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계관시인 김철을 만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4월14일 22시11분    조회:692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노래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를 깔며~

지금 들려오는 이 노래는 중국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노래 <선생님의 들창가 지날 때마다>입니다. 20세기 70년대 말에 창작된 이 노래는 약 3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고 있고 전국 10대 금곡으로 손꼽히고 있는데, 이 노래의 작사자가 바로 김철선생입니다.

이 노래는 당시 중국의 <문화대혁명>으로 지위가 일락천장이 됐던 교육자들의 위상을 높여주고 옳바른 교육기풍을 선양한데서 연변을 비롯해 전국의 조선족학교들에서 많이 불려졌고 그뒤 한어로 번역돼 전국 각지 학교들에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시창작은 그의 숙명

김철선생의 원명은 김룡섭이고 김철은 그의 필명입니다. 1932년에 일본 시모노세끼현에서 태어난 김철선생은 어릴때 꿈이 가수나 마라톤선수가 되는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그로 하여금 시인의 길을 걷게 했습니다. 물론 학창시절부터 시, 소설 등 문학을 좋아했던 김철선생은 장차 시인이 되면 어떨가 하는 생각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시인의 길을 걷게 되고 시인이 되려는 신념을 굳히게 된 것은 조선전쟁에서 당시 조선인민군의 종군기자였던 조선의 유명한 시인 조기천선생을 만난 후부터였습니다.

그후부터 그는 행군도중에 짬짬이 시를 지어 메모해 두었고 행군을 하면서 시를 쓰다가 천길벼랑에 굴러떨어질번도 했습니다. 가렬처절한 전투의 나날에 그는 한시도 시창작을 잊은적 없었고 다른 사람들은 될수록 가벼운 행장으로 행군했지만 김철선생의 배낭만은 언제나 책이 불룩했습니다. 당시 출판같은 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라 시인은 그것들을 누런 포장지같은 종이에 깨알같이 메모하여 자작시집으로 묶어 두었고, 전선에서 돌아올 때에는 이런 자작시집이 3권이나 되였다고 합니다. 

정열에 불타는 시인

조선전쟁이 끝난후 21살에 난 애숭이 총각이였던 김철선생은 지금의 <연변일보> 전신인 <동북조선인민보> 기자로 배치받은 후 10여년간 문필활동에서 다각적인 재질을 나타냈습니다. 문단에서 그의 첫 작품은 시가 아니라 소설이였습니다. 그는 소설 <낟가리>로 두각을 내밀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당시 새로 개척한 풍자체의 신문비평문장인 <펠레톤>과 신문보고문학인 <오체르크>, <통신문> 등에서도 출중한 재질을 발휘하면서 사회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음향]

"사실 제가 제일 처음에 쓴 작품은 시가 아니라 소설이였습니다. 기자생활을 할 때는 보고문학, 신문통신, 평론도 많이 썼지만 문학에서 제일 알맹이가 시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시를 놓지 않고 시농사만 짓고 있어요. "

1953년, 서정시 <지경돌>이 신춘문예시상식에서 1등상에 입선되면서 김철선생은 자신이 시에 더 재능이 있음을 보아내고 과외시간을 이용해 시창작을 꾸준히 견지해왔습니다.

[음향]

"저는 젊어서 연변일보 기자생활을 할때도 몹시 바빴고 작가협회에 와서도 몹시 바빴는데 그렇게 바쁜 사이에도 짬짬히 틈만 있으면 시를 썼어요. 저에게는 일요일이나 명절도 없었고 아침에 출근하면서도 시를 구상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큰 거리를 지나기 싫어해요. 아는 사람을 만나서 인사를 하다보면 구상이 깨지니까 일부러 골목을 찾아다녔고, 기자생활을 할때 농촌에 취재를 많이 갔는데 웬만히 먼 거리가 아니면 차를 안타고 걸어다니면서 구상을 하고 구상을 하고는 적고, 그래서 저는 한평생 시를 떠나서는 못사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가 한창 문단에서 재능을 발휘하고 있을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수정주의분자>, <잡귀신>으로 몰려 5년동안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감옥살이는 고달프기 그지 없었지만 김철선생은 더없이 좋은 창작시간으로 간주하고 언제부터 쓰려고 구상하고 있던 장편서사시를 본격적으로 창작했습니다. 감옥에서는 처음에는 반동죄행을 교대하라고 날마다 종이와 필을 주군 했는데 김철선생이 반동죄행을 교대하는 기미가 없자 후에는 종이도 주지 않았습니다. 장편서사시인지라 줄거리는 머리속에 넣어두면 되지만 구체적인 시구들은 다 기억해내는 수가 없어 김철선생은 아침마다 화장지로 쓰라고 나눠준 손바닥만한 위생지를 아껴 절반은 시구들을 적어놓았습니다. 그렇게 창작된 시가 바로 장편서사시 <동틀무렵>이였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그의 창작은 새로운 고봉에로 톺아올랐습니다. 김철선생은 젊은 시절의 낭만주의 시인으로부터 냉담한 현실주의 자로 탈바꿈해 모든 사물을 철리적으로 사색하고 관찰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시도 세계의 조류에 맞춰 명석하고 냉철한 철리시로 탈바꿈했습니다. 서정시집 <김철시선>과 <나, 진짜 바보이고 싶다>가 바로 김철선생의 시문학 창작이 고도와 심도에서 비약적인 변화를 가져온 대표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1953년에 서정시 <지경돌>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김철선생은 불같은 열정으로 <변강의 마음>, <동풍만리>(1958), <산향길>(1979), <내 고향의 금물결>(1979), <태양에로 가는 길>(1983), <가야금집>(한문, 1983), <인간세상>(1985), <뻐꾸기는 철없이 운다>, <황혼의 로맨스>(2007), <휴전선은 말이 없다>(2007) 등 40여권의 시집을 출간해 원명보다는 김철이라는 이름으로, 명실공히 다산작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시창작 50여년간 김철선생이 국내외에 발표한 시와 평론, 보고문학, 수필, 칼럼, 가사, 에세이…. 등을 합치면 무려 수만편이 됩니다. 하여 그의 작품은 중국 소수민족지역에서뿐만아니라 국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는 선후로 제6차 세계청년예술축전의 대상(1956년, 모스크바)을 수여받았고 제2회 한국해외문학상, 세계민족문학상(미국), 세계문화명인성취상, 중국소수민족문학상, 세계계관시인상 등 국내외 대상들을 다수 수상했으며 그의 사적은 <세계명인록>, <문학백과사전>, <중국문예가사전>, <세계우수인재대권>, <세계중국인우수문학예술계 명인록>, <중화백년인물사전> 등 많은 사전과 명인전집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얼마전 김철선생은 또 세계학술심의회의 최고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수여받은 국내외 대상만해도 43개가 된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수치가 아닐수 없습니다. 하지만 김철선생은 이 많은 상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하나의 편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음향]

"제일 큰 상이 국제상이니까 그게(세계학술심의회의 최고공로상) 아마 제일 크고, 소중합니다만… 한국해외문학상도 한국문인협회에서 주는 상인데, 전 중국에 한사람밖에 없어요, 미국에 하나 중국에 하나, 러시아에 하나, 그래서 그것도 아주 소중한 상이고. 그외에 소수민족작가 특수공헌자상, 그것도 제가 알기로는 전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가운데서 몽골족작가 마라친부하고 저 두사람이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모두다 소중한데, 저는 사실 그렇습니다. 뭐 제가 좋은 작품을 많이 써서 공로가 많아서라기보다 그걸 하나의 편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

1983년에 베이징에 전근해 중국의 4대 간행물의 하나인 <민족문학>월간지 부주필과 주필을 역임하는 기간과 중국민족작가협회 상임 부회장으로 재직한 기간 김철선생은 자신의 시창작을 열심히 견지했을뿐아니라 중국 소수민족 작가대오 양성과 소수민족간부 대오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여왔습니다. 당시 많은 소수민족지역들에 작가군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55개 소수민족의 작가들을 양성해 소수민족의 문학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김철선생은 신강, 내몽골, 운남, 산동, 연변, 통화 등지에서 여러차례 창작 문필회를 조직하였고, 베이징에서 전국소수민족작가회의를 성공적으로 소집하기도 했습니다. 뿐만아니라 베이징에서 전국소수민족문학학원을 꾸려 여러민족 문학신인들을 많이 양성해냈는데 그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여러민족 문학신인들은 지금 여러 소수민족지역에서 문학중견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중국 각지에 소수민족 작가대오가 이미 형성되고 소수민족작가들의 수준이 많이 제고되었으며 민족문학작품들의 발전이 빠르지만 김철선생은 향후 소수민족문학의 발전에 대해 낙관과 함께 바람을 표시했습니다.

[음향]

"사실 반세기가 넘도록 시창작은 많이 발전을 했습니다. 그동안 극좌노선으로 인해 오래동안 영향도 많이 받았지만 특히 문화대혁명 이후 젊은 세대들이 기발한 시들을 많이 쓰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좀 더 요구를 높인다면 오늘의 국제적인 사조에 맞춰서 한단계 더 높여 좀 더 철리적인, 철학적인 무게가 담긴 시들이 많이 나와야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앞으로 정부에 대한 희망이라면 소수민족작가대오를 양성하고 소수민족 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재정지원이 필수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수민족작가대오를 양성하는 기관, 작가양성반도 꾸려서 어렵고 뒤떨어진 소 소수민족들의 문학발전을 위해서 국가적인 특수한 배려가 우선적으로 낙실되어야한다고 봅니다." 

활발한 대외 활동가

김철시인은 중국의 조선족들 중에서 일찌기 베이징에 진출한 한 사람입니다. 하여 그의 뒤로 베이징에 진출한 많은 조선족들이 시인이 베이징에 온지 오래된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찾아와 도움을 청할 때에도 그는 지원의 손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뭉치면 힘이 된다'는 도리를 깨달은 김철선생은 기업인들을 모아 기업협회를 꾸려 조선족들이 사업하는데 힘이 될수 있는 베이징 조선족기업가협회 고려경제문화연구회를 설립했고 현재에도 이 협회 회장직을 담임하고 있습니다. 이 협회는 조선족기업인들을 위해 베이징대학과 연합해 <최고경영자과정연수반>을 조직했으며 일본, 한국, 미국 등 여러 나라에 기업고찰단을 파견해 외국의 선진경영경험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각종 학술세미나와 예술공연, 경축행사 등을 다양하게 펼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김철시인은 현재 해외무역협회(OKTA) 부회장, 국제GCS중국본부 총재직 등 다양한 직무를 담임하면서 문화분야뿐 아니라 경제분야에서도 국내외적으로 적극 활약하고 있습니다. 특히 김철시인은 한조 양국 정상의 접견과 선물을 받는 등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음향]

"저는 사실 대단한 인물은 아닙니다만, 한국의 근대 대통령들을 거의 만나봤어요. 노태우 대통령 시절과 김영삼, 노무현 등 대통령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고, 작년에는 한국의 건국 60주년입니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대표적인 사람들을 한분씩 청해서.. 미국에 한분, 러시아에 한분, … 이명박 대통령의 명예위원이라는 위촉장을 주더라구요, 중국을 대표해서 제가 한사람 갔습니다. 그래서 참 아주 감개무량하고 고맙고, 또 조선에 가서 김정일 동지 모교를 방문했을때 김정일 동지의 선물-평양술 두병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남과 북, 그 어떤 정치적인 편견도 없이 우리 민족이 다 화합이 돼서 통일이 됐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바람으로 아무 편견없이 정상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

반백년넘게 시창작을 숙명으로 여겨온 김철시인은 오늘도 열심히 시창작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기쁨과 슬픔, 환락과 고통, 신심과 곤혹들을 정열적이고 순박하고 우아한 시구에 담아 우리들에게 재현시킨 김철선생, 인생의 황혼길에 접어든 시인이지만 지칠줄 모르는 마라톤선수처럼 오늘도 인생의 길에서 힘차게 달리고 있습니다.

[음향]

"우리 속담에 '갈수록 심산이다'는 말이 있는데, 젊었을 때는 다산 작가라고 시를 많이 썼어요, 그때는 막 썼는데 지금은 점점 더 어려워져요. 자신을 초월하는 시들을 내놓으려니 참 힘들어요."

한평생 김철선생과 고락을 함께 해오면서 내조를 해온 김철시인의 부인--방채봉여사는 김철시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합니다.

[음향]

"저분은 집에서 밥을 잡숫다가도 책상머리에 와서 쓰구, 거리에 갔다가도 시가 생각나면 그 자리에서 쓰고 해서 모르는 분들은 정신병환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제가 첫 독자니까 평가가 옳은지는 몰라도 첫 평가는 합니다. 50여년간 같이 살았으니까 저분의 시는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저는 '고향무정'이 아주 짧지만 아주 째여진 시여서 좋아합니다. "

김철시인이 아끼는 시 한수를 보내드리면서 김철시인에 대한 소개는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음향, 김철시인의 시 "고향무정"]

<고향무정>

손에 가시가 들어

다치면 아프다

고향,

넌 내 가시든 살점.


김철 약력:

 

1932년 8월 6일, 일본 시모네세끼에서 출생1932년 일본 시모노세끼 출생.

1950년 중국인민지원군에 참군, 군 예술단에서 무용배우, 안무가로 활약.

1953년 <동북조선인민보> 기자, 문단 데뷔(데뷔작: 시 <지경돌>).

1958년 중화청년연합회 위원, 길림성 상무위원, 연변청년연합회 주석.

1963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부주석 겸 사무국장, , 연변주석 등 역임.

1965년 문화대혁명 중 5년간 옥살이.

1970년 무죄석방후 <연변문예>편집부에 복직.

1982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주석, 길림성분회 부주석,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 주석, 연변조선족자치주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1983년 중국작가협회로 전근, 중국작가협회 <민족문학>월간지 주필.

1989년 중국민족작가협회 상임 부회장.

1990년 세계문화교류협회 중국본부 사무총장, 중국기업가문화촉진회 북경고려경제문화연구회 회장.

1991년 북경 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아시아 문화교류협회 총고문.

1999년 국제GCS 중국본부 총재, 해외무역협회(OKTA)부회장, 중국본부 회장.

현재 세계문화교류협회 중국본부 총재, 세계해외무역협회 부회장 겸 중국 회장, 중국문화경제촉진회 KOREA문화경제연구회 회장.  

중국국제방송 2009.4.12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예술정품창작에 집착하는 사나이 연변의 소품무대에서 연극계의 원로이신 리영근선생님은 김문혁과 함께 《렬사증문제》에  출연하여 뛰여난 연기력을 자랑하고 최인호와 김정자는 《첫날이불》로 장끼를 보여주었으며 한석봉과 원용란은 《계약서》로 무대인생의 전성기를 장식하고 리동훈과 오선옥은 《우장거리》 등...
  • 2009-04-02
  • 민족창법과 통속창법의 조화를 위해―연변가무단 김선희가수의 이야기우리 민족의 전통민요며 판소리는 물론 통속가요도 잘 불러 중국조선족청년가수들가운데서 전도유망한 인기가수의 한사람으로 각광받고있는 연변가무단의 김선희가수가 소띠해의 행복한 엄마로 되였다. 지난 2월 12일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2009년도 《3...
  • 2009-04-01
  • 독자들은 연변TV 2008년 음력설야회에서 선을 보인 소품 《선물》을 기억하고있나요? 아들, 며느리와 함께 지내면서도 시집간 딸자식만 생각하는 속좁은 시어머니, 정월 초하루날 아침부터 《솟았네 솟았네》라고 노래를 부르며 밤늦게 귀가한 며느리를 들볶는 시어머니의 형상은 어찌나 진실감이 나는지 많은 시청자들에게...
  • 2009-03-31
  • 무순 조선족사회의 코기러기 고 무순시조경협 리사장 박수빈선생을 추모하여 2009년 3월 22일, 장장 36년간(교육사업 39년) 무순시조선족제1중학교에서 사업하다가 퇴직한후 무순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의 사령탑을 맡아 10년을 숨가쁘게 일해온 박수빈선생이 70세를 일기로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그의 서거로 무순시 ...
  • 2009-03-30
  • 딸과 함께 부르는 사랑의 메아리 연변TV 뉴스종합채널에서 올해 정월 초하루날 저녁에 방송한 2008년 음력설야회에서 연변가무단의 저명한 남저음독창가수 림성호선생이 딸 림경진가수와 함께 부른 노래 《하고싶은 말》이 시청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쥐면 부서질가 불면 날아갈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 2009-03-30
  • 꿈이 있는 곳에 신화가 있다 상해동진(上海東進)10년,김원준사장 상해에서 (조선족인물열전)을 준비하며 제일 먼저 떠올렸던 기업인은 당연히 동진그룹의 김원준사장이었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추천하는 사람이 많았고, 평판도 한결같이 좋았던 김원준사장이다. 전화로 인터뷰의 취지 등을 꼼꼼히 설명하고, 서...
  • 2009-03-29
  • 소시적 그에겐 야무진 꿈도 있었고 사업에서 그에겐 드높은 열정도 있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보따리는 그의 꿈도 열정도 무시한채 그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싸우도록 핍박했고 결국 그는 예술의 무대에서 주렁진 이야기를 엮어가게 되였다. 꿈을 쫓는 젊은이 1965년 7월 20일 안도현 명월진 홍기가의 한 로동자가정에서 태...
  • 2009-03-27
  •   "야망의 바다"와 저자 김장혁씨를 노크하다 김장혁작가가 조선족문단의 첫 장편과학환상소설로 알려진  "야망의 바다"(이하 "야망"으로 략칭)를  펴내  우리 문단에 과학환상소설의 무한한 발전가능성을 재차 시사해주었다.TV애니메이션 "트...
  • 2009-03-27
  • 한글발전 유공자 류은종 교수 최근 월수외대에서 과학연구 특수공헌상 수상 절강 월수대학교의 류은종 교수는 조선민족의 문화창달과 한중문화교류, 중국에서의 한국어교육과 보급에 전력을 다 하여 중국에서 우리말 위상을 높이는데 공로자의 한사람으로 활약을 떨치고 있다. 류은종교수는 일찍 ...
  • 2009-03-26
  •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은 유럽 통합 제안보다 35년이나 앞섰습니다.”중국 다롄(大連)시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로 구성된 ‘안중근연구회’를 이끄는 박룡근(58·사진) 회장은 “동북아 평화와 공동체 정신은 지금도 유효한 안 의사의 대표 사상”이라고 말했다.2000년에 출범한...
  • 2009-03-2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