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수의 히트곡을 만들어낸 대중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작곡가 고창모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모든것이 운명적이였다. 음악의 길을 선택하게 된것도, 사랑하는 안해를 만나게 된것도, 연변에서 작곡생활을 하게 된것도…
청춘을 문화대혁명이란 특별한 시대에 보내게 되여 조금은 힘들었지만 그는 결코 불행하지만은 않았다. 노력하는자에게 길이 따른다고 하냥 생활에 충실하였던 그에게 운명은 가끔 좋은 기회를 주었고 지혜로왔던 그는 한번도 기회를 놓친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날 사업의 성과도 행복한 가정도 움켜쥘수 있었다.
운명적인 길 음악
고창모가 작곡의 길을 걷게 된것은 아주 운명적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음악에 대해 접촉한것은 아주 어려서부터였다. 한때 쏘련 해삼위의 한 가무단에서 바이올린수로 계셨던 아버지께서 바이올린을 잘 켰던것이다. 아버지의 구수한 바이올린소리를 많이 들으면서 자란 고창모는 음악에 대한 리해가 남달랐다. 중학시절에 이미 클라리넷이나 드럼벳을 능란하게 다루었고 중학교때는 이미 자체로 작곡할수 있었다. 이렇게 작곡에 뛰여난 재주가 있음에도 그는 종래로 작곡가로 되고싶다는 생각을 가진적이 없었다.
흑룡강성 계동현에서 태여난 고창모는 3살나던 해 아버지를 따라 밀산으로 이사를 하였다. 밀산에서 소학교, 중학교를 마친 그는 문화혁명이 일어나는 바람에 고중 1학년을 마치고 부득이 학교를 그만둘수밖에 없었다.
18살되던 해 고창모는 밀산동전소학교에 음악교원으로 들어갔다. 당시는 크고작은 범위의 문예공연이 아주 잦았다. 그때로부터 그의 음악창작은 시작되였다. 그는 문예공연에 참가할 때마다 직접 곡을 써서 손수 련습까지 시켰다. 제일 인기가 좋았던것은 본보기극을 우리말로 만들어서 표현한것이였다. 그래서 공연에 참가할 때마다 1등은 찍어놓은 당상이였다. 사업에서 성과는 있었지만 민영교원이라는것이 늘 마음에 걸렸던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1973년에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고창모는 고시준비를 하였다. 학생시절에 수학을 특별히 잘했던 그는 수학전업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한때 쏘련에서 사업했던 아버지때문에 “정치문제”에 걸려 시험자격을 가질수 없었다. 한참 고민하고있을 때 그는 음악, 미술, 체육 등 특장반은 “정치문제”를 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었다. 워낙 음악에 재질이 있었던 그는 인차 할빈사범대학 예술계 작곡전업에 지원하였다. 이미 7년이나 초생이 없었던 탓에 시험치려는 학생이 엄청 많았다. 밀산에서만 4000여명이 작곡반에 지원하였다. 이미 어느정도 작곡에 물이 올랐던 그는 나흘간의 시험을 거쳐 결국 4000 : 1이라는 엄청난 비례를 뚫고 밀산에서 유일하게 할빈사범대학에 입학하였다.
작곡가로 되겠다는 꿈을 가진적이 없었던 고창모였지만 음악에 뛰여난 재주를 가진 그가 아까와서인지 운명은 그에게 음악의 길을 내주었던것이다.
운명적인 만남 동반자
할빈사범대학에 입학한 그는 그제야 정규적으로 작곡을 배우게 되였다. 그때는 주로 한족음악을 창작하였다. 전 학급에서 그는 유일한 조선족이였다. 흑룡강성이라지만 400여호되는 조선족마을에서 자랐던 그는 한어말수준이 아주 낮았다. 그럼에도 그의 작곡수준은 그 누구보다도 뾰족하였다.
꿈은 아니였지만 한시도 멀어져본적 없는 음악이였기에 그의 대학생활은 활기에 차넘쳤다. 대학에서 여러가지 활동이 많았는데 한어말이 차해서 애먹는 그에게 유독 언어가 잘 통하는 처녀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그의 인생의 동반자 김명옥이였다.
당시 성악학부를 다닌 김명옥은 룡정에서 태여났지만 매하구에서 학생시절을 보내고 내몽골에서 일하다가 역시 수천명을 제치고 성악학부의 유일한 조선족으로 입학하였다. 학교행사때마다 만나면 둘만 조선족인지라 가족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던 두 사람은 자연히 련인사이으로 발전하였다. 한사람은 작곡, 한사람은 성악, 천생연분이 아닐수 없었다. 이렇게 운명은 그에게 천사같은 동반자를 만나게 해주었다.
졸업후 고창모는 밀산예술단(한족예술단임)의 창작 겸 악대지휘로 배치받았고 김명옥은 몽골사범학교 성악교원으로 배치받았다. 그래서 두 사람은 3년간 견우직녀생활을 해왔다. 후에 밀산예술단에서 김명옥을 성악배우로 초빙하려 하였지만 그렇게 되면 두 사람 다 공연다니게 되여 불편함이 많았다. 결과 김명옥은 1977년도에 밀산조선족중학교의 화학교원으로 전근하고 결혼식을 올려 행복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1979년에 오상사범학교에서 음악반을 꾸리게 되자 그들부부를 교원으로 초빙하였다. 정식으로 가사에 작곡하여 발표하게 된것은 이때로부터였다. 가히 처녀작이라고 말할수 있는 노래 《언약》은 그들부부의 합작품이였다. 안해가 작사하고 그가 작곡한 노래 《언약》은 농망기인 벼모철 공부하러 떠나는 총각이 자기를 바래주는 처녀에게 하는 약속으로 당시 사회를 잘 반영한 노래였다. 이 노래는 1980년 흑룡강조선말방송에서 첫방송되였는데 지금도 중앙방송에서 가끔 방송된다.
이외에도 안해와의 합작곡이 여러수 있는데 그중에서 《달님은 내 사랑》은 흑룡강조선말방송의 “내가 즐기는 노래”에 선정되기도 했다.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맺어진 부부이면서도 손발을 맞추어 일할수 있는 환상의 동반자이기도 했다.
운명적인 선택 연변
무슨 일에서든지 긍정적인 사유를 가지고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는 고창모는 또 한번 운명적인 선택을 하였다.
하루는 안해가 그에게 “우리도 조선족인데 조선족들이 사는 연변에 가서 살가요?”하고 제의하였다. 사실 그때까지 한번도 연변에 와본적도 없는 고창모였지만 단연히 안해의 의사를 존중해주기로 결정하였다. 마침 연길시문화관 창작조에 사람이 필요해서 우선은 거기로 전근하게 되였다.
원래 생활이 곤난했던 고창모는 이사라지만 별로 갖고올것도 없었다. 홀몸에 아들 둘, 처와 장모까지 다섯식구가 무작정 연길행기차에 몸을 실었다. 조금은 허전한 마음도 있었지만 돈화까지 오자 기분이 묘하게 좋아졌다. 글쎄 기차에 조선족들이 많아졌고 또 방송도 조선말로 하는것이였다. 비록 어느 역에 도착했다고 알리는 간단한 몇마디였지만 그렇게 친근할수가 없었다. 가슴이 훈훈해났다. 때는 1981년 11월 7일이였다.
운명적인 기회 방송국
1984년 연변방송국 음악부 음악편집으로 있던 김용무(현재 예술학원 교원임)는 음악부 주임인 동희철작곡가에게 고창모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다. 그가 작곡한 노래 《언약》을 들은적 있었던 동희철주임은 그를 만나보고 아주 만족해하면서 음악부에 받아들였다.
음악부에 전근한 고창모에게 새로운 창작의 길이 활짝 열렸다. 유명한 시인 석화가 두달전에 가사편집으로 전근하였던것이다. 그때로부터 두 사람이 손잡은 노래가 샘솟듯 출시되였고 그중에서 많은 노래가 연변인민들의 애창곡으로 불리웠다. 가수 김경자가 부른 《돌다리》, 가수 김응과 리정숙이 부른 《사랑은 영원히》, 가수 리철혁이 부른 《어머니 계신 고향》, 가수 김응이 부른 《누나생각》 등이 그때 지은 노래들이였다.
1987년 고창모는 연변TV방송국 문예부 부주임으로 임명되였는데 그해에 창작한 《월극과 경음악》은 전국창작 1등상을 수상하였고 그 이듬해 작곡한 유명한 노래 《두만강》(강홍수 작사)은 현재까지도 연변TV방송의 개시곡으로 방송되고있다.
그뒤 연변TV방송국 문예부 주임직을 맡고 사업하면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만 고집하지 않고 아주 공정하게 타인의 노래도 많이 방송하여 보급하였다. 하여 그때 《타향의 달밤》, 《타향의 봄》, 《교정의 종소리》, 《별과 꽃과 선생님》, 《무지개인생》 등 많은 연변노래들이 류행되였다.
이를 두고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회장이며 연변음악가협회 주석이며 원 연변가무단 단장, 현 연변가무단 명예단장인 박서성작곡가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고창모선생은 1989년후 연변음악예술에서 공로가 큰 사람이다. 또한 연변TV음악 창시인중의 한사람으로서 연변음악을 한층 높은 예술차원으로 오르게 한 아주 공정한 사람이다. 자기 작품만 고집하지 않고 타인의 우수한 작품을 보면 긍정해주고 같이 흥분해하며 많이 방송하여 대중들속에서 널리 보급되게 하였다. 음악편집으로서 자기 개인을 생각하지 않고 우리 민족음악을 위하는 첫사람으로 꼽고싶다.”
고창모와는 개인적으로 면목을 안지 오래됐다는 박서성은 “같은 음악인으로 볼 때 일을 잘할뿐만아니라 솜씨가 잽싸다”고 말하고나서 “사람이 털털해서 부탁을 잘 들어준다”며 “다른 사람의 작곡부탁도 그렇고 연변가무단의 창작극, 무용극 등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밝혔다.
영원한 음악인
연변TV방송국에서 내부퇴직하면서 고창모가 하고싶은 일은 이미 작곡한 노래들을 정리해서 작곡집을 내는것이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몇년 되도록 아직 시작도 못하고있다. 손댈 짬이 없었다. 북경조선족모임의 크고작은 행사의 문예공연에 참가하는 한편 조직해주어야 했고 각 소수민족축제에 참가할 곡도 써야 했으며 가끔은 연변가무단의 창작극이나 가무극도 도와주어야 했다. 요즘은 중앙방송국의 건국 60돐 경축 다큐멘터리 《영원한 기념비》의 프로기획과 예술지도로 바삐 보내고있다.
고창모는 “지나온 작품들을 다듬고 총화하고싶지만 언제까지 미룰지 모르겠다. 후년까지 일정이 꽉 잡혔다”며 “그래도 언젠가는 좋은 작곡집을 낼것”이라고 밝혔다.
이렇게 늘 바삐 보낸 인생이기에 가족에게 많은 시간을 주지 못한 아버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두 아들은 부모로부터 유전을 받아 음악에 재주가 있음에도 아버지의 기대와는 달리 음악을 선택하지 않았다. 특히 작은아들은 피아노연주가 뛰여날뿐만아니라 작곡도 아주 잘하여 고창모가 상해음악학원에 시험치라고 권고하였지만 대련에 있는 동북재정학원 금융학부를 다녔다. 큰아들은 연변대학 건축학부를 졸업하고 지금은 한국 MBC북경지사 촬영기자로 활약하고있다.
우리 민족예술문화를 위해 수십년 헌신해온 고창모는 연변음악에 대해 “예술의 고향으로 불리웠지만 지금은 중국을 상대로 보면 많이 떨어졌다”고 밝히고나서 “우리 민족의 고유음악과 연변의 원초적인 특점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연변특색을 살리는 면에서 차하다. 또한 보급이 제대로 되지 못하고있다. 이것이 근년에 좋은 연변노래가 나오지 못하는 주요원인이 아닌가싶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또 연변음악의 앞으로의 발전에 대해 “제일 관건은 TV에 의거해야 한다. 음악프로(“가요무대”)를 개설하고 우리 노래를 많이 방송하여 모든게 거기서부터 선전되고 보급되여야 한다”고 밝혔다.
음악을 해야만 했던 운명적인 음악인 고창모, 아직도 민족음악을 위해 왕성한 활동을 펼쳐나가는 그가 앞으로 좋은 곡을 만들어내고 훌륭한 작곡집을 출시하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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