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말 : 금년은 조선족로홍군이며 항일투사인 리화림녀사의 서거 10주년이 되는 해이다.(리화림녀사의 서거소식은 본지 1999년 2월 13일자에 보도된바 있다.) 리화림은 생전에 대련시의 유일한 로홍군으로 그의 일생은 혁명적일생이며 전투적일생이였다. 그는 당에 충직하고 인민에게 충직하였으며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위하여, 공산주의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필생의 정력을 바쳐왔다. 그는 조선족으로서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도 조선족을 잊지 않고 전 재산인 5만원을 원 려대경비구 련락부 부부장인 김도영씨를 통해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그의 서거 10주년을 맞으며 본지는 리화림녀사의 생전 사진 몇폭을 게재하면서 그의 생평을 기리고 단편적으로나마 조선족의 혁명전통과 혁명력사를 되새겨보는것은 단순한 시간적인 공간을 뛰여넘어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과 정신을 후세들에게 이어줄수 있다는데서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교양적가치가 있지 않을가 한다. 참고로 그의 전기적생애는 본지 2003년 11월에 “투사 리화림의 한생 겨레가 잊을수 없는 한 녀인”이라는 제목으로 련재된바 있다.
리화림은 대련에 있는 유일한 조선족 로홍군이며 항일투사이다.
리화림은 1905년 1월 6일 평양의 한 애국자가정에서 태여났다. 열네살때 “3??”운동에 참가했으며 스무살때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30년에 민족해방의 길을 찾아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온 리화림녀사는 상해에서 김두봉의 알선으로 “한국림시정부” 주석 김구(백범)가 령도하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두차례 큰 테러작전으로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세인을 놀래웠다. 1월 8일에는 리봉창의사가 입고다니는 “훈도시”에 작탄 두개를 감추어가지고 왜놈의 소굴 도꾜로 건너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요격하여 혼비백산시킨바 있는데 당시 김구의 명을 받고 리봉창의사의 그 특제 “훈도시”를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리화림녀사이다. 4월 29일, 일본천황 생일날 윤봉길의사가 상해에서 일본인들이 소위 저들의 상해공략승리를 경축하는 홍구공원의 회의장에 들어가 사열단에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대장 등 수십명을 사상시켰는데 리화림은 홍구공원사건을 앞두고 윤봉길의사와 같이 공원으로 사전의 정탐을 나간바 있다.
그는 1932년 가을 광주로 가서 중산대학 의학원 부속병원에서 견습간호원으로 일하면서 방청생으로 공부하였고 1935년에는 중경으로 철퇴하였으며 이듬해 3월에 또 “조선의용대”본부가 있는 계림으로 갔다.
국민당이 소극적으로 항일하는 형세하에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가야만 전도가 있다는 견해로 합치되여 1941년 7월 적의 겹겹한 봉쇄선을 뚫고 태항산근거지로 갔다. 근거지생활은 간고하였고 적들의 진절머리나는 소탕속에서 전사들은 군사훈련도 하고 정치문화학습도 하였다. 당시 의용군부녀대 대장 겸 의사로 있은 리화림도 사회과학원 간부양성반에서 반년동안 배우면서 전투생활을 하였다.
1943년 12월 30일 “조선의용군”이 태항산에서 내려와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갔다. 리화림은 연안에서 렬화충천하는 대생산운동에도 참가하고 군정대학 교장 수하에서 자료간사사업도 하였으며 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도 하였다. 1945년 1월, 나이가 많은 그는 여덟살이나 줄이고 의과대학 20기 학원으로 입학한 그는 일심으로 공부에 전력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왜놈이 무조건 투항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기쁨에 옷깃을 적시였다.
리화림은 1946년 11월 21일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후 그는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시기 가렬처절한 포화속에서 부상병을 구하느라 땀도 흘리고 피도 흘렸으며 전후에는 새중국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崑렛듦)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으로 일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 억울한 루명을 쓰고 별의별 박해를 다 받다가 1978년에 중앙조직부의 도움으로 애매한 루명을 벗고 연변자치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기관당위 상무위원으로 있었고 대련시정부시찰원, 대련시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무정한 세월에 인생길은 저물었어도 혁명에 바친 리화림녀사의 일편단심은 변함이 없어 1984년에 리직휴양한 뒤에도 나라사업에 열성을 다하였다. 리화림은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소박한 가장집물에 1950년대부터 입어오던 옷을 입어가면서 아껴먹고 아껴써서 알뜰히 모은 로임 2만여원을 1985년 한번에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아동작품작가들을 장려하고 복리사업에 쓰도록 1만2천여원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하였다.
1999년 2월 10일 14:30분에 리화림녀사는 95세의 년세로 대련에서 서거하였다. 리화림은 림종전에 자기의 전재산인 5만원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겠다는 유서를 남기였다. 후에 김도영부장이 유서대로 5만원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전하였다.
“물 마실 때 우물 판 사람을 잊지 말라”고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생을 분투하여온 리화림의 빛나는 생애는 우리 민족의 자랑과 긍지이며 우리가 평생 본보기로 배우고 기념해야 할 분이다.
1955년부터 1956년 7월까지 중공중앙당교에서 학습할 때 동학들과 기념사진을 찍고있는 리화림(중간).
1962년 리정(중간사람)장군이 연안에서 사업시찰할 때 함께 찍은 사진. 오른쪽으로 두번째가 리화림녀사. 당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국 부국장임.
1982년 리화림녀사는 대련시 조선족 인대대표, 정협위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리화림녀사가 그의 축수를 위해 온 분들과 기념사진을 찍고있다.
리화림녀사는 사회주의건설에 적극 참가하였다. 사진은 식수활동에 참가하고있는 리화림.
∧ 1989년 10월 8일 대련시로년절 1주년기념활동에 참가한 리화림녀사가 김도영회장(왼쪽)과 함께 조선의용군행진곡 가사를 읽고있다.
인터넷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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