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박춘선-연변가무단 부단장의 예술생애
조글로미디어(ZOGLO) 2008년7월9일 09시21분    조회:774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문학예술인으로의 변신을 실현하기까지
 -연변가무단 부단장 박춘선에 대한 이야기

박춘선이라는 본명보다는 주룡이라는 필명으로 더 알려진 문학예술인, 《사랑의 푸른 하늘》 등 인기가요의 가사를 써서 소문을 놓은 우수한 작사자   현재 연변가무단 업무부단장의 중임을 떠메고 실무지도,공연조직,창작평론 등으로 팽이처럼 돌아치는 그가 중학교시절에는 호케이선수였고 연변예술학교에서는 무용을 전공했다는것을 알고있는 사람들은 얼마 안될것이다.아래에 박춘선이 호케이선수로부터 무용수→문학예술인으로의 변신을 실현하기까지의 굴곡적인 인생궤적을 살펴보기로 하자!                     

             호기심으로 시작한 예술생애

꼬박 5년간 안도현체육학교에서 호케이선수로 훈련받은 박춘선이 예술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것은 안도현제4중학교에서 공부하던 1980년대초반이였다.

당시 안도현 명월진에 학생모집을 내려갔던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의 선생님들이 《라지오방송체조》를 하는 박춘선의 모습을 보고 무용배우로 양성할수 있는 새싹으로 점찍었다. 호기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연길에 가서 공부할수 있다는 우월한 조건이 너무도 마음을 끌었다. 이리하여 박춘선은 한번도 접촉해보지 못한 무용을 전공해볼 용단을 내렸다.

그러나 부모님들이며 은사님들의 만류를 귀등으로 흘려버리면서 시작한 무용공부의 길은 그렇게 순탄한것이 아니였다.우선 전업기초가 령인지라 뒤꽁무니에서 따라가기도 무척 힘들었는데 웬 영문인지 나름대로 노력을 해도 제고되는 느낌이 안겨오지 않았다. 

(이렇게 굼벵이걸음을 하고서야 무용으로 성공이나 할수 있을가?)조급증과 함께 어느 정도 회의감이 들면서 《맞갖지 않으면 언제든지 돌아오너라.》고 하시던 중학시절 선생님들의 목소리가 귀가에 쟁쟁했지만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에 돌아갈수도 없게 된 그는 며칠간 고민하던 끝에 심양으로 가는 렬차에 몸을 실었다.

원래는 그곳에서 고중에 다니면서 대학입시에 참가할 타산이였는데 알고보니 호적때문에 시험자격을 얻을수 없다는것이였다.

어쩔수 없이 학교에 되돌아온 박춘선씨를 두고 담임교원 방은숙선생님을 비롯한 은사님들은 내쫓을 대신 따뜻이 껴안아주시면서 노력도 해보지 않고 무작정 맥을 버리는것은 비겁한 표현이라고 내심하게 설복했다. 그런데 선생님들의 지도에 따라 열심히 훈련했더니 성적이 눈에 뜨이게 제고될줄이야?!

차츰 《노력만 하면 꼭 성공할수 있다》는 신심이 생겼고 전업공부는 물론 문화과공부도 너무너무 재미있었다.과외시간에도 초저녁까지는 무용훈련실에서 살다싶이 하고 야밤삼경에는 탁상등을 켜놓고 무엇이든 자꾸 적어넣는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정신나간 놈》이라고 손가락질하는 동학들도 있었다. 과도한 체력소모로 체중도 116근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는 끝내 후진생으로부터 상등생으로의 비약을 실현하였으며 1984년에는 《우수졸업증》을 따내고 연변가무단의 무용수로 배치되는 행운을 얻었다.

               창작일군으로의 탈바꿈

그럭저럭 직업무용수의 생활에 몸을 담았지만 박춘선은 어쩐지 자기가 무용배우로는 뒤를 꼴수 없다는 자비감이 들었다. 하루빨리 다른 출로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장차 변호사로 될 꿈을 안고 북경중국변호사통신학원에 입학하여 법률학공부를 시작하는 한편 도서실에 장출근하면서 문학서적들을 부지런히 탐독하기도 하고 이따금 짤막한 시나 수필들을 써서 《연변일보》,《연변문학》,《아리랑》 등에 발표하기도 했다. 

고맙게도 예술학교시절 《문학개론》 등 학과목을 가르친적있는 고 김경련(당시 연변가무단 창작실 부주임, 그후 연변문련 주석직을 담임)선생님이 박춘선의 문학재질을 인정해주면서 당시 창작실 주임인 최삼명선생님에게 전도유망한 양성대상으로 천거하였다.  최삼명선생님 또한 많지 않은 발표작들을 훑어보고나서 창작실에 받아주었다.

이렇게 가사 한편 발표하지 못하고 전문문예단체의 전직창작원으로 된 박춘선은 김경련, 김일 등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가사창작기교를 열심히 배웠고 1988년말에는 처녀작으로 가사 《고향은 언제나 내 마음에》를 창작하여 《복리컵》가요콩클 2등상을 탔다.그후 이 노래는 가수 김은희의 독창으로 텔레비죤형광막에 오르고 애창곡으로 되였다.
이로부터 자신심을 가지게 된 박춘선은 드높은 의욕으로 창작에 투입, 가사도 쓰고 시며 수필도 련속 발표하였는데 1990년 연변TV 음력설야회에서 선을 보인 《사랑의 푸른 하늘》 (박학림 작곡,김은희 노래) 등은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가요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있다.

점차 창작의 단맛을 체험하게 된 박춘선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조직한 문예리론학원반에 들어가 문학자질을 쌓아가는 동시에 가사 및 무용문학극본 창작,종목안내문 집필 등 보다 많은 일들을 했고 1994년부터는 창작평론실 주임의 중임을 떠메게 되였다.

                  재간둥이의 분주한 삶

가사, 시, 수필, 평론, 무용문학극본 창작을 능란하게 해낼수 있고 시창까지 제법 하는 박춘선은 창작임무도 벅찼지만 공부도 하고 여러가지 사회활동에도 참여하느라 한가할 사이가 없었다.

연변가무단 창작평론실의 주임으로 사업하는 10년간에만도 그는 《연변은 세계로》,《꽃피는 연변》,《술타령》,《연변찬가》 등 수많은 가사를 창작하고 《꽃신》 등 대형음악극의 문학극본과 《천년꿈》,《미아리》,《서혼》 등 여러부의 무용문학극본을 창작하여 연변가무단을 위해 수두룩한 영예를 안아왔다. 그럼에도 그는 몇년간 연변주계획생육위원회에서 꾸리는 《가정신문》 주필직을 겸임하고 읽을 멋이 있는 신문을 독자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도 문예프로제작때문에 박춘선씨를 찾을 때가 많다. 그때마다 박춘선은 언제나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고 한동안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중심의 겸직PD로 뛰면서 텔레비죤문예프로의 기획과 제작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고 여러해나 연변TV 음력설야회의 주제곡 가사를 창작해주기도 했다. 연변작가협회 리사로서의 박춘선은 한동안 연변작가협회 산하의 《5월시회》 사장직을 맡아오면서 나젊은 조선족시인들을 이끌고 민족을 위한 사업들을 펼쳐가느라 청춘의 정열을 불태우기도 했다.

그는 또 1998년부터 1년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종합대학 신문문학전업에서 조선문학을 전공하면서 론문집 《다부작장편소설 〈석개울의 새봄〉의 사상예술적특성연구》를 출간함으로써 문학준박사학위를 수여받기도 했다.

2005년에 연변가무단 업무부단장으로 승진하고 고급직함을 따낸 박춘선은 최근 몇년래 연변가무단의 중대한 예술행사들에서 총감독을 맡고 더구나 바삐 보내게 되였지만 짬시간을 리용하면서라도 계속 창작에 정진하고있다.

                    인기 《빵점》인 남편

가정생활에 대한 화제가 나오자 박춘선은 지금까지 문학을 한답시고 불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안해를 많이 고생시켰다며 미안한 심정을 내비치였다.

소개로 만나 련애하고 1989년에 결혼식을 올린 안해는 독실한 문학애호가였다. 문학에 대한 애호로 문학인을 사랑하고 문학인의 안해로 된 그녀는 남편이 사업과 창작으로 성공할것만 바라면서 가정살림, 자식교양 등 모든 짐을 자기가 떠맡았다.

결혼해서 꼬박 10년간 세집살이도 하고 숙사생활도 하면서 집없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안해는 묵묵히 고생을 감내해나갔고 남편 뒤바라지에 정성을 쏟았다.

은행에 출근하는 녀자와 결혼해서일가 박춘선은 돈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다고 한다. 문학창작에 많이 종사하다보니 원고료나 상금 등 액외수입이 생길 때가 가끔 있었지만 그는 문우들과의 우정을 돈독히 하는데 소비해버릴뿐 가정생활에 보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언젠가 문학상에 당첨되여 상금 2000원을 타게 된 그는 안해한테 자전거를 사주기로 한 약속도 까맣게 잊고 인사치레에만 열중했다. 뒤늦게야 안해와의 약속이 생각난 그는 할수 없이 친구한데서 300원을 빌려 남편의 체면을 만구했다.

《인기빵점》인 남편이지만 안해는 남편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무조건 지지해나섰고 한틀에 1000여원씩이나 하는 《세계명작》까지 서슴치 않고 사들이는 등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이에 박춘선은 안해의 지지가 무언의 채찍이 되여 본직사업과 문학창작에서 보다 많은 성과를 따낼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   *   *   *

최근에도 연변가무단이 올림픽개막전에 북경무대에서 선보이게 되는 대형가무의 문학극본과 가사를 창작해낸 그는 또 105명 무용수가 등장하는 이 무용종목의 총감독직책을 수행하는 한편 관광객들을 위한 민족문화보급활동, 순회공연배치 등 일상사무를 처리하느라 무척 바삐 보내고있다. 불혹의 사나이 박춘선이 다사다망중에서도 창작활동에 게을리 하지 않고 보다 우수한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생활을 풍부히 하는데 더욱 큰 기여를 하기를 기대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할빈공업대학 컴퓨터학원 다지능로봇연구센터 주임 홍병용교수를 찾아서로봇축구는 ‘자그마한 플렛폼우에서의 기술전쟁’, ‘인공지능을 발전시킨 리정비’, ‘로봇사회의 축도’등 미명을 갖고 있다. 세계적 범위에서 수많은 과학가와 기술일군들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할빈공업대...
  • 2008-08-09
  • "한국-중국 가교 역할에 힘든 줄 몰라요"프레스센터 한국어 통역 자원봉사 백미향씨 "중국과 한국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싶어요." 8일 저녁 개막하는 베이징 올림픽은 한국어가 공식 통역 언어로 채택된 첫 올림픽이기도 하다. 이에 따라 전세계 기자들이 총집결한 메인프레스센터(MPC)에도 조선족 여...
  • 2008-08-09
  • 환자에게 시간은 곧 생명이다 "호흡이 곤난한 환자로부터 머리 다친 사람, 원인을 모를 갑작스러운 복통 그리고 심장이 멎어버린 환자까지… 언제 어디에서 어떤 환자가 실려올지 모르기에 응급과의 의사들은 항상 긴장된 상태에 처해있습니다. 환자에게 있어서 시간은 곧 생명이기에 응급과의 의사들은 가장 적...
  • 2008-08-08
  • "13만7000km성화봉송 그 자체가 드라마"중국동포 김련남 씨 중국80개 도시 돌며 동고동락베이징 올림픽 성화가 중국땅을 처음 밟은 것은 5월 4일. 하이난 성 싼야에 도착한 성화를 보고 그는 눈물을 흘렸다.“아, 정말 중국에서 올림픽이 열리는구나.”그런 그가 8일 개회식에서 다시 눈물을 흘릴 것 같...
  • 2008-08-08
  • 무지개꿈 현실로 이루어지기까지북경대학입학생 엄소천과 그의 가정을 엿본다 ○ 김성철 금년도 룡정고중 졸업생 엄소천 학생의 가정에 경사가 났다. 엄소천 학생이 총점 648점, 전 주 문과류 7등의 성적으로 무난히 북경대학에 입학한것이다. 엄소천학생이 물론 아주 우수하지만 특별히 지력상수가 높아 리해가 남달리 빠른...
  • 2008-08-07
  • 희망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누군가는 돈에서 찾고 누군가는 사람에게서 찾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바로 스스로가 희망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아니, 충분히 알고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17년 전 두 아들을 떼어놓고 한국행을 택했던 윤애자씨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말한다. 내 안에 희망이 있고 길은 거기...
  • 2008-08-04
  • 1929년에 4형제중 셋째로 태여나 일찍 조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고 19살때 1급전투영웅 칭호를 수여받은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연길시에 사는 정관채﹙80살﹚로인이다.정관채로인은 13살나던 해인 1942년에 어머니와 동생을 조선에 남겨두고 형님과 함께 아버지를 따라 화룡현 이도구에 이사왔다...
  • 2008-07-30
  • (베이징=연합뉴스) 특별취재단 = "중국이 안방에서 열리는 이번 올림픽에서 처음으로 종합우승을 했으면 좋겠어요. 또 같은 민족인 남북한도 좋은 성적을 올리기를 기대할께요" 2008 베이징올림픽에 한국어 통역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는 조선족 강혜옥(姜惠玉.22)씨는 신세대 대학생답게 자신의 생각을 거침 ...
  • 2008-07-29
  • 한평생 동심과의 “앵코”타기 청소년언론인, 아동문학가 윤정석 “앵코 앵코 난좋아요/ 앵코타고 솟아보면…”여러세대를 거쳐 우리의 동심을 습윤히 적신 동요이다. 이 동요의 작사가 조선족청소년언론인이며 아동작가인 윤정석(尹精錫)은1927년8월5일 연길현6구 장재촌에서 태여났다...
  • 2008-07-29
  • 우리 가락 날실로 엮어온 40년 예술인생 황창주씨는 올해까지 40년 동안 우리 음악의 외길을 고집해왔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우리 가락, 우리 음악과 함께 해온 인생이다.  황창주씨가 민악과 인연을 맺게 된것은 지난 세기 60년대로 거슬러올라간다. 황창주씨는 연길에서 태여났지만 아버지가 화룡시공전소 소장으...
  • 2008-07-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