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윤동주시인의 동생 윤혜원할머니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3월2일 09시00분    조회:895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나라를 잃은 유민들이 조국의 광복을 기다리면서 고단한 삶을 꾸렸던 북간도. 북간도가 낳은 '영원한 청년시인' 윤동주가 뜬금없이 시드니로 온 까닭이 도요새를 닮은 그 할머니에게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윤동주 시인 만큼이나 정갈하게 한 평생을 살아오신 할머니가 2005년부터 아프시다. 심장수술과 뇌수술을 몇 차례씩 할 정도로 많이 아프시다. 그런 할머니가 지난 2월 중순 중국 길림성 룽징(龍井)으로 떠났다. 떠나면서 "이번이 마지막 중국여행일 것 같다"고 쓸쓸하게 말했다.

윤동주 시인의 무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8회째를 맞고 있는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문학상>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10여 년 동안 윤동주 무덤의 봉분을 새로 단장하고, 남편과 함께 <윤동주문학상>을 손수 제정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턴가 할머니가 거주하는 시드니가 윤동주 연구의 중심지(?)가 된 느낌이다. 1995년에 열린 윤동주 50주기를 비롯하여, 2005년의 60주기 추모행사가 가장 큰 규모로 열린 곳도 시드니였다. 또한 윤동주에 관한 각종 소식이 전 세계로부터 시드니로 전해진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 캐나다, 독일, 러시아, 인도네시아 등에서.

윤동주 시인의 여동생 윤혜원(84. 시드니우리교회 권사)씨가 바로 그 할머니다. 윤씨는 윤동주의 형제 3남1녀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혈육이다. 일곱 살 터울이지만 바로 밑의 동생이어서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고, 오빠의 짧은 생애를 곁에서 지켜본 장본인이기도 하다.

윤혜원씨한테 지난 13년 동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를 들어왔다. 가끔은 입을 꼭 다문 대학생, 흑백사진 속의 윤동주가 끼어들어 자기가 쓴 시를 읽어주기도 했다. 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날이었다.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날.

지난 2월 16일은 그가 일본 후쿠오카 감옥의 차디찬 마룻바닥에서 뜻 모를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옥사한 62주기였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했던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간 윤동주, 그가 '영원한 청년시인'으로 다시 태어난 날이기도 했다.

▲ 경향신문에 발표된 <쉽게 쓰여진 시>.
2월 16일 밤, 시드니에 거주하는 몇몇 한인동포 문인들이 스트라스필드의 한 카페에 모여서 윤동주를 추모하면서 그의 시를 낭송했다. 낭송된 시 중에는 그의 마지막 작품 '쉽게 쓰여진 시'도 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시를 낭송하다보니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구절이 목에 걸렸다. 시대를 뛰어넘는 고뇌이기 때문이다. 카페의 뜰로 나가서 지구남반부의 별들이 총총하게 박혀있는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다시 한 번 그가 살았던 시대의 고뇌를 되뇌어보았다.

60여 년 전, 그 당시의 민족적 절망과 뿌리 뽑힌 조선백성의 고단한 삶이 흑백영화 장면들처럼 스쳤다. 장장 13년 동안 들어왔던 얘기들이 영화장면처럼 되살아난 것. 그럼, 지금부터 60여년의 시공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증언해준 윤혜원씨를 소개한다. 

철들지 않는 84세의 '윤少女'



"마음에 티끌 하나 없는 만년 소녀다." 윤혜원(84)씨를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다. 하물며 60년 넘게 함께 살아온 남편 오형범(84. 시드니우리교회 장로)씨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도무지 철들지 않는 사람"이라고.

윤혜원씨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항상 똑 같은 말로 자신을 소개한다. "윤동주 시인 동생이고요, 나이는 열여덟 살!"하면서 소녀처럼 해맑은 웃음을 웃는다.

그래서 "나이 드는 게 싫으시냐?"고 물어보면 "동주 오빠가 나이 먹는 걸 스톱 했으니까 나도 덩달아서 중단시켜버린 거야. 동생이 오빠보다 더 늙으면 안 되잖아. 난 늙으면 안돼!"

기자는 같은 파평 윤씨라는 이유로 윤혜원씨 가족들과 가까운 친척처럼 지낸다. 윤씨의 80세 생일날, 기자는 '윤소녀(尹少女)'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윤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좋아했다. "별명 값으로 한 턱 내겠다"며 북간도식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거의 소금수준인 짜디짠 달걀찜(뒷맛이 아주 고소하다)과 국물이 거의 없는 된장찌개, 하얀 무김치와 옥수수 등이 식탁에 올랐다. "음식이 짜다"고 했더니, "일제 강점기의 북간도 음식이니 그냥 참고 먹어 달라"면서 "우린 평생 이렇게 먹었다"고 말했다.

부엌 쪽으로 식탁이 놓여있는 거실의 벽에는 윤동주 관련 사진들이 걸려있다. 그 유명한 학사모 사진 주변에는 해마다 중국 연길에서 열리는 중국조선족중학생 <윤동주 문학상> 행사사진이 여러 장 걸려있다.

지난 2005년 12월 박철 시인이 한국에서 방문했을 때, 그에게 고구마와 옥수수를 삶아주면서 "마치 오빠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면서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오누이처럼 도란거렸다. 박철 시인의 '고요한 분위기'가 오빠의 생전모습으로 오버랩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항상 윤동주 분위기에 묻혀서 지내는 탓인지, 윤혜원씨는 오빠에 대해서 얘기할 때 마치 오빠 옆에 앉아서 얘기하듯 한다. "항상 골똘히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어, 그러다가 나를 만나면 장난을 걸어오고... 그러니 나한테는 그냥 오빠이지 뭐!" 이런 식이다.

13년 동안 진행된 인터뷰

윤혜원씨와의 인터뷰는 주로 윤씨가 윤동주 관련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 한국이나 중국, 일본을 다녀온 다음이나 윤동주에 관한 새로운 뉴스가 전해졌을 때 이루어졌다. 만나는 장소는 대부분 윤씨의 집이나 윤씨가 출석하는 교회, 그리고 호주한인동포 문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철마다 한두 차례 만났으니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는 거의 다 들은 셈이다. 그래서일까? 윤씨는 이야기가 무르익을 때쯤이면 "우리 윤동주 얘기 그만하자!"면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대개는 가슴 아픈 대목으로 넘어가면서.

사실 윤동주 스토리는 여러 권의 <윤동주 평전>과 관련기사 등으로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하여, 오늘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내용들, 그중에서도 답변하기 껄끄러운 내용 중심으로 13년 동안 이어져온 인터뷰를 1문1답 형식으로 재구성 해본다. 인터뷰엔 꼭 남편 오형범씨가 동석했다. 그의 답변도 함께 담았다.

▲ 작년 연변에서 열린 제7회 윤동주문학상 시상식 장면.
- 부질없는 질문이지만 지금까지 오빠가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그 모습 그대로일 것 같아요. 동주오빠는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늘 무슨 생각인가에 골똘히 빠져있고 밤새워 책을 읽고 뭔가를 대학노트에 쓰던 사람이었으니 삶의 모습이 바뀐들 얼마나 바뀌었겠어요. 다만 교사나 목사가 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시를 쓰는 조용한 모습의 교사나 목사말예요. 단짝이었던 문익환 목사님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한국의 한 시인단체가 매년 실시하는 설문조사에서 20년 가까이 윤동주 시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서시(序詩)'가 가장 애송되는 시로 선정됐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다싶지만, 한동안은 잘 믿기지 않았고 혼란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나에겐 그때나 지금이나 오빠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빠의 고결한 성품이나, 한 인간의 결연한 의지가 읽히는 <서시>는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 일부에서는 윤동주 시인의 시가 과대평가 됐다고 하는 의견도 있는데.
(윤혜원) "나는 문학의 문외한이라서 잘 모르지만 그런 평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좋게 평가하면 그게 어디 문학작품인가요? 종교의 경전쯤 되겠지요. 또한 너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오형범) "그렇습니다. 윤동주 시인이 이 세상에 머문 기간은 정확하게 27년 2개월입니다. 1943년 7월14일,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옥사한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까지 전해오는 시 중에서 마지막 작품이 '쉽게 쓰여진 시'인데 그 시를 1942년 6월 3일에 썼습니다. 정확하게 25살 때였습니다. 지금 전해지는 시가 모두 25살 이전에 쓴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대평가 운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끔 동주오빠가 미워져요"

- 민족시인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뚜렷한 항일활동의 흔적이 없는데.
(윤혜원)"당시의 북간도는 항일운동의 기운이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난 어리고 여자라서(?) 잘 몰랐지만 일제의 탄압이 극심했던 1940년 이후엔 항일운동의 중심지가 됐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습니다. 오빠라고 해서 뭐가 달랐겠습니까. 나는 지금도 오빠의 꼭 다문 입술과 고뇌에 찬 표정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다만 오빠가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소극적인 성격이라서 그랬을 겁니다."

(오형범)"적극적인 항일활동은 아니었지만 삼엄한 분위기의 일본에서 계속해서 모국어로 시를 썼다는 것은 윤동주 항일정신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는 대목 아닐까요? 특히 적극적인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고종사촌 송몽규와는 운명적인 삶을 공유했기 때문에(동갑내기로 같은 집에서 태어나고 같은 감옥에서 사망함) 항일에 대한 많은 교감이 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는 27년 2개월의 짧은 생애 중에서 마지막 2년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옥사한 사람입니다."

-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가 모두 시인인데 왜 시를 쓰지 않는지요?
"그게 참 속상해요. 남자들은 다 똑똑하고 잘 생겼는데, 왜 나만 시도 못 쓰고 못난이로 태어났는지.(웃음) 그런데 동주오빠가 나에게 아동 문학지를 읽게 하고 동화를 들려준 것은 나의 글쓰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 재작년 연길의 동포학생들이 연 윤동주 시인 60주기 행사.
- 그동안 1942년 1월 24일에 쓴 '참회록'이 윤동주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졌다가 1942년 6월 3일 쓴 '쉽게 쓰여진 시'가 마지막 작품으로 정정됐는데.
(윤혜원)"'쉽게 쓰여진 시'가 오빠의 마지막 작품이라기보다는 현재까지 전해지는 마지막 작품이라는 말이 더 정확합니다. 오빠는 그 시를 쓴 후에 바로 체포되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할 때까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습니다. 비록 감옥이지만 오빠가 2년 동안 시를 쓰지 않았을 리 만무입니다."

(오형범)"우리 부부가 1947년에 남쪽으로 내려오던중 청진에 머물다가 윤동주의 일본유학생 친구들인 박춘애와 김윤립을 만났는데, 그들이 윤동주가 후쿠오카감옥에서 시 한 편을 적어 보낸 엽서를 갖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해방공간의 혼란이라서 다시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 시를 전해 받았다면 그게 마지막 작품이 됐을 텐데."

- 오빠가 가끔 미워진다고 말씀하셨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해준 것도 없이 나를 평생 귀찮게 하니까 그렇지~.(웃음) 어쩔 수 없었지만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미워요. 눈치껏 일본경찰을 피해서 좀 더 일찍 고향으로 돌아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시를 썼겠습니까."

- 오빠의 팬들에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오빠도 자신의 시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감히 한 말씀 드린다면, 오빠의 시를 읽으면서 문학의 향기에 젖어보기도 하고, 너나없이 고단한 삶을 위로받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오빠의 동시를 많이 사랑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에서 마상체조 선수로 활약하는 구연수(13) 군이 오는 8월 독일 아헨 햄에서 세계 20개국 80여 명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리는 국제승마대회에 태극 마크를 달고 출전한다. 22일 동포신문 겨레일보에 따르면 러시아 연방 마상체조단에서 선수로 활약하는 구 군은 지난 13-14일 체코의 브르...
  • 2006-05-23
  • [원제:동포인터뷰-산업포장 수상한 싱가폴 한인사업가 김광수 사장 ] 김광수 사장 포함 전세계 해외 한인기업인 중 2명 산업포장 수상 산업포장을 수상하는 김광수 (주)우삼 대표이사 싱가포르의 교민 기업가로서 지난 3월 15일 본국의 ‘제33회 상공의 날 기념식’에서 산업포장을 수상한 ‘주식회사 우삼(Woo Sam Pte Ltd...
  • 2006-05-23
  • 한국드라마 “대장금”은 한국문화산품의 출국전범임에 틀림없다. 그 작품은 중국 량안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션세이숀을 일으켰고 한국에서도 시청률최고를 기록하였다. 일전 서울의 대표적 건축물의 하나인 “63빌딩”지하 커피청에서 “대장금”의 감독 이병훈씨는 화구보기자의 인터뷰를 접수하고 한국 드라마가 출국열...
  • 2006-05-22
  • 연변가무단 연극배우 리옥회 최우수인기배우대상 연변조선족구연단 텔렌트 가수 장미옥 최우수배우대상 지난 3월17일 서울 세종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제5회 국제문화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연변가무단의 1급배우 리옥희씨가 최우수인기배우대상으로, 연길시조선족구연단의 텔렌트이자 가수인 장미옥씨가 최우수 배우대상으로...
  • 2006-05-22
  • ——— 백은석농민의 창업이야기 우리 주변에는 거듭되는 실패앞에서도 운명을 탓하지 않고 희망을 안고 굳건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해림시 해남조선족향 중흥촌의 백은석(37세)씨가 바로 이런 사람들가운데 한명이다. 백은석씨의 지나간 20년은 성공보다 실패가 더 많이 동반된 인생행로였다. 20...
  • 2006-05-19
  • 5세 러시아동포 미하일 박을 만나러 파리몽마르트언덕에 위치해 있는 물랭호텔에 찾아가니 물랭지기 신근수 사장(전 서울신문기자)이 호탕하게 웃으며 맞아주었다. 그의 주선으로 오늘 만나게 되는 5세 러시아동포 미하일 박은 물랭호텔 갤러리에서 그림작품전시회를 하게 되어 있었다. 신근수 사장의 소개로 만난 미하일 ...
  • 2006-05-19
  • 네살짜리 한인 소녀가 바이올린 연주에 천재성을 보여 화제다. 미국 주요 언론에서도 잇따라 보도하고 있는 화제의 주인공은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사는 최우희(42.미해군연구소 연구원)씨와 피아니스트 정영은(40)씨의 딸 유경(미국명 엘리 최)양. 3살때인 지난해 7월 바이올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유경양은 1년...
  • 2006-05-19
  • [원제: 연변인민 김봉호를 잊지 않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의 작곡가 김봉호 귀향해 연변땅을 두루 돌아보다 우리 맘속의 붉은 태양 조국변강 비춰주니 장백천리 해란강반에 붉은기발 물결치네 ... 연변인민 한맘으로 모주석을 노래하네 1965년에 창작되고 60, 70년대 중국대지에 울려퍼졌던 노래 《연변인민 모...
  • 2006-05-19
  • [원제:在亞동포 간질치료약 연구로 박사학위 받아] 아르헨티나 국립 라 플라타대학 약학과 연구팀장인 문성진(39)씨가 간질병과 관련한 기존의 약을 보강, 적은 양을 투여해도 부작용을 줄이고 효과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10년 이상 연구한 결과를 미국과 유럽에 국제 특허 신청을 냈다. 박...
  • 2006-05-19
  • [원제:국무원 중앙군위 김춘명에게 '뢰봉식소방전사'영예칭호 수여] 공안부: 최근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는 료녕성공안소방총대 본계시지대 명산구대대 특별근무(特勤)중대1반 김춘명 반장에게 '뢰봉식소방전사'명예칭호를 수여했다. 김춘명(남,1977년생, 조선족)은 흑룡강성 상지 사람이며 당원이다. 그는 1995년 12월에...
  • 2006-05-1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