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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길림”인물 “백성원장 유성일”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4월9일 08시54분    조회:38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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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인민법원보》 유성일사적 소개 

“백성원장”의 칭호는 정부측에서 준것이 아니고 자기절로 봉한것도 아니며 길림성의 2700만 백성들이 무기명투표방식으로 선거해 이룬것이다. 이 사람이 바로 2007년 “감동길림”10대인물의 한 사람으로 평의된 연길시인민법원 원장 유성일이다.

지난 2월 29일에 기자가 연길시법원을 찾아갔을 때 유성일은 금방 연변인민방송국의 생방송실에 갔다가 자기의 사무실에 갓 돌아왔다. 이번 생방송에서 유성일은 군중들에게 재차 자기의 전화번호를 공개하고 24시간 동안 전화를 통하게 한다고 승낙하였다.

사실 법원의 지도일군과 법관의 전화번호를 사회에 공개한것은 2년전의 일이다.

당시 연길시법원은 새로 재판청사에 입주했다. 법관과 당사인의 사적만남을 피면하고 정상적인 사무질서를 확보하기 위해 재판구역과 사무구역을 엄격히 분리하였으나 당사인이 법관을 찾는데 적지 않은 불편이 있었다. 2년전에 유성일은 두번째로 한 당사인을 접대하였는데 당사인은 이전에 제기한 문제가 의연히 철저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하였다.유성일이 왜 일찌기 말하지 않았는가고 묻자 그 당사인은 “원장님을 다시 찾자니 미안하고 그런데다 당사인이 법관사무실에 못가게 되여 법관을 만나기 힘듭니다. 사무실에 전화를 쳐서 통하면 행운이고 통하지 않으면 만날수 없습니다”라고 애탄 사정을 토로하였다. 이 말은 들은 유성일은 자책감을 느꼈다. 그후 그는 지도부회의에서  전 법원 각 재판업무실 법관과 사업일군들의 휴대폰번호, 사무실전화번호를 법원의 접대대청의 벽에 붙여 공개할것을 제기하고 또한 접대대청에 내부전화를 설치해 당사인이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법원에 찾아온 군중이 즉시에 법관들과 련계할수 있게 하였다.

손홍도는 연길시 조양가두에 거주하고있다. 2003년 7월, 그는 모 건축현장철거공사를 도맡았다. 축모에게 선불금으로 30만원의 도급비를 주었는데 피고는 공정을 그에게 도급주지 않았고 일부분 선불금만 되돌려주고는 사라져버렸다.

하는수 없는 상황에서 손홍도는 법원에 상소하였다. 2005년 5월, 연길시법원은 심리를 거쳐 피고가  손홍도에게 선불금 18만원을 되돌리고 또 손실을 배상하여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이 사건의 집행이 곤경에 처하게 되였다. 피집행인이 행방불명였는데 집행공고통지서가 내려갔지만 피집행인의 재산을 밝힐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2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2007년 8월, 손홍도는 친구에게서 피집행인이 흑룡강성 녕안시에서 건축공사를 벌리고있다는 정보를 알고 그날 오후 5시 반가량에 급기야 법원에 찾아갔다. 그때는 법원에서 이미 퇴근한후였다. 그는 급한김에 공시판에서 유성일의 전화번호를 보고 시험삼아 전화를 쳤다. 전화가 통하였는데 유성일은 사건정황을 묻고나서 10분후에 다시 련계하자고 아주 상냥한 언어로 말하였다. 10분도 안되여 손홍도는 집행법관과 법원경찰의 전화를 받았고 집행일군이 인차 당도하였다. 만나서 정황을 료해한후 집행일군과 손홍도는 그길로 흑룡강성 녕안시로 갔다. 최종 피집행인을 한 오락장소에 찾아 사건은 순조롭게 해결되였다.

사건이 몇달간 지났지만 “인민법원보” 기자가 연길에서 취재를 한다는 말을 듣고 손홍도는 주동적으로 기자를 찾아왔다. “이 도급금액은 반은 빌린것인데 기편당한후 너무도 열통이 나서 뇌막염까지 걸려 수술비로 2만여원을 써버렸습니다. 3년 동안 아무 일도 안하며 누님과 녀동생에 의거해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만약 유성일같은 백성원장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희망이 없었을겁니다”라고 매우 감격해 말하였다.

연길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정치, 경제, 문화 중심으로서 연길시법원에서는 년평균 접수하는 각 류형의 사건이 7000~8000건이 되는데 이는 전 주 기층법원 1심사건의 3분의 2에 해당되며 관련된 당사인이 2만여명에 달한다. 이전에 연길시법원에 신소사건이 비교적 많아 법원사무청사복도에 늘 신소당사인으로 꽉차있었다. 2002년 10월, 유성일이 시당위 상무위원, 정법위원회 서기로부터 법원 원장사업을 맡게 되였다. 그는 지도부의 기타 성원들과 연구결정하고 원장접대일제도를 실시, 법원지도일군마다 교대로 당직을 서면서 직접 신소하러 온 군중을 접대하기로 하였다. 8명의 지도부 성원이 한달에 평균 3일 시간을 군중을 접대하는데 보냈다. 시초에 지도일군들이 많은 사람들을 접대할것을 요구하였기에 복도에 사람들이 많았다. 현재 원장접대일에 접대하는 사람이 적어져 하루에 2~3명에 불과하다.  

기자와의 취재시 유성일은 민생문제는 곧바로 백성들의 반영이며 더우기 우리가 법원사업을 개진해야 하는 제1신호라고 말하였다.

어느날 유성일은 우연하게 외지에서 온 당사인들에게서 법원청사는 화려하지만 봉사는 형편이 없다는 의론을 들었다. 무심결에 한 말이지만 유성일은 웃으면서 어떤 면에서 봉사가 안되는가를 물었다. 그들은 자기들은 북경에서 왔는데 북경법원의 봉사용어는 아주 규범화된것으로 “안녕하십니까”, “미안합니다” 등 용어는 사업일군들의 입에서 떠나지 않지만 여기의 법관들의 말은 너무도 딱딱하다고 하였다. 유성일은 그들의 말을 머리를 끄덕이며 귀담아들었다.

사무실에 돌아온후 그는 지도부회의 소집하고 법원 법관과 기타 사업일군이 당사인들이 제기한 건의를 참답게 시달하여 문명하지 못한 언어를 쓰지 못하도록 하였다.

군중들이 법원사업에 작은 요구라도 있으면 유성일은 잊지 않고 해답을 주었다. 당사인이나 변호사들이 법원에 와 상소할 때 인터넷접속이 수요되자 유성일의 제기로 법원에서는 몇갈래의 인터넷선로를 가설해놓았다. 맹인의 불편함을 고려해서 맹인도로를 만들어놓고 동시에 화장실에 장애인의 변기도 설치해놓았다…

3월 3일 오후 4시, 기자가 연길시 건공가두 연청사회구역에 갔는데 사회구역 주임 박명자는 “어제는 일요일인데 유원장이 몇명의 법관들과 함께 사회구역에 내려와 최저생활표준가정 장충극의 분규사건을 조사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장충극은 워낙 수도전기수리공으로 가정생활이 비교적 부유했지만 2003년에 차사고로 반신불수로 되고 기억력을 상실, 게다가 안해마저 앓다나니 아이가 대학에 다니고있는데 가정생활이 극도로 곤난하였다.

연청사회구역은 유성일이 연길시당위 상무위원, 정법위원회서기로 있을 때 맺은 련계점이다. 몇년 동안 련계가 계속되고 특히는 그가 법원에 돌아온후 더욱 사회구역에 심입하였다. 장충극가정도 법률이 사회구역에 진입하는 활동가운데서 유성일을 알게 되였다. 장충극이 이전에 장사할 때 일부 련계단위에서 그에게 줄 돈을 주지 않은 일도 있었으며 기소서에 계산한 내용을 보면 못받은 빚이 8만여원이나 되였다. 그런데 지력장애가 있는데다 말까지 똑똑하지 못해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사람들은 빚을 부인하고있었다. 이 사건이 법원에 소송된후 법원에서는 소송비를 받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유성일이 직접 접대하고 사건자료를 본후 사건처리일군들이 참답게 사건을 심리하고 당사인을 도와 증거를 찾아낼것을 요구하였다. 현재 이 사건은 2만 5000여원이 법에 의해 집행되였다. 장충극의 안해와 안해동생이 기자를 보고 유원장은 거드름 피우지 않는 진짜 좋은 분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알아본데 의하면 이 사회구역에 사업일군이 20여명이 있는데 매 사람의 월로임이 근 600~700원 정도, 점심에 나가 먹을 형편이 못되고 또 집에 가기도 불편하였다. 이 정황을 알게 된후 유성일과 법원간부들이 기부금을 내여 사회구역에 음식점을 꾸리도록 하였다. 박명자는 다른 사람들은 곤난이 있으면 경찰을 찾는다고 하였는데 우리는 곤난이 있으면 유원장을 찾으며 사회구역음식점이 개업하면 제일 먼저 유원장과 법관들을 청하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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