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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출신 마지막 증인 조선족 리수단할머니
조글로미디어(ZOGLO) 2007년11월1일 10시24분    조회:17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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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증인

10월 19일 오후, 할빈시조선족예술관에는 특별한 손님 한분이 찾아왔다. 백발이 성성한 80대의 운신이 어려운 할머니 한분이 한복을 차려입은채 휄체어에 앉아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민속박물관을 관람했다.

해설원은 류창한 한어로 해설을 진행했다.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한어로 대답을 하기도 하였다. 분명 그의 한어말씨에 조선어 억양이 짙게 묻어나지만 할머니는 조선말을 전혀 모른단다.

그이는 바로 현재 우리 성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위안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까지 신분을 공개한 위안부들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분이다.

"할머니, 명함을 어떻게 쓰세요?"

"일본어로 히도미라고 하네."

"본 이름은 무엇입니까?"

"모르겠네. 모두들 나를 리수단( 李寿段)이라고 부르네. 리수단이 맞는가봐."

할머니는 희미한 표정을 짓는다.

"고향은 어디십니까? 몇년도 출생이십니까?"

"모르겠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저 내 나이 86살인것밖에 몰라."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얼굴에는 망연한 기색이 력연했다.

"조선말을 조금이라도 아십니까?"

"아니, 전혀 생각나지 않네."

할머니는 머리를 저었다.

"일제때 위안부로 고생하시다가 해방후 불행한 혼인생활을 겪게 되여 마음속 상처가 컸으며 줄곧 우울증세에 시달렸다. 현재 로환까지 겹쳐 기억상실증세를 보인다."고 김씨의 양아들 고자상(한족)씨가 해석했다.

 
"내가 왜 눈물을 흘리겠소?"

현재 동녕현양로원에서 만년을 보내고 있는 리수단(한어이름 리풍운 李凤云)할머니는 3년전까지만 해도 확실한 기억력을 지녔었다.

할빈일보사 함명철기자(조선족)가 2005년에 촬영한 동영상에 따르면 리씨는 그때까지도 명석한 사유로 자신의 과거를 설명할수 있었다.

리씨는 평양 부근의 농촌에서 살았다. 그는 16세 때 결혼하여 딸 하나를 보았다. 얼마 안돼 남편은 병으로 세상을 떴고 이어 두살난 딸애도 죽었다. 의지가지 할 곳이 없어 친정으로 갔지만 그때 아버지가 첩을 얻었기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의 총애를 잃어 모녀의 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얼마 안돼 어머니가 병에 걸려 치료비가 수요됐다.

바로 이때 녀종업원을 모집하는 사람이 찾아왔다. 선불금 500원을 주며 로임도 많이 준다는 감언리설에 당시 19세밖에 안되는 리씨는 귀가 솔깃해서 따라나섰다.

"후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내가 녀종업원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자 그만 '잘못됐구나, 더러운 곳으로 속히워갔구나!'하고 통곡하였다. 그때 나는 나이 어리고 세상물정을 몰랐지만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마자 대뜸 알아차렸던것이다. 결국 선불금 500원을 받지도 못한채 어머니는 얼마 안돼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나는 19세 때 할빈 아성으로 왔다. 와보니 그곳은 일본인이 꾸리는 려관, 사실상 위안소로 전문 일본군인을 접대하는 곳이였다. 함께 끌려간 녀성은 7~8명 되였다. 그가운데 제일 어린 처녀는 13세밖에 안되는 애숭이였다. 대부분 시집도 안 간 숫처녀들인지라 순결을 지키느라 결사적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모두 얼마 안돼 다시 잡혀와 죽도록 매를 맞았다. 놈들은 "누구든 도망칠 생각 아예 말라!"고 으르렁댔다.

"놈들은 당신들을 어떻게 대하던가?"하는 질문에 할머니는 "놈들이 잘 대해줬으면 내가 이렇게 눈물을 흘리겠소?"하고 대답했다.

이어 할머니는 "하지만 내가 더 미워하는건 한간놈들이요. 그놈들이 아니면 내가 어찌 이렇게 잡혀와서 평생 고생을 했겠소?"하고 말했다.

리씨는 "21세때 나는 동녕 석문자의 위안소로 왔다. 오전에는 병사를 접대하고 오후에는 급이 낮은 군관을, 저녁에는 급이 높은 군관을 접대했는데 매일 20명씩 접대했다."고 증언했다.

"그때 하루에 밥을 두끼밖에 못 먹었다. 수수밥에 파를 소금에 찍어 먹었는데 너무 배고파서 채소를 저장하는 움에 가서 무우를 훔쳐먹었는데 들키면 죽도록 매를 맞아야 했다. 울고 싶어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가만히 울어야 했다. 주인(위안소 관리자)이 알면 큰일나기 때문이다. 울다가도 손님이 오면 눈물을 훔치고  접대해야 했다."

 "이 더러운 몸으로 어떻게..."

"일본이 패망할 당시 사변이 일어나면서 주인은 우리(위안부)들을 차에 실었다. 할빈으로 간다고 했다. 당시 혼란한 틈을 타서 40여명 조선녀인들은 태평천으로 도망갔다. 그뒤 우리 10여명은 또 대두천이라는 곳으로 가서 살았는데 나는 그곳에서 한족사람을 만나 결혼했다. 나는 자식을 낳지 못했고 남편은 늘 나를 때리고 욕했다. 나는 낮이면 생산대로 가서 일하였고 집에 돌아와서 더운 밥 한끼조차 못 얻어먹었다. 비오는 날에도 쉬지 못하고 산에 올라가 검은목이버섯을 따야 했다. 대대 간부들은 보다못해 나를 보고 리혼하라고 하였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내 주제에 이대로 살지 하는 생각에... 내 마음속 고통을 누가 알리오..."

위안부의 멍에에서 벗어났지만 그녀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방은 없었다. 분명 일본군의 폭력에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피해자지만 오히려 그런 수치심을 안고 평생을 보내야 했다.

남편은 그가 위안부출신인것이 마음에 꺼려 늘쌍 기시하고 모욕하고 때렸다. 리씨 또한 자신의 출신이 그러한지라 모든것을 참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위안부출신인 자신의 불결함에 대한 비관, 고통스러운 혼인생활... 리씨는 인생에 대한 환멸을 느꼈다... 리씨는 여러번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끈질긴 목숨이 차마 떨어지질 않았다.

80년대초(리씨가 66세 되던 해), 당지 정부에서는 그를 가정폭력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향양로원에 보냈다.

향양로원 부근에는 자그마한 강 하나가 있었다. 리씨는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마다 강변으로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강을 향해 중얼중얼 무엇이라 말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쏟았다. 한평생 마음고생을 하면서 살아온 리씨가 80대의 고령에도 여직 잔병치레 별로 없었던것은 어찌 보면 이 강의 공로가 아닌가 싶다.

몇년후 의지가지 할데 없는 리씨의 남편도 양로원에 왔다가 얼마 안돼 세상을 떠났다. 2005년 리씨는 현양로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현재 우리 성의 위안부들은 대부분 고국으로 귀환하고 리수단씨 한명만 남았다. 리씨에게도 귀환할 기회가 없는것은 아니였다.

60년대, 평양에 있는 남동생에게서 편지가 왔었다. 남동생은 누님에 대한 문안과 함께 누님을 모셔갈 의향을 표시했다. 한국의 여러 복지단체들에서 김씨를 모셔갈 의사를 표시했지만 김씨는 모두 거절했다.

"고향에 돌아가봐도 친인들은 별로 없고 엄마가 다른 남동생이 있을뿐이다. 나 또한 깨끗하지 못한 몸이라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 너무 오래동안 우리 민족과 래왕하지 않아서 조선말을 몽땅 잊어버렸기에 조선이나 한국에 가도 의사교류에 어려움이 많다. 여기 주위에서 모두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잘 대해주니까 죽을 때까지 여기 있는것이 더 편할것 같다."

 "나는 조선사람..."

"할머니가 어릴 적 살고 계시던 조선이 생각납니까?"

"모르겠네."

리씨는 머리를 저었다. 사실 리씨는 현재 모든 생활습관이 조선족과 멀어졌다. 조선말을 못할뿐더러 매운 음식도 못 드신다.

하지만 할빈시조선민족예술관에서 준비한(이는 할빈시문화국 부국장이며 전 예술관 관장인 서학동씨가 개인 돈으로 선물한것임) 한복을 차려입으면서 리씨는 그만 감격에 눈물을 비오듯 하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몇십년 만인가! 얼마만큼 오랜만에 입어보는 한복인지 그도 모른다. "해방후 처음으로 입어보는 한복이랍니다"고 동행자가 해석했다.

민속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리씨는 진렬된 민속놀이기구 같은것들을 보면서 차차 기억을 되찾았다.

그는 옛날 초가집 모형들을 보면서 "내가 어릴적 살던 집과 같다"고 말했다.

한복을 차려입은 부부가 마주앉아 밥을 먹는 모형을 보더니 "아니야, 우리 그때는 계집들이 저렇게 남자들과 한 밥상에 마주앉으면 안됐어."라고 말했다.

그는 널뛰기와 그네를 보면서 "저런것은 나도 놀아봤어"하고 대답했다. 찰떡 치는 기구며 빨래방치며 여러가지 민속기구들을 가리키면서 무엇인지 알수 있느냐고 묻는 물음에 "알구말구"하고 대답했다.

박물관에 걸려져 있는 조선글들을 김씨는 한자한자 힘겹게, 그러나 아주 정확하게 읽어내려갔다.

"우아- 대단하시네요."

일행의 찬사를 들으면서 "하지만 무슨 뜻인지는 도저히 모르겠네."하고 대답했다.

 력사에 씌여진 녀인의 한

리씨는 여직 건강상태가 좋았으나 지난해 뇌경색으로 앓고난 뒤부터 운신이 불편해졌다. 최근에 몸이 불편해 할빈시 의과대학 제2부속병원으로 와서 건강검진을 하였는데 관심병으로 진단받았다.

현재 리씨는 동녕현정부에서 보조금을 받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지원금을 보내주고 있다.

"모두들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어서 어떻게 보답했으면 좋겠수?"

리씨의 감격어린 말에 동행자들은 "할머니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앉으시면 가장 좋은 보답입니다"고 대답했다. 

현재 리씨는 기억상실증세가 심하고 운신이 불편할 뿐더러 의사표달도 어렵다. 때문에 리씨를 취재하는 과정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어온 리씨의 얼굴에 세월은 년륜처럼 깊은 주름들을 남겼다. 그에게도 꽃다운 시절이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야만적인 폭행으로  그녀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권리를 박탈당했고 혼자 심신의 상처를 어루면서 아름다운 세상과 등지고 있었다. 풍전등화처럼 가물거리는 그의 생명을 지켜보면서 피여오르는 슬픔을 금할수 없다.

리수단씨는 수치심을 이겨내고 력사적 상처를 언론에 드러낸 용감한 녀인가운데 한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용기가 있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한 수치심을 말끔하게 지우지 못한채 여직 그늘진 인생을 살아왔던것이다.

어찌 보면 리수단씨는 위안부 출신 녀성들가운데서 그래도 행운인 셈인지도 모른다. 일제부대를 수행하며 잔인하게 짓밟혔던 기타 령혼들이 떠오른다. 얼마나 많은 무고한 녀인들이 비참하게 목숨을 잃었던가!

'망각은 죄'라는 말이 있다. 우리 민족 수난사에 피로 씌여진 녀인들의 한을 잊지 말자. 력사를 거울로 삼아 피를 부르는 전쟁과 인권유린이 되풀이되는 일이 절대 없도록 노력하는것이 우리의 책임이 아닐가.

/리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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