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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을 딛고 일어선-박춘우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2월18일 09시11분    조회:8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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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음력설야회 소품출연차 연길행

10년전 음력설야회 소품 《설날아침》(박춘우, 박성룡 출연)에서 한족의 조선말연기를 선보여 시청자들에게 많은 폭소와 게시를 주었던 훈둔장사가 돌아왔다. 그럼 10년이 지난후의 음력설 《왕훈둔》은 어떤 모습으로 돌아왔을가?

10년만에 서게 된 소품무대

2월 7일 펼쳐지게 되는 음력설야회에 박춘우는 소품 《설날아침》의 속편인 《새해아침》(박춘우, 박정복, 리원표 출연)에서 남편과 사별한후 홀로 삼남매를 키우며 고생을 억수로 한  조선족아줌마와 결혼하여 훈둔집을 경영하며 알콩달콩 살고있는 성공한 왕훈둔역을 선보인다. 뿐만아니라 직접 소품의 감독까지 맡아한다.

박춘우는 당시 《설날아침》의 출연을 결정할 때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시청자들이 우리 민족에 대한 비하라고 비난할가 걱정이 되였던 그는 무대에 금방 섰을 때 전례없이 다리가 떨리기까지 했지만 관중석에서 터져나오는 박수소리에 용기를 얻었고 인차 연기에 몰입할수 있었다고 한다. 이토록 대중들의 박수소리가 제일 큰 응원이라는 박춘우는 그 소품을 통해 《왕훈둔》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당신 사람이 아니라이》라는 류행어를 만들어냈다.

박춘우는 또 《공산당이 어디 갔소까?》, 《모른다, 죽어도 모른다》 등 류행어를 탄생시키며 지극히 인기를 얻은 소품 《BP극조》의 감독을 맡았을뿐만아니라 개편도 하였으며 또 직접 극중의 감독역을 맡아 열연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는 이외에도 《발바리시장에서》를 비롯한 40여편의 소품에서 감독을 맡아하였고 《사위감점고》 등 30여편의 소품에서 열연을 펼쳐 대중들의 머리속에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작가를 꿈꾸었던 나날

1962년 룡정진(지금의 룡정시)에서 7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박춘우는 7살반에 아버지를 여의고 맏형님과 맏형수손에서 자랐다. 제일 작은 누나보다 11살이나 어렸던 춘우였기에 부모사랑보다 형제사랑을 지극히도 많이 받았다. 외지에 있는 지금도 맏형수가 엄마처럼 그립다는 박춘우는 맏형수한테 효도를 하지 못한것이 늘 마음속에 걸린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박춘우는 중학교시절 작가를 꿈꾸며 두 친구와 함께 나름대로 《문학사》를 세운다면서 많은 작품들을 써서 각 잡지사에 투고하였지만 번마다 퇴고맞았다. 그외에도 그한테는 특별한 애호가 있었는데 바로 해설이였다. 그는 영화보기를 매우 즐겼을뿐만아니라 보고난후에는 영화의 해설을 거듭하여 련습해보았다. 영화 《피바다》와 《꽃파는 처녀》의 해설은 전부 외우다싶이 하였다.

한번은 누나가 고생하는 맏형님네부부한테 영화표 두장을 얻어주었다. 자기도 가고싶었던 박춘우는 차마 가겠다는 말은 꺼내지 못하고 저녁 영화시간까지 자지 않고 끙끙 앓았다. 그것을 눈치챈 무던한 맏형수가 그한테 형과 함께 가보겠는가고 묻자 박춘우는 체면을 무릅쓰고 영화표를 받아쥐였다. 물론 누나로부터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았지만 보고싶은 영화를 보는데 그만큼은 얼마든지 감수할수 있었다.

이처럼 문학과 해설에 빠졌던 박춘우가 연극에 매혹된것은 연변연극단의 공연을 관람한후부터였다. 그래서 연변예술학교, 연변가무단 등 시험을 수없이 쳤지만 번마다 락방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후에 룡정시예술단에 들에간 박춘우는 거기서 삼로인, 무용 등 각 방면에서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과시하여 많은 인기를 받았다.

무용배우와 사랑에 빠져

룡정무용학습반에서 박춘우는 자기보다 4살 어린 무용수 김선자한테 푹 빠졌다. 그래서 춤련습을 할 때에도 첫줄에 선 그는 뒤줄의 김선자쪽으로 늘 머리를 돌려 힐끔힐끔 보아 무용선생님이 그의 머리를 바로돌려놓으면서 나무람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사랑하는 처녀의 호감을 사기 위해 박춘우는 기회를 타서 김선자를 보살펴주고 접근하였다. 늦을 때에는 집에 데려다주고 공연을 갈 때에는 자기가 한푼두푼 모은 돈을 호주머니에 찔러주기도 했다. 그의 진심을 보아낸 김선자도 차츰 사랑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김선자의 부모는 딸이 박춘우와 교제하는것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속상했던 박춘우는 어느날 술을 푹 마시고 술기운을 빌어 김선자네 집에 찾아갔다. 술이 거나해서 들어온 박춘우한테 김선자의 아버지가 물었다.

《당신, 누구요?》

《저는 이 집 딸 선자를 사랑하는 박춘우입니다. 딸님을 많이 사랑하니 교제를 허락해주십시오.》

박춘우의 혀꼬부라진 소리에 주정을 부린다고 흘기는 어머니한테 아버지가 《이 사람이 술을 이렇게 마신걸 보니 아직 식사는 못한것 같으니 빨리 상이나 차리오》하고 시켰다.

밥 한그릇 게눈감추듯 비워버린 박춘우는 웃방에 펴놓은 이부자리에 가서 쓰러져 잤다. 이튿날 아침 눈을 뜬 그는 부끄러운 나머지 슬그머니 뺑소니를 쳤다. 후에 들어보니 그가 그날 덮고 잔 이불이 장인장모의 첫날이불이였다.
후날 술취한 자신을 내쫓지 않으신 장인한테 리유를 물었더니 그나마 술기운에서라도 당당하게 교제를 허락받으러 온 그가 사내다와서였다고 했다.
 
진정한 예술의 길에서

1984년 북경중앙희극학원 시험을 친 박춘우는 입학통지서를 목이 빠지게 기다렸다. 그런데 함께 시험을 본 수험생들한테는 불합격통지라도 왔지만 그한테는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안된줄로 알고 속이 탄 그는 매일 술로 나날을 보내면서 집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룡정의 한 작은 식당에서 한창 술을 마시는데 맏형수가 느닷없이 찾아와 입학통지서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이미 술에 취한 몸이지만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맏형수는 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려고 며칠동안 연길과 룡정의 식당을 전부 훑었다면서 곱게 눈을 흘겼다.

북경중앙희극학원의 연기학부에 입학한 박춘우는 연기뿐만아니라 무대미술과 감독부분도 배웠고 또 많은 문학인들과 지인으로 사귀였다. 이는 그의 후날의 예술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였다.

북경중앙희극학원에 다닐 때 련인에 대한 자랑을 너무 많이 하여 련인한테 《춘향》이라는 별명을 달아준 박춘우는 련인과 함께 있고싶은 마음에서 북경에 남을수 있는 기회도 포기하고 연변연극단을 선택했다.

박춘우는 연변연극단에서 장막경희극 《요란한 사랑》(리광수 작, 전득주 감독)을 비롯한 많은 극들에서 주역을 담당했다. 예술에 푹 빠진 박춘우는 공연을 위해 결혼을 5번이나 미루었다.

지키고싶은 소중한 가정

5번이나 미루었다가 받은 날이 결국은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궂은 날씨였다. 저녁에 한창 오락판이 벌어졌을 때에는 정전되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좋은 징조가 아닌것 같다는 생각이 피뜩 떠올랐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였기에 더구나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박춘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가정만은 지키리라고 속으로 맹세하였다.

좋은 시작이 아니여서인지 혼인생활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는 리혼설까지 돌았다. 외지서 고생하던 제일 힘든 나날에는 2년동안 집에 1전 한푼 보내주지 못했다. 그때의 가정은 금이 실린 단지를 쇠줄로 아구리를 동인 상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든 가정을 지키려고 모지름을 썼다.

홀로 외지에 있으면서 제일 많이 부른 노래가 《타향의 봄》였다. 타향에서 정신상 육체상 너무 힘들 때 가끔 자신이 감독을 맡고 한가족 세식구가 출연했던 소품 《서쪽에서 뜨는 해》를 생각하면서 그 소품이 현실로 찾아온듯하여 무릎을 치면서 탄식한적도 많았다. 특히 딸 박미가 극중에서 《서쪽에서 해가 뜨면 아빠가 집으로 돌아온다고 해서 해를 서쪽에 그렸다》면서 《아빠가 그립다》던 그 모습이 눈앞에 아물거리며 눈물이 앞을 가렸고 가족의 그리움에 속이 타서 재가 되군 하였다. 그러면서 더더욱 박미에게 좋은 아빠가 되여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언젠가는 온 가족이 단란히 모여 살리라는 결심을 한결 굳히였다.

노력하는 자에게 길이 열린다고 갖은 고생끝에 박춘우는 끝내 일어섰다. 지금 청도바른문화전파유한회사의 설립을 앞두고있는 박춘우는 안해와 딸도 청도에 데려가 오붓한 가정을 재생시켰다.

지금 박춘우는 《내가 가정을 지킬수 있은것은 안해의 공로가 크다. 지금까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딸애를 키우며 가족에 정성을 다 바친 안해한테 감사한 마음이 어쩌면 사랑보다도 크다》면서 《역시 사랑도 의리이다》고 감개무량해 말했다.

언제나 민주적인 아버지

소품 《발바리시장에서》로 데뷔한 꼬마 박미가 지금은 18살 어엿한 고중생이 되였다. 《발바리시장에서》 김문혁의 《귀국발바리》를 둘러싸고 바람난 《아빠》와 설전하던 꼬마 박미, 아빠 박춘우의 흉내를 내며 《금붕, 금붕》하던 꼬마 박미가 지금은 어떤 모습일가? 예술에 끼가 많지만 공부가 우선이라며 모든 정력을 학습에 몰붓는 박미한테 박춘우는 어떤 기대를 하고있을가?

《사실 딸애가 앞으로 문학가로 되였으면 좋겠다》면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애에게 기대하는 박춘우는 또 《그러나 기대는 기대일뿐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절로 개척하기를 바란다》면서 맑은 웃음을 띠였다.

박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아주 존경하였다. 그래서 여러 방면에서 아버지의 조언을 귀담아듣군 하였다. 박춘우가 외지에 있을 때 한번은 박미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연변TV시랑송대회〉에 참가하는데 아버지께서 아는 사람이 많으시니 심사위원들한테 부탁해달라》는것이였다. 그러자 박춘우는 《그렇게 하겠으니 시름놓고 해보아라》고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후 1등상을 받은 딸애가 전화로 《아버지덕분에 1등을 했어요》하며 흥분하여 말하였다. 그제야 박춘우는 딸애한테 《아버지는 거기에 부탁전화를 한적이 없어. 니가 시름놓고 하라고 대답했을뿐이야. 그러니 1등은 너의 노력으로 얻은것이란다. 앞으로 모든 일에서 자신심을 가지거라》고 소중한 충고를 하였다.

이렇게 박춘우는 박미에게 바다와 같은 사랑을 주는 미더운 아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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