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과 91년 연변을 방문해 연변 역사가들을 두루 만났다. 이때 중국공산당 문헌에 수록된 김일성에 대한 기술을 입수해 그가 항일무장 투쟁의 중요한 사람임을 객관적 자료로 입증했다.백두산도 올랐는데 천지의 모습은 장엄했다. |
실은 나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 전에 또 하나의 조선,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다. 나는 김일성의 만주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논문을 쓸 때 동북지방 조선인 학자가 쓴 것들을 많이 참조했다. 따라서 연변을 방문해 직접 역사가들을 만나보면 그들이 써놓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1986년 10월에 고난대학에서 열린 조선사연구회대회에서 기념강연을 함께 했던 연변대학 주홍성 선생과 알게 된 영향도 있었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소장으로 쓰쿠바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낸 주 선생은 조선의용군에 참가했다가 8.15 뒤 옌안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던 부대의 일원이었으나 만주에서 국공내전에 참가하게 돼 이홍광 지대에서 활동했다. 1949년에 북한에 들어가 제6사단에서 고위직을 맡았으며, 한국전쟁 뒤 연변에 돌아갔다. 선생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내게는 실로 매력적이었다.
그런 연유로 1988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고려학회 제2차 대회에 참가하는 길에 대회에 앞서 먼저 연길을 방문했던 것이다. 동행자는 교토대학 조교수 미즈노 나오키씨와 그의 약혼자, 그리고 조선의용군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모리카와 노부아키씨였다.
우리는 8월9일 중국에 들어가 10일에 하얼빈, 12일에 창춘을 방문했다. 하얼빈에서는 헤이룽장성의 대표적인 조선족 역사가 김우종 선생을 찾아갔다. 14일 연길에 갔다. 귀국한 주홍성 선생과 재회하고 연변대학 역사연구소 박창욱, 권립 선생을 만났다. 이 두 분에게 1965년 <사상>에 실린 내 논문을 건네자, 대체로 잘 썼다고 말해주었다. 예상대로 두 분은 쓴 것보다 몇배나 깊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대의 중국공산당 문헌중에 김일성에 대해 기록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했다. 김일성 진짜설, 가짜설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결정적인 자료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자료를 어떻게든 보고 싶었다. 실은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개시로부터 10년이 지나, 동북지역 학자들이 당 문서관에 있는 동북지역 운동 역사자료를 모두 모아 편집한 장대한 66권짜리 자료집 출판을 1987년부터 시작한 참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내부출판으로 나온 것인데, 원래 외국인에게는 기밀이었다. 그래서 그 때는 그 자료집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다. 연변의 민간연구소 소장을 하고 있던 한준광 선생도 만났다. 조선의용군 베테랑 유동호씨는 전부터 알고 있던 모리카와씨 소개로 만났다. 호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89년 연변은 활기찬 도시였다. 국경인 도문강 부근까지 가서 강 건너 북한을 보니 산에는 ‘속도전’ ‘섬멸전’ ‘전격전’ 따위의 구호들이 걸려 있었으나 사람 움직임도 너무 적고 활기가 없었다. 당시는 탈북자문제 같은 건 없던 시대다. 우리는 차와 안내인을 앞세우고 백두산으로 갔다. 운전수가 오디오에 걸어 놓은 것은 이성애의 노래 테이프였다. 백두산 중턱 여관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정상으로 향했다. 천지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선행을 얼마나 쌓았는지에 달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행히 천지는 그 장엄한 모습을 우리 눈 앞에 드러냈다. 거기서 나는 몇 개의 돌을 주워 와 다음해 서울을 처음 방문했을 때 고은씨에게 주었다.
연변에서 베이징으로 가서 국제고려학회에 참석했다. 짬나는 대로 만리장성과 고궁을 견학했다. 또 조선의용군 생존자 문정일씨도 만났다. 두번째로 연변에 간 것은 서울과 평양을 방문한 뒤인 1991년 8월이었다. 연변대학 제2차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에 초청받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지도한 한국인 유학생으로 와코대학에 취직한 유효종씨와 함께였다. 그 토론회에는 주로 한국과 북한 학자들이 초청됐다. 민족해방운동사 분과회에서는 한국에서 박영석, 신용하, 윤병석, 김창수씨 등 노장학자들이, 북한에선 당사연구소의 최진혁씨등이 참석했다. 일본인은 나 한 사람이었다. 나는 동부만주 최후의 공산당조직 책임자였던 위승민이 1940년 4월 초에 산중의 은신처에서 코민테른에 보낸 최후의 편지에 대해 보고했다. 이 편지는 도중에 일본군 손에 넘어가 일본 관헌자료 가운데 하나로 인쇄돼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 토벌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호소하며 마지막 남은 지도자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 중에 “2방면군 지휘 김일성”이란 이름도 있었다. 이 1991년 방문 때 나는 연변대학에서 겸직교수 칭호를 받았다. 그 대학과 일본간의 연결을 위해 힘써 달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때 나는 중국공산당 문헌에 수록돼 있는 김일성에 대한 기술을 입수했다. 1935년에 코민테른에 제출된 동부만주 당 지도자 위승민의 보고에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김일성, 고려인, 1931년 입당, 용감 적극, 중국어를 할 수 있음. 유격대원 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 가운데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대원 사이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구국군(救國軍) 사이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김일성이 다른 유격대원과 함께 찍은 1944년 사진을 권두에 실은 <흑룡강(헤이룽장)당사자료> 제10집(1987년)도 입수했다. 이들 자료는 나에겐 큰 길잡이가 되는 정보였다.
1991년이란 해는 중국공산당이 마침내 역사가들에게 김일성의 만주지역 활동에 대해 실명을 들어 객관적으로 기술해도 좋다고 인정한 해다. 그때까지는 박물관에선 김일성은 이름을 숨기고 반드시 xxx로 표기하고 있었다. 가짜 김일성설을 제기한 이명영씨가, 중국 문헌을 보라, 김일성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해에 나온 <동북항일연군사료>와 주보중(周保中)의 일기 <동북항일유격일기>에서 김일성은 완전히 실명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것은 북한에게는 그때까지의 신화적 설명이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됐다는 걸 의미했다. 이 두번째 체류 때도 도문강 부근을 오래 돌아봤다. 북한쪽에서 일본제 중고 자동차를 밀수하는 일 때문에 강 주변이 엄중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던 때의 일이다. 북한의 모양새도 변함없고 여전히 탈북자 문제도 일어나지 않은 때였다. 연변일보사를 찾아가니 자료실에서 해방 초기의 신문과 함께 북한 <노동신문>을 창간호부터 죽 보여주었다. 이거야말로 보물창고라고 생각했다.
또 중국의 66권 동북지구혁명사 문건집은 90년대 후반에는 국외에도 유출돼 지금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자료집을 가장 계통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93년 연변대학 민족연구소에 유학한 신주백씨의 박사논문 <만주지역 한인(韓人) 민족운동사(1920-45)>(아세아문화사, 1999년)다. 신씨는 김일성에 대해서도 몇 가지 실증성 높은 연구를 발표했다. 연변 역사가는 젊은 한국인 역사가를 특별히 사랑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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