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 녕안출신으로 한국간지 12년 되는 57세의 박춘근씨...껑충한 키꼴과 긴 얼굴이 인상적이고 악수하는 큰 손아귀도 힘이 넘친다.
이국타향에서 그렇게 정열과 노력과 도전과 꿈을 가지고 사는 이 조선족 사나이를 취재하면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수가 없었다.
조선족 로동자가 편집한 《외래어사전》
초중도 채 졸업하지 못한 한 중국 조선족로동자가 편집한 사전이 한국기관에 선정, 인쇄되여 이미 2만부 이상 배포되였다.
박춘근씨가 외래어사전을 편집한것은 《그냥 답답해서 시작한 일》이다. 그는 한국가서 취직해 일을 하면서 주위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제일 어려운것이 언어소통》이라는 하소연을 귀아프게 들었다.
《잘못한 일이 없으면서도 말을 알아듣지 못해 현장에서 쩍하면 욕사발을 먹는 조선족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는 그는 그냥 자기도 익히고 주위 사람들도 간단히 보게 하려고 소책자를 만들었다. 사전을 사서 자주 보고 매일 일하는 현장과 생활에서 상용어들을 기록했다.
그렇게 7, 8년 기록한것을 모아보니 그냥 처박아두기가 아까웠다. 복사해서 책자처럼 묶어 친구와 주위 사람들에게 주었다. 모두들 보배처럼 보관하면서 썼다. 소문이 나면서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마침 한국에서 불법체류자 자진귀국 제도로 많은 조선족들이 재입국을 하게 되면서 한국로동재단에서 입국교육용 교재로 《상용외래어사전》을 만들어야 했다. 소문을 듣고 박춘근씨가 편찬한 책자를 본 로동재단에서는 인차 맘에 들어 출판했다. 2만부 출판한 이 책은 재한 조선족들에게 널리 배포되였으며 또 중국에 다니는 한국인들까지 이 사전을 소지하고 다닌다고 한다.
한국인을 거느린 공장장이 되다
문혁때문에 초중도 못나온 박춘근씨는 《제일 큰 한이 못 배운것》이란다. 학교때 재간둥이로 소문난 그는 끝없는 독학과 탐구욕으로 벽돌공장의 기와기계 생산선을 발명해 목단강시에서 제일 이름난 향진기업 기술자로 발탁되기도 하면서 토배기 발명가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 그의 꿈은 《내 자체로 모든것을 설계한 태양에너지 층집 한채 짓자》는 것. 그래서 《한국 가서 2, 3년 벌어 집 지을 자금 마련하겠다》고 한국으로 떠난것이 1995년이다.
한국의 로동현장에서도 그는 연구와 발명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이불공장 재단보조로 들어간지 석달도 안돼 기적같이 재단사로 발탁되였다.
그러다가 서울의 한 중소기업 제조업체에 들어갔다가 공장장으로 된다. 처음 이 업체에서 엘리베이트와 주차기공장 용접사로 일하다가 석달후에 《시키지 않아도 도면 다 혼자 그렸다》는 박춘근씨, 《거리에서 중고컴퓨터 하나 사서 점심시간이면 설계를 배워서 자동화 생산라인 하나를 설계했다》. 자동화 설계로 원래 두사람이 9개 만들던 작업을 한사람이 21개 만들수 있게 했는데 이 기술은 이미 특허를 신청하기까지 했다.
사장은 깜작 놀라며 관례를 깨고 박춘근씨를 설계사무실 기계제작 총지휘로 발탁, 얼마후에는 《견적 내기부터 체크 싸인까지 모두 내손 거치니까 1999년 결국 나를 공장장에 임명》했으며 수하 20여명은 전부 한국사람이였다.
중국에서 온 조선족로동자 수하에서 일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공연히 트집을 잡는 한국인 직원도 있었다. 어느날 참다못해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 한국직원을 불러세웠다. 《제 잘못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고 그래도 고치지 못하면 사장에게 반영하십시오. 왜 공연한 트집을 잡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직원들 30%가 저를 반대하면 전 당장 그만두겠습니다》 사장이 달려와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대하는 사람 손 들라고 하니 그 사람만 달랑 손을 들었다. 결국 그 한국직원과 후에 친구가 되고.
그는 《한국사람들이 까다롭다고 하지만 회사에서도 진짜 실력과 노력으로 일하면 승인을 받게 된다》고 감회다. 《조선족들은 선진국인 한국에 배우러 왔다는, 배울게 많다는 겸손한 자세와 또 자기 존엄 잊지 말고 노력하고 자기의 당당한 위치를 찾는 자세가 성공요소》라고 말한다.
지금 업체에서 오다부터 제품설계, 생산관리까지 모두 그의 손을 거치는데《현재 회사가 경기가 좋지 않아 가는 사람들도 있고 많은 돈 얹어주겠으니 나를 오라는 회사들도 많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때묻고 정든 곳 떠날수 없다》는 그의 변함없는 마음 가짐이다.
새장구 치는 재한 조선족 악단의 단장
박춘근씨가 조직한 조선족악단은 한국에서 소문나 있다.
재미있는것은 음악학교 문도 모르는 《새장구밖에 칠줄 모르는 단장》이지만 단원들은 모두 중국에서 전문 음악학교를 나온 전업출신들이다. 그러나 그의 지휘를 잘 듣는것은 그만큼 그의 사심없는 봉사와 넘쳐나는 열정 때문이다.
어느날 박춘근씨는 《조선족 행사들도 많은데 한국의 악대는 청하자면 돈도 많이 들지만 또 가락이 우리 정서에도 맞지 않는다》며 악대 하나를 꾸리자고 제의했다. 악기는 중국에서 사면 싸기에 한국에 오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다들 자비로 마련하고 손풍금은 다들 돈을 얼마간씩 모아 한국에서 마련했다.
조선족 행사나 단체관광이 있을 때면 사람들은 악대를 찾았다. 그러면 한국 각지에 널려있는 단원들이 시간을 맞추어 올라와 무보수 봉사를 했다. 《민요도 우리 정서에 맞게 연주하고 문화혁명때 노래, 연변노래 등 중국맛이 나는 곡을 연주하면 고향의 가락을 듣고 다들 그렇게 좋아하고 기뻐했다》고 한다.
소문이 나면서 한국의 일부 행사들에서도 이 악대를 청해 초청공연을 했다. 한국에서 들을수 없는 독특한 가락의 맛때문이다. 노래 《북경아가씨》를 작사한 한국작가는 특별히 악대를 찾아서 반전업악대를 운영할것을 제의했다. 그는 《하긴 지방에 있는 악단의 단원들을 서울에 취직시켜 악단운영의 활성화도 계획하고있다》고 소개했다.
박춘근씨는 《우리 악단에 원칙 하나 있는데 로인축수나 조선족행사는 어디든지 달려가지만 돈을 준다고 아무데나 가서 정치목적이 있거나 하는 행사에 참가하는 어리광대는 절대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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