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일성 가짜설’은 가짜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1월26일 12시15분    조회:862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1988년과 91년 연변을 방문해 연변 역사가들을 두루 만났다.
이때 중국공산당 문헌에 수록된 김일성에 대한 기술을 입수해
그가 항일무장 투쟁의 중요한 사람임을 객관적 자료로 입증했다.백두산도 올랐는데 천지의 모습은 장엄했다.
» 1944년 소련령의 동북항일연군 부대원들과 자리를 함께 한 김일성.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 <흑룡강성당사자료> 10집에 수록.
와다 하루키 회고록-내가 만난 한반도/(20) ‘또 하나의 조선’ 연변과의 만남
실은 나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기 전에 또 하나의 조선, 중화인민공화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방문했다. 나는 김일성의 만주 항일무장투쟁에 관한 논문을 쓸 때 동북지방 조선인 학자가 쓴 것들을 많이 참조했다. 따라서 연변을 방문해 직접 역사가들을 만나보면 그들이 써놓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주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1986년 10월에 고난대학에서 열린 조선사연구회대회에서 기념강연을 함께 했던 연변대학 주홍성 선생과 알게 된 영향도 있었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소 소장으로 쓰쿠바대학 객원연구원을 지낸 주 선생은 조선의용군에 참가했다가 8.15 뒤 옌안을 떠나 귀국길에 올랐던 부대의 일원이었으나 만주에서 국공내전에 참가하게 돼 이홍광 지대에서 활동했다. 1949년에 북한에 들어가 제6사단에서 고위직을 맡았으며, 한국전쟁 뒤 연변에 돌아갔다. 선생의 이야기는 한국전쟁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던 내게는 실로 매력적이었다. 
그런 연유로 1988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고려학회 제2차 대회에 참가하는 길에 대회에 앞서 먼저 연길을 방문했던 것이다. 동행자는 교토대학 조교수 미즈노 나오키씨와 그의 약혼자, 그리고 조선의용군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모리카와 노부아키씨였다.

우리는 8월9일 중국에 들어가 10일에 하얼빈, 12일에 창춘을 방문했다. 하얼빈에서는 헤이룽장성의 대표적인 조선족 역사가 김우종 선생을 찾아갔다. 14일 연길에 갔다. 귀국한 주홍성 선생과 재회하고 연변대학 역사연구소 박창욱, 권립 선생을 만났다. 이 두 분에게 1965년 <사상>에 실린 내 논문을 건네자, 대체로 잘 썼다고 말해주었다. 예상대로 두 분은 쓴 것보다 몇배나 깊은 학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대의 중국공산당 문헌중에 김일성에 대해 기록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했다. 김일성 진짜설, 가짜설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것은 결정적인 자료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 자료를 어떻게든 보고 싶었다.

실은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개시로부터 10년이 지나, 동북지역 학자들이 당 문서관에 있는 동북지역 운동 역사자료를 모두 모아 편집한 장대한 66권짜리 자료집 출판을 1987년부터 시작한 참이었다. 그것은 이른바 내부출판으로 나온 것인데, 원래 외국인에게는 기밀이었다. 그래서 그 때는 그 자료집에 대해 물어보지 못했다.
연변의 민간연구소 소장을 하고 있던 한준광 선생도 만났다. 조선의용군 베테랑 유동호씨는 전부터 알고 있던 모리카와씨 소개로 만났다. 호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 백두산 정상에서 천지를 바라보다. 1988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고려학회 제2차 대회에 참가하는 길에 먼저 연길을 방문했고, 그 달 20일 백두산에 올랐다.
연변대학 교수 김동화씨가 내 숙소에 찾아 와 도쿄대학에 재외(在外) 연구자로 가고 싶은데 받아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을 했다. 김동화씨는 1990년 일본에 와 내 연구소에서 1년을 보냈다. 귀국 뒤 연변대학에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연구소를 설립하고 소장을 맡았다. 나와 동년배지만 이미 세상을 떠났다. 또 젊은 강사 강룡범씨도 도쿄대학 대학원에 들어가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내가 신원 인수인이 돼 일본에 입국시킨 뒤 내 연구소 젊은 연구원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는 1991년 10월 일본에 와 93년까지 머물렀다. 뒤에 연변대학 중조일(中朝日)관계사연구소 소장이 됐다.

89년 연변은 활기찬 도시였다. 국경인 도문강 부근까지 가서 강 건너 북한을 보니 산에는 ‘속도전’ ‘섬멸전’ ‘전격전’ 따위의 구호들이 걸려 있었으나 사람 움직임도 너무 적고 활기가 없었다. 당시는 탈북자문제 같은 건 없던 시대다. 우리는 차와 안내인을 앞세우고 백두산으로 갔다. 운전수가 오디오에 걸어 놓은 것은 이성애의 노래 테이프였다. 백두산 중턱 여관에서 묵고 다음날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정상으로 향했다. 천지를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선행을 얼마나 쌓았는지에 달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다행히 천지는 그 장엄한 모습을 우리 눈 앞에 드러냈다. 거기서 나는 몇 개의 돌을 주워 와 다음해 서울을 처음 방문했을 때 고은씨에게 주었다.

연변에서 베이징으로 가서 국제고려학회에 참석했다. 짬나는 대로 만리장성과 고궁을 견학했다. 또 조선의용군 생존자 문정일씨도 만났다.

두번째로 연변에 간 것은 서울과 평양을 방문한 뒤인 1991년 8월이었다. 연변대학 제2차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에 초청받았던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지도한 한국인 유학생으로 와코대학에 취직한 유효종씨와 함께였다. 그 토론회에는 주로 한국과 북한 학자들이 초청됐다. 민족해방운동사 분과회에서는 한국에서 박영석, 신용하, 윤병석, 김창수씨 등 노장학자들이, 북한에선 당사연구소의 최진혁씨등이 참석했다. 일본인은 나 한 사람이었다. 나는 동부만주 최후의 공산당조직 책임자였던 위승민이 1940년 4월 초에 산중의 은신처에서 코민테른에 보낸 최후의 편지에 대해 보고했다. 이 편지는 도중에 일본군 손에 넘어가 일본 관헌자료 가운데 하나로 인쇄돼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 토벌로 곤란한 상황에 처했음을 호소하며 마지막 남은 지도자의 이름을 들고 있다. 그 중에 “2방면군 지휘 김일성”이란 이름도 있었다. 이 1991년 방문 때 나는 연변대학에서 겸직교수 칭호를 받았다. 그 대학과 일본간의 연결을 위해 힘써 달라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때 나는 중국공산당 문헌에 수록돼 있는 김일성에 대한 기술을 입수했다. 1935년에 코민테른에 제출된 동부만주 당 지도자 위승민의 보고에 다음과 같은 일절이 있다.

“김일성, 고려인, 1931년 입당, 용감 적극, 중국어를 할 수 있음. 유격대원 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 가운데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대원 사이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구국군(救國軍) 사이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김일성이 다른 유격대원과 함께 찍은 1944년 사진을 권두에 실은 <흑룡강(헤이룽장)당사자료> 제10집(1987년)도 입수했다. 이들 자료는 나에겐 큰 길잡이가 되는 정보였다.

1991년이란 해는 중국공산당이 마침내 역사가들에게 김일성의 만주지역 활동에 대해 실명을 들어 객관적으로 기술해도 좋다고 인정한 해다. 그때까지는 박물관에선 김일성은 이름을 숨기고 반드시 xxx로 표기하고 있었다. 가짜 김일성설을 제기한 이명영씨가, 중국 문헌을 보라, 김일성 이름은 나와 있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해에 나온 <동북항일연군사료>와 주보중(周保中)의 일기 <동북항일유격일기>에서 김일성은 완전히 실명으로 기록돼 있었다. 이것은 북한에게는 그때까지의 신화적 설명이 더이상 유지될 수 없게 됐다는 걸 의미했다.

이 두번째 체류 때도 도문강 부근을 오래 돌아봤다. 북한쪽에서 일본제 중고 자동차를 밀수하는 일 때문에 강 주변이 엄중한 경계태세를 취하고 있던 때의 일이다. 북한의 모양새도 변함없고 여전히 탈북자 문제도 일어나지 않은 때였다. 연변일보사를 찾아가니 자료실에서 해방 초기의 신문과 함께 북한 <노동신문>을 창간호부터 죽 보여주었다. 이거야말로 보물창고라고 생각했다.


나는 두 번에 걸친 연변 방문을 통해 그 곳 학자들로부터 배운 것과 입수한 자료들을 토대로 65년 논문을 다시 쓴 원고에 가필수정을 해서 91년 말까지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을 완성했다. 이 책은 일본에선 헤이봉(평범)사에서 92년 3월에 출간했다. 한국어판은 90년 서울 첫 방문 때 친해진 이종석씨가 맡아서 그의 번역으로 92년 8월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했다. 김일성은 가짜가 아니라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의 중요한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조선인으로는 가장 유명했다는 게 객관적인 자료로 논증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중국 조선족, 특히 연변 역사가의 협력 덕분인 만큼 깊이 감사하고 있다.

또 중국의 66권 동북지구혁명사 문건집은 90년대 후반에는 국외에도 유출돼 지금은 그것을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자료집을 가장 계통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93년 연변대학 민족연구소에 유학한 신주백씨의 박사논문 <만주지역 한인(韓人) 민족운동사(1920-45)>(아세아문화사, 1999년)다. 신씨는 김일성에 대해서도 몇 가지 실증성 높은 연구를 발표했다. 연변 역사가는 젊은 한국인 역사가를 특별히 사랑한 모양이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2006년 12월18일 , 민영기업 금두그룹이 대형국유기업 길림성교통건설그룹을 재조합한 장거는 각 매체를 통하여 삽시간에 전 성을 들끓게 하였고 이는 길림성내 민영기업이 대형국유기업을 재조합하는 선례를 개척하였다. 이 대담한 혁신의 주인공이 바로 길림성금두그룹의 김명남리사장이다. 등록자본이 2만원인 규모가 작...
  • 2007-02-15
  • 김광범, 남, 조선족, 1947년 5월 출생, 단과대학 학력, 현재 흑룡강성 목단강시민족종교사무국 국장. 1994년부터 지금까지 여러차례 공을 세워 목단강시정부의 표창을 받았으며 시직속기관 당위로부터 여러차례 당작풍 렴정건설 선진개인으로 당선되였다. 그가 국장으로 부임한 이후 목단강시민족종교사무국은 국무원으...
  • 2007-02-12
  • 《장4B》 총설계사, 총지휘로서의 리상영, 7년 여에 10차례에 걸쳐 10종의 인공위성 16매를    전부 예정궤도에 정확히 발사, 《10발 10중》의 기적을 창조하다 《하량하리기금상》 수상자 《며칠전 또 한방이라,그러니까 이번이 10발10중 맞지요?》 2006년 11월 15일 북경 인민 대회당에서 거행된 《...
  • 2007-02-11
  • CCTV중국올림픽키잡이 선발에 나서 동부지역 80강까지 올랐으며 전국 '녀자투표인기왕'으로 이름을 날렸던 산동지역대표선수 조충(赵翀)이 조선족이였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비록 32강진출에서 아쉽게도 탈락되였지만 그녀가 받았던 폭발적인 인기는 조선족들의 이미지향상에 큰 힘을 하였다. 초기의 인터넷투표...
  • 2007-02-07
  • 비용까지 대주고 한국로무 보냈다오. 돈 떼울 일이 절대 없답니다. ㅡㅡ 치렬한 경쟁과 유혹적인 리윤으로 많이 변질이 된 해외로무송출시장에서 이런 평을 듣기란 쉽지 않다. 해외로무지원자들의 일 전한푼이 어렵게 모은 돈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어요. 때문에 우리는 매개 고객에 대하여 절대적으로 책임지는 각도에서&nbs...
  • 2007-02-01
  • 조선족학자 임범송교수를 만나다 작년 12월 26일,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43만자나 되는 조선문대형도서《심미비평론》을 출판하였다. 이 책의 출판으로 하여 저자 임범송교수는 흥분된 자신을 걷잡기 어려워했다. 그럴만도 하다. 70세 고령인 임범송교수는 자식들이 유럽려행을 다녀오시라는 권고도 마다하고 《인생의 마지...
  • 2007-01-31
  • 1원짜리 인민페에 등장하는 소수민족 여성의 실제 주인공이 28년여만에 나타났다.지난 20전짜리 모델인 조선족 처녀에 이어 이번에는 동족처녀였다.이 인민페에 등장했던 동족 소녀는 지금은 45살의 중년 여성이 됐지만 최근에야 자신이 지페 모델이었음을 알게 됐다.귀주(貴州)성 총장(從江)현의 한 동족 부락에 사는 스나...
  • 2007-01-28
  •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반 없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하자 김철남은 중경에서 해방을 맞는다. 당시 조선 국내의 정치상황이 불안했 탓으로 그는 중국에 머물러 사태를 관찰했다. 그래서 중국에 눌러 앉은 그는 1952년 페암으로 인하여 북경에서 세상을 떴다. 지금 북경에 건재하고 있는 이서군 녀사는 조선족...
  • 2007-01-28
  • 색 바래지 아니 할 '영원한 화신'       실로 빠른 것이 세월인 것 같다. 벌써 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바로 5년전의 그 여름밤, CCTV 제5채널의 2002한·일월드컵의 생방송을 보다가 까닭없이 히딩크가 이끄는 한국팀을 비하하는 해설원의 언사에 참지 못해 전화통을 들고 그 해설원 유건홍과 설전을...
  • 2007-01-28
  • 27일 청주 라마다호텔에서 사단법인 한국청년회의소(JCI) 손인석 회장(36·청주 광진건설 대표)이 취임식을 가졌다.손회장은 각 지방 JC와 중국 조선족 소학교간 자매 결연을 추진, 한민족 얼을 잊지 않도록 도와 주고 소외된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심장병을 수술해 주는 사랑의 메신저 운동도 ...
  • 2007-01-28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