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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녀- 연변의 첫 국가1급 무용배우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월21일 10시08분    조회:8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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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순녀 그녀가 선택한 무용인생

21세기의 문턱을 넘어선후에도 출중한 무용연기를 선보이며 인기를 독차지하던 이름난 무용배우 함순녀-연변의 첫 국가1급무용배우로 활약을 펼쳐가던 그녀는 지금 연변가무단의 단장조리로 사업하는 한편 전국인대 대표, 길림성인대 대표로 나라를 위한 사업에서 한몫을 톡톡히 담당해가고있다.

어머니의 추동으로 선택한 무용인생

1964년에 연길시에서 태여난 함순녀는 어릴 때부터 춤추기를 퍼그나 좋아했지만 무용을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할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춤을 너무 잘 추어 연길시태평소학교무용대에서 가장 사랑받는 꼬마배우로 자리매김을 하면서도 공부가 더 좋았던 순녀는 장차 명문대학에 진학할 꿈을 안고 한족초중인 연길시1중에 추천받아 공부에 모든 정력을 몰부어갔다.

그런데 초중 2학년때의 어느날, 어머니가 갑작스레 딸을 불러놓고 예술학교에 시험쳐보라는 제의를 내놓았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 춤추기를 무척 좋아했지만 여러가지 여건때문에 로동자로 살아가는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너만한 조건이면 꼭 무용으로 성공할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이렇게 되여 여느 애들보다 일찍 소학교에 입학한 순녀는 나이를 한살 보태서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 응시를 하고 실기시험에 참가하였다.

말을 타면 견마잡히고싶다고 원래는 생각이 없었지만 정작 도전에 참가하고보니 꼭 합격되고싶었던 순녀는 시험관들의 요구에 따라 춤을 추면서도 덧이발때문에 점수를 깎일가봐 꾹 다문 입을 열줄 몰랐다. 이상하게 생각한 시험관들이 이것저것 물음을 제기했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답을 하던 순녀가 끝내는 웃고야말았다. 그제야 덧이발이 보일가봐 그런다는것을 알아낸 시험관들은 웃으면서 춤을 추면 점수를 더준다고 하면서 시름놓고 장끼를 자랑할수 있게끔 인도해주었다. 덕분에 순녀는 종합성적 1위를 쟁취하고 무용인생을 살아갈 행운을 얻게 되였다.

무대에서 인기몰이를 하던 시절

14살에 연변예술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무용을 전공하고 연변가무단에 배치받은 순녀는 꼭 무용으로 성공을 안아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선후로 해방군예술학원, 상해무용학원, 한국국립무용단에 가서 조선무용이며 발레 등을 부지런히 배우면서 무용기교를 끊임없이 제고하였다. 그 보람으로 그는 1986년에 있은 제2차 전국무용콩클에서 독무 《수양버들》을 출연하여 표연3등상을 받았고 그해에 있은 길림성중청년무용콩클에서 장고춤 《강산은 아름다와라》로 1등상을 수여받았다. 

그 이듬해에 중국청년민족예술단의 일원으로 제4차 《비단의 길》예술제에 참가하여 일본의 24개 도시에서 선후로 45차나 독무 《도라지꽃》을 무대에 올린 함순녀는 1990년에 펼쳐진 제1차 전국소수민족무용콩클에서 《달따는 처녀》로 표연2등상을 수여받았으며 1992년에는 길림성문화청으로부터 공을 기입받고 그해에 2급무용수로 진급하여 연변무용계에서 제일 나어린 부교수급무용수로 자리매김하였다.
그사이 순녀는 연변가무단 무용대에서 근무하면서 함께 상해무용학원에 발레연수도 다녀오고 어깨나란히 무극 《돈끼호떼》의 남녀주역으로 출연하던 선배와 결혼하고 아들 쌍둥이를 낳아 키우면서도 출산때문에 반년 남짓이 출근하지 못한 1992년을 포함해서 해마다 년말실무회보에서 1등을 따내는 한편 한국, 조선, 쏘련, 향항 등 나라와 지구를 돌며 공연에도 수없이 참가하였다. 

새로운 무용을 무대에 올릴 때면 꼭 주역이 차례지고 초청을 받고 공연을 나가는 차수가 늘어나면서 인기도가 직선상승하였지만 순녀는 어쩐지 35살을 초과하기전에 전국무용콩클에 한번 더 참가해보려는 “욕심”을 떨쳐버릴수 없었다.이렇게 연변예술학원 부원장 향개명과 연변가무단의 국가1급안무가 송미라가 공동으로 안무한 독무 《코신》을 련습하기 시작한것은 1998년 8월초였다. 결승경기날자까지 남은 시간은 겨우 석달, 그사이에 창작무용에 선택종목까지 적어도 3개의 무용을 준비해서 예선경기부터 치러야 하는지라 밤에 낮을 이어가며 련습에 땀동이를 쏟아야 했다.
그런데 겨우 10일간 련습하였을 때 쌍둥이아들중 한애가 다리가 절골되였다. 석고를 하고 석달간 움직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에 함순녀는 그만 눈앞이 아찔해나는것을 어찌하는수 없었다. 엄마로서 상한 아들을 제쳐놓고 무용련습에만 전력해야 한다는 현실이 너무도 한심하였다. 그러나 기회는 이제 더 없고 정말로 범의 꼬리를 잡고 놓지 못하는 격이였다.

이러는 순녀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다병한 시어머니가 손자를 맡아나섰다. 이리하여 순녀는 항주에 가서 결승경기에 참가할수 있게 되였다.

항주에 가보니 결승전에 참가할 민간조의 배우들가운데서 함순녀의 나이가 제일 많았다. 나어린 배우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면 배가의 노력을 경주해야겠다고 생각한 순녀는 자그마한 동작 하나라도 허투로 할세라 열심히 해나갔다. 순녀의 정성이 관중들을 감동시켰는지 출연도중 박수갈채가 터졌다. 

그번 콩클에서 48개 무용이 참가한 준결승을 무난히 통과하여 결승전에 진출, 우수상을 안고 돌아온 순녀는 연변가무단 무용대 대장의 중임을 떠메고 활동범위를 넓혀갔다.2000년에는 전국제2차무극콩클에서 무용서사시 《장백정》의 녀주역으로 우수표연상을 타고 37살에 국가1급무용배우직함을 따내였으며 2001년에는 제2차전국소수민족문예경연에 참가하여 장고춤 등 무용종목의 쏠로( 舞)로 무대에 등장함으로써 기타 민족의 대표들과 더불어 당시의 중공중앙 총서기 강택민동지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밖에 순녀는 출중한 사업성과로 2002년에 길림성우수전문가의 칭호를 수여받고 상금을 획득하였으며 2005년에는 전 주 덕예쌍형문예사업일군으로 표창을 받았다.

후대양성에 바친 심혈

2001년에 제2차전국소수민족문예경연에 참가하고 연길에 돌아오니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부에서 함순녀를 찾아 교수를 맡아달라고 제의를 해왔다. 40고개가 가까와지면서 전도가 있는 후배들에게 재능을 발휘해볼수 있는 공간을 내주고싶었던 순녀는 흔쾌히 이 제의를 받아들이였고 2002년부터는 아예 무용대 대장의 직무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후대양성에만 정성을 쏟기 시작했다.

지난 몇년간 함순녀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부에서 겸직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많은 본과생들과 연변가무단학원반 학생들을 양성해냈는데 그가운데는 무용 《메아리》의 주역으로 전국대학생무용콩클에서 상을 따낸 학생이 있는가 하면 연변가무단 무용대에서 골간으로 활약하는 학원들도 있다. 그리고 2006년도 학원반 학생중 2명이 연변가무단의 2008년도실무회보에서 6등안에 들어가는 실적을 따낼수 있은데는 담임을 맡은 함순녀의 역할이 컸다고 할수 있다.

1980년대에 상해무용학원에서 연수를 하면서 발레를 체계적으로 배운 함순녀는 조선무용도 특기이지만 발레면에서 조예가 깊어 발레교수를 맡을 임무가 차례졌다. 당시 발레는 난이도가 커서 제대로 받아무는 학생이 몇명 안되고 여러 급별의 콩클에 참가한다는것은 상상도 못하는 실정이였다. 이를 가슴아프게 생각한 순녀는 꼭 우수한 학생을 양성해내여 소수민족이 전국발레콩클에 참가한적 없는 력사에 종지부를 찍을 결심을 내렸다.

마침 최령이라는 조선족학생이 발레에 흥취가 있고 또 각종 조건도 괜찮아서 중점양성하기에 적격이였다. 신대륙을 발견해낸 순녀는 이 학생을 알심들여 양성해서 3학년때인 2006년에 발레무를 위주로 하는 제7차복숭아컵전국무용콩클에 참가시켰는데 최령학생은 발레를 5∼6년간이나 전공한 학생들과의 실력대비에서 중상의 우세를 과시하고 제2단계의 어깨겨룸에 참가하는 실적을 올렸다. 비록 그번 콩클에서 수상의 기회를 잡지는 못했지만 최령학생의 출중한 표현은 해당 전문가들을 놀래웠고 연변조선족은 전국발레콩클에 참가한 유일한 소수민족으로 소문을 놓게 되였다. 오죽하면 그자리에 있던 상해무용학원의 전문가들도 지도교원인 함순녀를 붙잡고 누가 발레를 가르치는가고 미주알고주알 캐물었을가?! 

연변TV의 2009년 음력설야회종목인 노래 《아, 나의 태양》을 통해 발레쌍무를 선보이게 되는 최령학생을 위해 촬영장에 나온 함순녀는 스승으로서 제자가 훌륭한 성적을 따내는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고 터놓으면서 성취감을 내비쳤다.

인민대표의 직책에 충실하며

1980년대에 연변조선족자치주 《5?》메달을 획득하고 연변주청년련합회 부주석, 길림성청년련합회 상무위원, 전국청년련합회 위원으로 사업한 함순녀는 1992년부터 련속 2기나 주정협 위원으로 활약하였고 2003년부터는 길림성인대 대표로, 2008년부터는 전국인대 대표로 추대되여 나라의 대사를 토론하는 엄숙한 행사에 직접 참가하고있다.

예술계의 유일한 조선족대표인 그는 이런 행사들에서 연변예술계 또는 연변조선족을 위한 제안들을 부지런히 내놓으면서 연변을 위해, 조선족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기에 최선을 다하고있다. 길림성에서 규모가 제일 큰 조선족예술단체인 연변가무단은 길림성 또는 국가를 대표하여 국제적인 예술행사에 참가하는 차수가 많지만 명칭때문에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할 때가 푸술하였다. 이 문제의 해결을 두고 골머리를 앓던 함순녀는 길림성인대회의기간 연변가무단이 출국공연에 참가할 경우 《길림성조선족가무단》과 《연변가무단》  두가지 명칭을 사용하여 해당 국가에서 성급대우를 향수받을수 있도록 비준해줄데 관한 청구를 제기하였다. 이 제안은 이미 길림성문화청으로부터 답복을 받은 상태라고 한다.

최근년간에 한국어능력시험제도가 실시되면서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이 출국해서 치부의 단꿈을 무르익힐수 있는 길이 넓어졌다. 그런데 전국적으로도 조선족이 제일 많이 집결되여 살고있는 연변에 2008년도 한국어능력시험명액이 1000명밖에 차례지지 않아 많은 조선족들이 길에 돈을 널며 일부러 청도,상해 등 대도시에 가서 시험에 참가하는 불편을 겪었다. 명액분배에 문제가 있다고 단정한 순녀는 연변의 명액을 늘여줄데 관한 제안을 교부, 2009년에는 6000명이 연변에서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를수 있도록 조건을 창조해주었다.

2008년의 전국인대회의기간 길림성의 감표원으로 활약한 순녀는 또 기회만 있으면 우아한 춤사위로 주위의 대표들에게 웃음을 선물하였고 3월 8일에는 기타 민족의 녀성대표들과 함께 국무원 온가보총리의 접견을 받고 총리의 곁에서 사진을 찍으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행복한 쌍둥이엄마

40대중반에 올라선 지금에 와서 함순녀의 가장 큰 기쁨은 어느새 고중생으로 성장한 쌍둥이아들들의 미더운 모습을 바라보는것이라고 한다. 한창 나이에 잘해보려고 결혼 5년만에야 낳은 쌍둥이가 구석구석 챙겨주지 못해도 너무 밝게, 건강하게 커주어 고맙기만 하단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남편과 둘의 힘으로 쌍둥이를 키운 순녀는 시도때도 없이 공연을 나가고 외출을 해야 하는 예술인의 사업성질에 비추어 애들을 자립정신을 갖춘 사람으로 양성하기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어려서부터 자기의 물건은 절로 건사하게 하였고 학교에 붙은후에는 교과서가위를 씌우는 일도 첫해에는 함께 하면서 배워주고 그다음해부터는 무조건 자체로 하도록 습관시켰다. 무엇이든 절로 하는데 습관된 애들은 빨래를 해놓으면 각자의 옷가지들을 절로 분류하고 방청소도 제힘으로 하면서 웬간한 일은 부모들의 손을 바라지 않는다. 공부도 모르는것이 있으면 서로 토론하면서 자각적으로 하고있는데 지금까지 과외 한번 하지 않아도 성적이 우수해서 둘이 다 지난해에 연변2중에 진학하였다.

2란성쌍둥이인 애들은 성격이나 애호가 완전히 달라서 아빠를 닮은 맏이 김흠은 키가 181센치메터,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춤, 노래, 운동 등에 다 흥취가 있는 반면 엄마를 닮은 둘째 김뢰(金磊)는 키가 173센치메터, 녀자처럼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다고 한다. 따라서 노래를 좋아하는 김흠은 컴퓨터로 한국노래를 배우며 조선글을 절로 익혔으나 흥취가 다방면이다보니 학습성적이 그리 돌출하지 못해서 초중 3학년에 가서야 학급 5등안에 들었으며 노력형의 김뢰는 초중시절 시종 학급 1,2등의 위치를 확보한건 물론 연변2중에 추천받은 지금은 중점반에 들어가 공부하고있다.

쌍둥이들의 성장과 자기의 오늘을 두고 함순녀는 남편의 공로가 크다고 고백한다. 남편도 무용을 전공한 예술인이기에 안해를 많이 리해해주고 사업, 가정살림, 자식교양 등을 가리지 않고 주동적으로 팔을 걷고 도와나선다고 한다. 덕분에 순녀는 지금까지 애들이나 가정의 일때문에 사업에 지장을 준적은 단 한번도 없다고 한다.

최근에 연변가무단 단장조리로 승진한 함순녀는 주인대회의에 렬석할랴, 성인대회의에 참가할 준비를 할랴, 단위의 일상업무를 틀어쥘랴, 연변TV 음력설야회촬영장에 드나들며 무용지도를 할랴 눈코뜰새없이 분주히 보냈다. 음력설전에 성인대회의에 다녀오고 3월에 열리는 전국인대회의까지 참석해야 본격적으로 일상업무에 신경을 쓰게 된다는 그녀가 연변가무단의 래일을 위해 보다 많은 일들을 추진시킬것이라 확신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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