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도취되여 반평생
누군가 예술의 최고경지는 미치는것이라고 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일반사람들이 리해조차 하기 어려운 거동을 보일수 있겠는가? 그 미치는 경지속에는 꾸준한 탐구가 있고 끊임없는 노력이 슴배여있으며 그것은 결국 알찬 성과로 이어지게 된다.
1946년 10월 2일 화룡현 화룡진 동가촌(지금의 화룡시 룡성진 동가촌)의 한 농가에서 외독자로 태여난 허상권씨는 예술에 도취되여 반평생을 살아왔지만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오늘에도 그 예술의 끈을 부여잡고 석양빛갈을 화려하게 장식해가고있다.
1980년대 후반기 연변텔레비죤을 통해 《알이 터졌다》는 한마디로 시청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던 3로인 《경로원의 기쁨》에서 김상옥선배, 석봉숙배우와 함께 등장해 폭소를 선물했던 《꺽다리령감》, 바로 그 《꺽다리령감》 허상권씨의 연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시종일관하게 웃음을 몰고다니며 우리 민족 구연무대의 한자리를 튼튼히 지키고서있다. 《경로원의 기쁨》을 비롯해 《로인축구대》, 《기자가 오던 날》, 《혼인광고》 등 소품과 3로인 400여편을 소화하며 지금까지 4000여차의 공연에 참가해온 허상권씨는 류수같이 흘러간 지난 반평생을 돌이켜보노라면 사뭇 그 감개가 무량하다.
어려서부터 예술에 남다른 흥취를 가졌던 허상권씨는 중학시절부터 크라네, 바이올린 등을 연주하며 학교악대에서 활약했고 진대회, 현대회, 주대회에 참가해 무용, 표연창, 악사 등 여러가지 장끼를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장차 예술인이 되려는 꿈으로 가슴을 부풀리던 그는 어디에서 예술단이 공연한다고 하면 빼놓지 않고 죄다 달려가 구경하면서 배우들의 연기를 흉내내보군 하였다. 바로 허상권씨가 20세때였다. 당시 그는 이불짐을 메고 두만강지역에 가서 길닦기일을 하고있는데 연변연극단이 장막극 《산촌의 소나기》를 화룡에서 공연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맹랑하게 큰눈이 내려 허벅지까지 빠지는 바람에 며칠째 뻐스가 통하지 못할줄이야. 바로 그 장막극을 구경하지 못해 애간장을 태우던 허상권씨는 공연 마지막날 드디여 마음을 먹고 도보를 단행, 200리 산길에서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대골령, 소골령을 넘어 화룡시가지에까지 도착했는데 이미 공연이 시작되여 극장 앞문을 닫아버렸었다. 너무도 맹랑해서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행여나 하고 뒤문에 달려가 두드렸더니 마침 리영근선생이 문?열어주어서 허상권씨는 오매에도 보고싶던 장막극을 구경하게 되였고 따라서 오늘까지도 당시 문을 열어주신 리영근선생에게 감사한 마음을 금할수 없어하고있다. 이처럼 《연극이라면 미친것 같다》는 뒤소리까지 들어가며 공연구경을 다니고 자신 또한 농촌무대에서 활약하며 장끼를 발휘한데서 마침내 그의 꿈은 현실로 이어지게 되였다.
1980년도에 화룡예술단에서 대형가극 《흥부전》을 무대에 올리게 되였는데 당시 예술단에는 배우가 부족한 상황이라 마당쇠역을 맡을 배우가 없었다. 하여 대외에서 배우를 초빙하게 되였는데 각종 농촌대회에 참가해 장끼를 보여주었던 허상권씨가 예술단 책임자들의 눈에 들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구연무대에 발을 붙인 허상권씨는 김상옥, 량균 등 로선배들의 연기를 본받아 학습하는 한편 조선에서 처음으로 《춘향전》의 변학도역을 맡았던 조선인민배우 황철선생이 저술한 저서 《화술과 분장》을 열심히 탐독하며 자신의 기량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예술의 길은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화룡예술단은 농촌마을들을 돌며 많은 공연을 했는데 도구는 소수레에 싣고 배우들은 도보로 이 마을 저 마을 걸어다니며 공연하다보니 너나없이 지칠대로 지쳐 공연이 끝나자마자 굳잠에 빠져들기 일쑤였다. 그런 와중에 당시까지만도 문화생활이 결핍했던 농촌관중들이 예술단의 공연을 보고 즐거워할 때면 허상권씨는 마음이 뿌듯해났고 따라서 피로도 가신듯 사라지군 하였다. 그러던 1984년도에 중앙문화부 정교부부장이 문화사업차로 연변에 왔다가 화룡에 가서 화룡예술단의 공연을 보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드는것이였다. 따라서 정교부부장의 배치에 따라 그해 화룡예술단은 인솔자까지 20명 배우진이 4개월간 전국순회공연을 펼치는 영광을 가지게 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화룡예술단이 해마다 농촌마을을 돌며 수백차씩 온돌공연을 펼쳐온 까닭에 모든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허상권씨 역시 가정일에는 손댈 여가조차 없었고 따라서 집안의 모든 일은 그의 안해 유채순씨의 몫으로 떨어졌다. 예술단에 발들여놓기전 현기관지식청년공장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유채순씨와 소개로 만나 사랑을 맺은 허상권씨는 한평생 안해에게 빚지고 사는 심정이라고 밝혔다. 슬하에 아들딸 3남매를 키우며 80고령의 시부모까지 모시는 상황에서 집안의 기둥인 남편이 늘 공연때문에 밖에서 떠돌다보니 가정의 중임을 떠멘 유채순씨의 고생은 이루 다 말로 할수 없을 정도였다. 한때 재정경제의 불황으로 화룡시에서 로임을 제때에 내주지 못하게 되자 유채순씨는 심양, 장춘 등지로 다니며 그릇장사를 하여 집살림에 보탬을 하기도 했다. 그런 안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면서도 허상권씨는 언제든 공연하러 나갈 일이 있다고 하면 모든것을 제쳐놓고 달려나가군 했다. 그처럼 가정을 버릴 정도로 예술에 《미쳐》버린 허상권씨를 두고 현재 화룡예술단에서 구연배우로 활약하고있는 최중철씨와 홍미옥양은 《예술에 대해서 허상권선배는 하냥 깨끗한 마음이며 언제나 정식이고 진심》이라고 밝혔다. 한마디로 모든것을 다 버릴수 있어도 예술만은 버릴수 없다는것이 허상권씨의 페부에서 우러러나온 말이다.
예술에 도취되여 반평생을 살아온 허상권씨, 그는 자신만 예술에 《미친》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그 《미치는 경지》에 열심히 끌어들이고있다. 다시 말해 허상권씨가 양성해낸 제자는 선후로 근 20명에 달한다. 그중 현재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공부하고있는 김미령양은 올해 음력설야회에 소품 《선물》로 관중들과 대면하게 된다. 그 김미령양에 대해 허상권씨는 기자의 취재를 접수하는 앞에서도 《앞으로 졸업후 어디에 배치받든 열심히 하여 반드시 관중의 사랑을 받는 배우가 되여야 한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현재 퇴직한 몸임에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대신 예술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마음으로 언제 어디에서 부르든 서슴없이 달려가는 허상권씨, 지난해 8월에 설립된 화룡시민간예술단 업무단장을 맡고 오늘도 열심히 뛰고있는 허상권씨에게는 아직도 이루지 못한 꿈이 있다. 바로 1980년대 《알이 터졌다》는 대명사의 《경로원의 기쁨》이후로 연변의 구연무대에서 사라졌던 3로인을 재생시키는것, 한때 연변조선족 특유의 구연종목으로 자리매김했던 3로인이 사라져가는데 대해 허상권씨는 가슴아픈 심정을 토로하면서 《이는 우리 선배들이 만들어 물려준 문화유산중의 하나로서 절대 없어져서는 안된다. 반드시 다시 살려내야 한다》고 강조하고있다. 하여 그 자신이 솔선수범으로 올해 연변텔레비죤음력설야회에 선을 보이게 될 구연종목이 바로 《고백》이라는 제목의 3로인이다.
화룡시예술단의 구연배우 최중철, 홍미옥과 함께 허상권씨가 올해 음력설야회에서 선을 보이게 될 3로인 《고백》, 과연 20년만에 다시 시청자들과 만나게 될 3로인이 배우들의 열연과 함께 시청자들에게 즐거운 명절의 한때가 될것임을 믿어의심치 않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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