왕자리를 향해 점차 그 간격을 좁혀가고 있으며 프로축구 또한 부패와의 전쟁을 겪으면서도 점차 옳바른 궤도에 들어서고 있다. 특히 이제 2008년이면 수도 북경에서 올림픽이 있게 되는 즉 저세상에 계시는 이광수옹이 이를 알게 되면 얼마나 기뻐하랴 싶다.

이광수옹이 타계한지 5년철을 잡고 있는 오늘, 필자는 저 세상에 계시는 이옹을 위로할만한 그 어떤 적당한 문구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이 한편의 글에 이 마음을 담아 그저 그이를 추모할 뿐이다.

조선족 축구계의 영원한 제1임자이며 스승인 이광수옹, 고이고이 잠드시라!

[종합신문]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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