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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청- 가수 사회자로 쌍나래 훨훨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월14일 08시15분    조회:110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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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노래는 마음으로 불러야 되고 아름다운 마음은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가꾸어야 한다》고 말하는 김청, 아름다운 마음가짐으로 불러서 그녀의 노래가 그토록 매혹적일가? 1985년 도문시가무단의 독창배우로 되여서부터 지금까지 부단히 자신을 승화시켜 가수로 사회자로 쌍나래를 펼친 김청의 앞으로 꿈은 또 무엇일가?

김청은 1966년 화룡시의 한 평범한 로동자가정의 막내딸로 태여났다. 당시 문예의 《황후》였던 강청을 숭배한 그의 부모는 딸의 이름을 김청이라고 지어주었다. 이름덕이였는지 김청은 어려서부터 예술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그래서 부모는 그녀가 7살나던 해에 바이올린을 사주고 예술의 길에서 지극정성으로 떠밀어주었다. 그러나 어린 김청은 바이올린보다는 성악에 더 큰 취미를 느꼈다. 

소학교에 입학하여서부터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 김청은 줄곧 학교선전대에서 활약해왔다. 한족학교에 다녔던 그녀는 초중 3학년때 조선족학교에 다니면 예술면에서 더 발전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서 조선족학교로 전학하는 모험을 감행하였다. 그러다가 고중시험에서 락방되는 고배를 마셨고 다시 한족학교로 돌아가 1년간 더 공부하여 고중에 진학하였다. 

가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날마다 노래테프를 들으며 꾸준히 노래를 따라부르는 딸이 너무나 기특해 부모는 일찍 초중시절에 전화자선생한테서 민요를 배울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교통이 아주 불편했던 그때는 화룡에서 연길로 오가는 뻐스가 하루에 한대밖에 없었다. 김청은 일요일마다 일찌감치 연길에 있는 선생님한테 와서 노래수업을 받은후 오후뻐스를 기다리기 위해 간단히 점심을 에때운후 백화상점에 가서 오후까지 뻐스시간을 기다렸다가 집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비록 고달픈 배움의 길이였지만 예술학교선생님한테서 노래를 배우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하니 마냥 신이 나기만 했다. 

이렇게 쌓은 공이 헛되지 않아 고중을 졸업하는 해 김청은 시험을 통해 도문시가무단의 독창배우로 들어가게 되였다. 어릴 때부터 꿈꾸어오던 가수가 된다고 생각하니 김청은 온 세상을 독차지한듯 가슴이 뿌듯하였다. 공연이 잦았던 그때 김청은 광동말로 련속극 《상해탄》의 주제곡을 불러 대중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었다. 그리고 가끔 사회를 보기도 하였고 또 려채옥선생한테서 짬짬히 벨칸토창법을 배우기도 하면서 예술의 전당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 열심히 노력하였다.

1991년 김청은 연길시예술단에 전근하여 프로사회자로 되였다. 이때로부터 그의 앞에는 더욱 광활한 활무대가 펼쳐졌고 그녀는 고기가 물을 만난듯 마음껏 재주를 익히고 과시하였다. 조선어가 차해서 사업에서 애로를 느꼈던 김청은 조선어로 된 잡지들을 부지런히 읽으면서 우리말공부에 달라붙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막힘이 없게 되였다. 김청은 주로 사회를 보는 한편 독창가수로도 활약하면서 점차 예술단의 중견배우로 부상하였다.

성황리에 펼쳐졌던 2000년 중국조선족민속관광박람회, 연변을 전국에 알리며 화려한 자리를 매김한 그번 행사에서 사회를 맡은 김청은 관객들로부터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인산인해를 이룬 관람객들앞에서 그녀는 중앙과 성, 주와 시 지도자들의 연설을 즉석통역하면서 높은 사회재능으로 대회의 분위기를 끌어올려 일약 연예계의 인기배우로 떠올랐다.

잘 여문 곡식 머리숙인다고 김청은 사람들의 박수갈채에 결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배움에 목말랐던 김청은 자비로 북경에 연수를 떠나 중국음악학원과 중국방송학원에서 엇갈아 연수하면서 노래실력과 사회실력을 단단히 다졌다. 

200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돐 경축대회에서 김청은 또다시 사회자로 나서서 대회를 뜨겁게 달구었고 같은해 길림성청년가수노래콩클에서 노래 《장백의 정가》를 불러 금상을 받았다.  2003년 전국조선족청년가수성악콩클이 연길에서 열리게 되였다. 군중예술관에서는 김청에게 사회를 맡아달라고 요청하였다. 당시 평심위원이였던 림정선생이 김청에게 사회보다는 아예 가수로 경연에 참가해보는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해왔고 마음이 동한 김청은 결국 콩클에 참가하여 은상을 받아안았다. 주위의 선생님들은 목청이 고운 김청에게 통속가요보다는 민요를 부르라고 권고하였다. 그때까지 사회자로 있으면서 노래에 크게 신경써오지 않던 그녀였지만 신심이 생겼고 민요가수로 되려는 결심을 다졌다. 진취심이 강한 김청의 장래성을 감안한 연길시정부와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서는 김청을 북경에 보내여 반년간 연수할수 있게끔 물심량면으로 배려해주었다.

그해 김청은 《4월의 봄》친선예술축제에 참가하여 《천하절승 묘향산》을 불러 단연 금상을 받아안았다. 2004년에는 《바다의 노래》, 2006년에는 《모란봉》, 2007년에는 《조선아, 다시 안아보자》로 《4월의 봄》친선예술축제에서 련속 금상을 받아안는 영예를 따냈고 2004년 한국 KBS방송국의 요청으로 한국중앙방송국 합동공연에 참가하여 꾀꼬리같은 목청으로 해외에까지 이름을 날렸다.

작년 평양에 가 친선예술축제에 참가했을 때 김청은 선진적인 설비가 갖춰지고 우수한 악사들이 있는 영화방송악단에서 개인음반을 내고싶은 꿈을 가졌다. 조선측과의 면담에 성공하고 귀국한 김청은 발이 닳도록 작사자와 작곡가선생님들을 찾아다니면서 새 곡을 써달라고 청들었다. 결국 14수의 가사에 곡이 붙게 되였고 김청은 5월 14일 노래를 받아쥐고 조선으로 나갔다. 시간이 촉박하여 나간지 3일만에 편곡을 끝내고 악대와 겨우 한번 맞춰본후 즉각 록음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김청은 노래실력을 뛰여나게 발휘하였다. 악사선생님들은 노래 한수가 록음될 때마다 함께 들어본후 《김청선생은 인물도 곱지만 노래를 잘 불러 더 곱습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록음을 마친 김청은 7월 백두산의 천지와 고산화원을 배경으로 DVD촬영을 하였다. 

연길시조선족예술단과 연길시문화신문출판국, 체육국 지도자들이 발벗고 나서서 도왔고 연길시인민정부에서 10만원을 협찬해주어 마침내 아름다운 백두산풍경을 배경으로 그녀가 열창하는 모습을 담은 음반 《연변아리랑》이 출판되였다. 

김청은 《많은 고마운분들의 지지로 음반을 출판하였다. 아직도 좀 더 잘불렀더라면 좋았겠다는 유감이 든다. 언제라도 다시 불러 가사와 곡을 써준 선생님들께 만족을 드리고싶다》고 소감을 말했다.

2007년 9월 22일 중국 광주에서 열린 중국록색세기컵 《2007중국애심건강대사콩클》에서 중국최우수자태상을 수상한 김청은 《우리 민족의 체면을 세웠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벅차다》고 소감을 말했다. 사실 전국각지에서 온 20대 미모의 연예인들을 보는 순간 주저심도 들었지만 워낙 끈질긴 성격의 소유자인지라 인생에서의 제2차 도전을 하고싶었다. 꼭 좋은 성적을 따내서 조직에 회보하고싶었던 그녀는 20일간의 봉페식훈련에서 남다른 노력을 거쳐 독특한 무대풍격으로 중국최우수자태상을 수상하였던것이다. 

예술의 외길을 내처 달려온 김청은 국가2급배우로 연길시조선족예술단 사회자 겸 가수로 활약하면서 6년째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대표로 당선되였고 《우수인민대표》의 영예까지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화려한 경력에 괄목할만한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지금은 2집 음반준비로 분주히 돌아치고있다. 그녀는 《정부와 조직에서의 배려 그리고 대중들의 사랑이 있었기에 오늘의 영광이 있다. 앞으로 더 힘이 자라는대로 연변인민을 위해 좋은 노래를 부르겠다》며 긍지에 차 말했다. 생명의 끝까지 예술을 위해 살고싶다는 김청은 가수로 사회자로 더욱 높이 더욱 힘차게 훨훨 날고있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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