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일월석(日月石)의 인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9월26일 13시42분    조회:1047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장편전기 《중한 우호의 전기인물 한성호》 서언(발취)

○ 남영전

중한수교의 대업을 위해 로태우대통령의 밀사로 혁혁한 공훈을 세운 화교 한성호박사. 그는 소설이나 신화에서 나오는 인물보다 더 전기적이고 더 신화적인 인물이다.

오곡을 먹고 사는 한 보통사람이 어쩌면 《기인, 기재, 기지, 기적(奇人, 奇才, 奇志, 奇績)》이라 불릴가. 나는 2006년 3월, 한성호박사를 알게 된 다음부터 줄곧 그에 대해 경탄에 경탄을 거듭했다.

한성호박사의 일생은 너무나 곡절적이고 너무나 파란만장하다. 그는 기적적인 인생을 살아온 분이다. 생과 사는 늘쌍 그의 삶에 뒤엉켜 수시로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겨야 했다. 중국의 고전문학 《서유기》의 당승이 불경을 구하러 가는 길에 구구팔십일의 생사의 재난을 겪듯이 한성호박사의 인생길에도 생사의 재난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언제나 자신이 쌓은 공덕이 그를 구한다. 귀인이 나타나 그를 돕는다. 하늘이 굽어보고 그를 돕는다. 그는 어떠한 역경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는 불사조이다.

한성호박사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분이다. 그의 기억력은 비상하다. 한번 들은 말은 잊지 않고 한번 펼쳐본 책은 머리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는 소년시기부터 고금중외의 수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였고 《주역》, 《하락수》를 통달하였다. 30세를 갓 넘어서는 한 화교소학교 교장직의 바쁜 와중에도 3개월만에 그 두터운 《본초강목》을 약처방 하나 빠뜨리지 않고 줄줄 외워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박정희대통령시대이던 45세때부터 청와대를 드나드는 《어의》가 되였고 2년동안 120만자로 된 5권의 《식품비방》을 펴내여 전 한국을 들썽했다. 그는 해박한 지식과 참된 인생관을 두 날개로 만리창공을 나는 매가 되여 그 예리한 혜안으로 세상만사를 굽어보고 자신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자유혼이다.

한성호박사는 언제나 어디서나 바른말을 하고 불의와 사악에 타협을 모르는 초인간적인 투사이다. 그의 인생신조는 효이다. 효에 대해 그는 세가지 준칙이 있다―부모에 대한 효는 소효요, 민족에 대한 효는 중효요, 인류에 대한 효는 대효다. 때문에 조상을 팔아먹는 불효, 민족을 분렬시키는 불효, 인류에 피해를 주는 불효에 대해서는 범과 같이 무섭게 증오하고 사자마냥 포효한다. 이때문에 항상 불의의 비방을 당하고 사악의 음모와 피해를 면치 못하지만 그는 바다같은 흉금으로 태연하기만 하다. 모든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광풍이 오려면 오라 하고 소나기가 퍼부으려면 퍼부어라 한다. 태산에 우뚝 솟은 소나무는 끄떡하지 않는다. 오직 숨이 붙어있는 한, 오직 필을 놀릴수 있는 한, 정의를 위해 누가 뭐라 해도 그는 황소마냥 끈질기게 어제도 오늘도 자기가 갈길을 가고있다.

한성호박사의 자비심(慈悲心)은 보통사람들은 리해하기 힘들 정도이다. 선천적으로 마음이 선한 그는 자신이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들을 생각하여 남에게 베푸는것을 그의 도리와 인생의 락으로 여긴다. 그도 배고픔과 인생의 어려움을 겪어봤기 때문에 거리에 떠돌아 다니는 고아들이 불쌍히 여겨져 여러차례 기부금을 내였고 많을 때는 열몇명 고아의 생활비용을 전담하였다. 돈이 없어 병치료를 못하는 환자를 보면 무료로 병을 봐주고 약까지 공급해준다. 심성이 옳바르지 못한 몇몇 인간들이 그에게 무례하게 사기를 친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한번은 한 화교가 그더러 경제담보를 해달라는 청탁이 있어 그가 선뜻 대답을 했었다. 경제담보수속이 끝나 며칠이 안되여 그 사람은 회사파산(부도)을 선포했다. 한성호박사는 한화 2억 4000만원이라는 거액의 빚을 안게 되여 하마트면 가산을 탕진할번 했었다. 친구들은 그에게 이 다음엔 속심을 차리라고 권고를 했지만 그는 이런 말을 한다. 《그들이 찾아온걸 보면 가련한데 어찌 내 모른다 하겠는가? 사람이 돈만을 위해 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네.》 그는 심지어 자기에게 경제피해를 가져다 준 사람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또 그를 도와준적도 있다.

한성호박사는 인류애의 흉금이 바다같이 넓은 분이다. 한국의 국화인 무궁화에 대한 그의 사랑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20세기 60년대 초반부터 한성호박사는 수석을 채집하기 위해 한국의 명산대천을 돌면서 종종 가슴아픈 일을 목격했다. 그토록 아름다운 무궁화가 소우리나 돼지우리 옆에 아무렇게나 피고있었고 혹간 눈에 띄는 무궁화는 길옆에 홀로 서 있어 처량하였다. 공원을 가도 무궁화 화원은 찾아볼수 없었고 사람들의 손길이 안 닿는 곳에 한두그루 보이는것이 그 당시 한국의 실상이였다. 36년간 일제의 강점을 당했고 숨돌릴 사이 없이 또 조선전쟁을 겪고난 한국국민들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까지도 아직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허리를 꿋꿋이 펴지 못했었다. 한 나라의 국기, 국가, 국화는 그 나라의 상징이다. 한 국민이 어찌 자기 나라의 국화를 랭대할수 있으랴. 자신은 피하지 못할 사정으로 한국에 건너와 이미 10여년을 산 사람이다. 이 나라의 물을 마시고 이 땅에서 나오는 오곡을 먹으며 이곳 사람들과 친구로 사귀여 한국은 그의 두번째 고향이 되였다. 그래서 그는 한국국민들에게 무궁화를 사랑하자고 호소하고싶었다. 그는 한차례 또 한차례 진정어린 글을 신문사에 보냈지만 어느 신문사도 그의 글을 채납하지 않았다. 그는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냈다. 매일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나가는 자기 한의원의 비닐 약가방에는 원래 인삼과 록용의 도안이 찍혀 있었는데 이 도안을 한송이 아름다운 무궁화로 바꾸었고 《우리 나라 꽃 사랑합시다》란 열글자를 큼직하게 새겨넣었다. 그 당시 한국에는 비닐에 칼라인쇄를 하지 못했기에 그는 향항에서 이 약가방을 인쇄해 왔었다. 그때가 바로 1962년, 장장 45년동안 한성호박사의 한의원에서 나간 무궁화 약가방은 100만개가 넘는다. 서울에서 한국 각지로 피여난 이 백만개의 무궁화, 한국인에게 감동을 주는데 충분했고 또한 한국인의 부끄러움을 자아내는데 충분했다. 그래서 후에는 한국 문화인들의 무궁화를 사랑하자는 글들이 간행물에 발표되였고 《무궁화사랑》단체도 나오게 되였다.

한성호박사는 자연과 호흡을 같이 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분이다. 그는 술을 입에 대지 않고 도박장에 가지 않으며 노래방과 무도장을 외면하고 골프를 치지 않는다. 그의 애호라면 오로지 대자연과의 교류를 즐기고 수석을 사랑하는것이다. 그는 대자연의 천태만상과 수석의 신비로움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만고창상을 겪어오면서도 의연히 굳세고 부서질망정 꺾이지 않는 돌의 품격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는 오랜 세월 일요일마다 좋은 강과 바다가를 찾아다니면서 수석을 수집해왔다. 그의 집과 그의 한의원은 온통 기묘한 수석의 천지로 되여 그는 늘쌍 세상의 정기를 한품에 안고 산다.

한성호박사는 기묘한 일월석(日月石)과 인생을 같이 하는 분이다. 1960년 늦가을, 어느 한 해변가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그를 기다린 이 한쌍의 일월석은 그와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생명의 동반자이다. 호두만한 크기에 유난히 반질반질한 이 한쌍의 일월석, 하나는 해의 도안, 다른 하나는 달의 도안이 생생해 볼수록 신기한 돌이다. 일월석을 한손으로 리듬에 맞추어 돌돌 굴리면 특유의 소리가 난다. 한성호박사는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쌍 일월석을 만지며 그와 대화를 한다. 마음이 편치 않을 때마다 일월석과 대화를 나누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정신이 맑아진다. 그래서 일월석은 한시도 그의 곁을 떠난적이 없다.

누군가 한성호박사는 유가의 《내성외왕》의 풍모, 도가의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심태, 불가의 《반약바라밀》의 지혜를 겸비한 분이라고 이야기한적이 있다. 참으로 지당한 말이다.

금년에 81세의 고령인 한성호박사, 해와 달의 정기를 지닌 한성호박사, 세월의 만고창상을 이겨온 한성호박사, 박애의 넓은 흉금으로 인류의 진보를 위해 심신을 다하는 한성호박사, 흑과 백이 전도되여 때때로 고독감을 느끼는 한성호박사, 보통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리해하기 힘든 한성호박사, 만약 이 세상에 살아있는 성인이 있고 살아있는 신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한성호박사와 다를가 하는 질문을 나는 나 자신에게 자주 던져본다.

한성호박사의 드넓은 흉금과 심오한 심령세계에 접근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로작가 김수영선생이 심혈을 다하여 펴낸 이 한권의 책은 우리 말 독자들이 한성호박사에게 다가갈수 있는 한갈래의 길을 열어놓았다. 우리들의 행운이 아닐수 없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고 둔재인 이 후학의 졸필이 한성호박사의 위상에 손상이 가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금년 8월 24일은 중한수교 15주년 기념일이다. 올해는 또 중한교류의 해이다. 중한수교를 위하여 수고가 많으셨고 중국의 번영창성을 위하여 지금도 심혈을 아끼지 않으시는 한성호박사께 머리숙여 경례드리며 그의 건강장수를 빈다.

이 책의 출판을 위해 길림성로동사회보장청 부청장이며 《길림신문》, 《장백산》발전연구회 회장인 신봉철선생의 지지와 성원이 컸다. 그리고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여러분의 수고가 많았다. 고마운 분들께 감사드린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심양시영결쿠크도구경영판매부 전복녀경리의 창업이야기 1990년대초기 많은 사람들이 한국에 나가기 위해 갈팡질팡할 때 심양시 황고구 명렴지역의 전복녀(56)씨는 남편과 함께 15평방메터의 영결쿠크도구생산공장을 꾸리고 부지런히 기업을 키워 지금은 여러개의 경영판매부를 가진 경리로 활약하고있다. 영결쿠크도구공장...
  • 2008-04-08
  • 두 발과 오른손까지 잃은 1급장애인 조화녀의 창업담 왕청현 시가지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고있는 조화녀성은 두 발과 오른손을 잃고 왼손밖에 없는 1급장애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생활에 대한 더없는 열애와 용기, 완강한 의지력과 끈질긴 노력으로 장애자라는 담벽을 뛰여넘고 대학공부까지 마쳤으며 또한 간거한 창업을 ...
  • 2008-04-03
  • 2008년 북경올림픽 성화환영식 및 성화봉송가동식에 이어 우리 나라 31개 성 자치구, 직할시의 113개 도시가 성화봉송행사로 들끓고있는 가운데 연길시지체장애인 협회 회장 정영철﹙49살﹚씨도 우리 주 성화봉송행렬에 참가할 영광스러운 사명을 짊어지게 됐다.어려서 소아마비후유증으로 지체장애자가 된 정...
  • 2008-04-03
  • 룡정시 덕신향 숭민촌 제6촌민소조의 리산옥(48세)녀성은 1998년에 남편과 함께  향공급판매합작사에서 정리실업당하였다. 밭 한뙈기 없이 도시에서 공부하는 딸애와 중학교를 다니는 아들애의 공부 뒤바라지한다는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준엄한 시련이 아닐수 없었다.  손에 쥔 돈도 없는 그녀는 한동...
  • 2008-03-31
  • 【서울=뉴시스】 " 어렸을 적 꿈은 병아리 감별사, 바퀴벌레가 무섭다... " 지난 2월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를 마친 후 '인민 루니', '인간 불도저' 등의 별명으로 한국 축구계를 들썩이게 했던 정대세(24,가와사키 프론탈레)가 솔직담백한 자신의 일상을 공개했다. 정대세의 소속팀인 일본 J-리그 가와사키 프론...
  • 2008-03-29
  •    훈춘시 화원세통경제무역유한회사 총경리 고련숙은 우리 주 대 로씨야무역분야에 녀 강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2003년, 고련숙녀성은 다니던 무역회사가 불경기에 처해 정리실업 할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남들이 현실을 비관할 때 고련숙녀성은 직접 무역회사를 차려보려고 마음을 먹고 대...
  • 2008-03-28
  • ——— 아성직업교육중심 차미자부교장 사업실적 할빈시 아성직업교육중심에는 '벽돌공장'교정을 '화원식'교정으로, 학생을 '못생긴 오리에서 '고니'로 변신하게한 공신이 있다. 그 주인공이 바로 아성직업교육중심(한족학교) 200여명 교원 가운데 '우뚝' 선 조선족 부교장 차미자씨(46세) 이다. 그가 학교건...
  • 2008-03-25
  • "형님, 제 스윙 좀 봐주십시요"사상 처음 한국프로골프 코리안투어와 중국프로골프 오메가차이나투어가 공동으로 치르는 KEB인비테이셔널골프대회 2라운드가 열리고 있는 21일 중국 상하이 실포트골프장 연습장에서 투박한 북쪽 사투리를 쓰는 한 청년이 눈에 띄였다.중국 지린성에서 태어나 자란 조선족 청년 최...
  • 2008-03-23
  • “중국에 사는 소수민족으로서 우리 민족은 중국어도 잘해야 하지만 조선어도 잘 지켜나가야 한다.” 일전 기자는 200명의 방대한 “량회”문건 번역팀을 주야 진두지휘하고있는 중국민족어문번역국(아래 번역국으로 략칭) 오수자국장(57세)을 인터뷰하였다. 1975년 중앙민족대학(전 중앙민족학원)을 졸...
  • 2008-03-21
  • 강철원씨(21)는 중국 조선족이다. 2001년에 귀화한 뒤 국내에서 대전에서 공업고를 졸업한 뒤 올 9월에 중국 10대 명문대 중 하나인 하얼빈공대에 입학할 예정이다. 강철씨(20)는 중학교때 컴퓨터 게임에 빠져 공부와 담을 쌓았지만 뒤늦게 정신 차려(?) 세계 최고의 요리사를 꿈꾼다.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전문계고에서 ...
  • 2008-03-2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