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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강 - 꿈 많은 순정파 가수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5월30일 21시10분    조회:7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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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파가수 변강 언제나 꿈이 많은 남자


한평생 불러도 부르고싶은 어머니 
모진 풍랑 헤가르고 살아오신 어머니

...

5 30일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어머님께 드리는 노래》를 준비한 변강의 얼굴에 애잔한 심정이 가득 비껴있다. 어머님께 불러드리고싶은 노래였는데, 반드시 어머님 생전에 불러드리고싶은 노래였는데 어머님은 아들에게 애절한 마음만 남겨둔채 근 한달전인 지난 5 2일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래서 이 노래에 더욱 절절한 감정이 북받힌다.

변강ㅡ요즘 연변가요계에서 새롭게 자신의 시대를 풍미해가고있는 가수로서 그는 지금까지 《그런 녀자 좋아》, 《내 남자 내 녀자》, 《당신》, 《사나이의 눈물》 등 40여수의 노래를 불러 인기절정을 과시하고있다.

“이 자식 키우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님께 어머님노래를 불러 기쁘게 해드리고싶었는데 어머님 생전에 불러드리지 못하고 이제야 부르게 된게 너무너무 가슴이 쓰리다”며 말끝을 흐리는 변강가수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어머님께 드리는 노래》가 너무 늦게 만들어진게 진한 아쉬움으로 남는 순간이였다. 하다면 변강은 어떤 사람인가? 오늘날 전성기를 맞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과연 어떠했을가? 적등황록같은 그의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고난속에서 키운 가수꿈

1968 8 18, 길림성 류화현 삼원포향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변강은 삼원포소학교에 이어 류화현1중에서 중학공부까지 마치고 16살 어린 나이때 힘든 농사일에 몸을 던졌다. 가난한 시골살림이라 어렸을 때부터 옷도 형님들의 퇴물림을 입으며 자란 그는 노닥노닥 기운 옷을 입고서도 창피한줄 몰랐다. 여린 몸으로 농사일하는 여가에 그는 벽돌공장일, 돌싣기, 모래싣기 등 고된 일을 하면서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모지름을 썼다. 특히 한푼이라도 더 벌려는 욕심에 4명이 하는 모래싣기를 2명이 하면서 애면글면하던 나날에 그는 가끔 장알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보고 언제면 가난과 리별할수 있겠는지 막연한 생각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든 나날에도 그에게는 어려서부터 간직한 꿈이 있었다. 바로 가수가 되려는것이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노래를 좋아했던 그는 아버지를 졸라 기타를 사가지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힘든 순간이든 짬만 있으면 여섯줄 선률에 푹 빠지군 했다. 또 어려운 살림에도 막내아들의 소망을 이뤄주기 위해 아버지가 림산작업소에 품팔이를 갔다가 사다준 소형록음기가 노래공부를 하는데 둘도 없는 친구로 되였다. 그런 꿈이 있었기에 변강은 아무리 힘든 고생도 달갑게 이겨나갈수 있었다.

소형록음기로 향항가수 장명민의 노래를 즐겨듣고 기타치며 그 노래를 련습해온 변강은 차츰 각종 노래콩클에 참가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결국 기회로 되는 행운을 맞이했다. 변강이 17살나던 해 즉 1984년에 통화지구통속가요콩클이 있었다. 당시 장명민의 노래 《대지(大地)》를 불러 류화현 1등의 신분으로 통화지구통속가요콩클 결승단계에 진출한 그는 단연 2등의 영예를 따내며 진가를 발휘해 예술단체들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바로 그해 가을 한창 논밭에서 벼가을을 하고있을 때 삼원포문화관의 손주임이 찾아왔다. 사연인즉 류화현려극단(   : 려극은 산동성 지방극의 하나)에서 데리러 왔으니 얼른 가자는것이였다. 순간 변강은 목이 꺽 메였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드디여 소망을 이루게 된것이였다. 꿈의 무대에서 자기가 즐기는 노래를 마음껏 부를수 있게 된것을 어찌 그저 기쁘다는 한마디로만 표현할수 있으랴. 손에 쥐였던 낫을 내던지고 신바람나게 뛰여가던 17살 소년시절을 되새기며 변강은 시무룩한 미소를 피워올렸다.

평탄치 않은 가수의 길

가수가 되였다고 해서 누구나 다 팔자를 고친것은 아니였다. 변강이 그랬다. 처음 가수로 무대에 나섰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린적도 있었다. 당시 관중들에게는 처음 무대에 나서서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는 애숭이가수의 노래가 즐거울수 없었다. 일부 무지막지한 관중들은 변강이 무대에 나서기 바쁘게 “당장 물러가라”고 소리치기도 했는데 그때 무대뒤로 물러간 변강은 쏟아지는 눈물을 걷잡을수 없었다. 관중들 앞에서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싶었는데, 다른 가수들처럼 관중들의 신나는 박수도 받고싶었는데 결국 명가수들의 그늘에 가려진 애숭이가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찌 그대로 물러서랴. 눈물을 씻고 일어선 변강은 순간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두고보자. 내 꼭 열심히 노래를 배워 다른 가수들보다 더 많은 박수를 받을것이다.) 이렇게 마음먹은 그는 그후부터 공연여가에 로배우들에게서 열심히 지도를 받는 한편 전국3등상을 받은적이 있는 길림시조선족군중예술관의 벨칸토가수 김금자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한달가량 기량을 닦았다. 결과 처음 몇달간은 공연때마다 긴장하던것이 차츰 익숙해지고 관중들의 박수까지 받게 되면서 기분좋게 노래를 부를수 있게 되였다.

무대에서 자신감을 얻게 되자 변강은 보다 큰 무대에서 장끼를 펼쳐보고싶었다. 그래서 선택한것이 화전시가무단이였다. 류화현려극단에서 활약한지 3년 반이 되던 1988년에 그는 무작정 화전시로 발길을 옮겼다. 헌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가 화전시에 도착하니 이미 화전시가무단은 외지로 순회공연을 떠난 상황이였다. 다행히 이틀후면 돌아온다길래 그냥 기다리기로 했는데 맹랑하게도 그때 그의 호주머니에는 단돈 2원밖에 없었다.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렴치불구하고 찾은 사람이 바로 예전에 딱 한번 다른 사람의 소개로 만나 풋면목이나 있는 사람이였다. 기타를 저당잡힐테니 30원만 꿔달라고 목구멍에서 맴돌기만 하던 말을 겨우 끄집어내자 그 사람은 흔쾌히 30원을 꺼내주며 밥까지 사주는것이였다. 그때 그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수 있을가? 이미 20여년세월이 흐른 지금도 변강은 그때 그 고마운 사람을 잊지 못하고있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의 도움으로 이틀간 려관에 묵으면서 화전시가무단이 돌아오기를 기다린 변강은 마침내 예술단 단장을 만나 시험을 보게 되였다. 시험을 보나마나 노래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작은 백양나무》와 《어제밤의 별》을 불러 당장에서 합격되였다. 그때로부터 그의 가수생애에 탄탄대로가 열렸다고 할가. 그후부터 그는 국내에서 명성이 뜨르르한 장대위, 동문화, 서량, 조본산 등과 함께 한무대에서 공연하며 줄곧 3년간 북으로는 흑룡강성, 남으로는 호남성 소산 등 국내 각지를 주름잡았다. 3년간을 기회로 간주한 변강은 공연여가에 장대위, 동문화 등 명가수들에게서 창법을 배우는데 게을리하지 않았고 결과 그의 노래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제고되였다.

하지만 그때 그가 부른 노래는 모두 선배가수들이 부른 중국가요였다. 차츰 실력을 인정받을수 있는 정도에 이르자 그는 자기만의 노래를 부르고싶었고 특히 조선말로 된 노래를 부르고싶었다. 그래서 고민끝에 1992년도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대담히 버리고 단돈 30원을 호주머니에 넣은채 무작정 연길로 향발, 전에 사귀였던 친구의 10평방짜리 불때는 온돌세집에 얹혀살며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당시는 연길에서 나이트클럽들이 한창 흥기할 때라 그의 노래실력으로는 얼마든지 먹고 살만한 일자리를 구할수 있었다. 그렇게 연길에 발을 붙이고 려도대세계, 황가, 웨나스 등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며 밤무대에서 목청을 뽐냈는데 많을 때는 하루저녁에 일곱곳에까지 다니며 노래를 부르다보니 세집에 들어설 때면 녹초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이튿날 낮에 세집주인이나 이웃들에서 출근하기를 기다려 조용할 때 부지런히 조선말가요를 련습했다. 필경 중국가요만으로 무대에서 활약해왔던 그에게 조선말가요는 그만큼 익숙하지 못했던것이다. 후에 그의 노래실력을 알고 고 장귀순가수가 나서서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주선해줄 의향을 내비쳤지만 자유분방한 생활에 습관된 그는 단마디로 사절했다.

사랑의 보금자리

그 이듬해 즉 1993년도에 변강이 한창 연길의 밤무대에서 인기를 끌고있을 때 평생을 함께할 사랑도 찾아왔다. 친구들 모임에서 만난 녀자로 당시 백화청사에 출근하고있는 변강보다 세살 어린 황영희라는 처녀였다. 첫만남에서부터 서로 호감을 느낀 그들은 그후 서로 교제하는 과정에서 차츰 사랑을 싹틔웠다. 하지만 농촌출신의 변강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황영희 부모들의 반대에 부딪칠줄이야. 결국 황영희가 나서서 “나와 같이 살 사람 내가 좋음 그만이 아닌가”고 부모들을 설득해서 동의를 얻어냈다. 련애하는 기간 황영희는 변강이 세집에 있는 점심시간이면 늘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밥이랑 빨래랑 해주고 가군 했다. 그처럼 참한 처녀를 만난것을 행복으로 여긴 변강 역시 그런 약혼녀를 더없이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밤무대에서 아글타글 번돈으로 온돌집 한채를 마련하고 1995년도에 결혼식까지 올린 변강이였지만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한 가정의 세대주인만큼 돈을 벌어야 했고 결국 그가 하는 일이란 밤무대에 나서는것이여서 늘 새벽녘에 들어오고 안해는 낮에 출근하다보니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언젠가 한번은 변강이 안해를 데리고 나이트클럽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는데 일곱곳이나 다니는 와중에 시간이 모자랄 때는 정신없이 뛰기도 하는것을 보며 안해가 “당신 돈버는 일도 참 쉽지 않다”고 감복하는 말을 듣고 리해해주는 안해의 마음씀씀이에 변강은 코마루가 찡해나기도 했다.

여느집 부부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부부라고 지금까지 15년을 함께 살면서 왜 싸울 때가 없었으랴만 매번의 싸움은 그냥 다툼으로 그치고만다. “언젠가 한번은 별로 같잖은 일로 심하게 다투고나서 너무도 분해 내가 집을 뛰쳐나간적이 있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 술을 마시는데 안해가 전화를 걸어왔더라구요. 그냥 전화를 안받고 술을 마시다가 새벽 서너시경에 들어갔는데 안해가 침대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있더군요. 딸애는 곁에서 자고. 나를 보고 안해가 ‘식사는 했는가? 내가 국을 끓여줄게’ 하면서 부산을 떠는걸 보니 스르르 분이 풀리더라구요.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집에 들어왔음 됐다면서 다시는 나가지 말라, 그리고 절대 다시는 리혼이라는 말 꺼내지 말아달라는 안해앞에서 슬그머니 미안한 감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사랑결실로 태여난 딸애 변신금은 현재 15, 연길시제8중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데 공부를 잘해 학급에서 늘 1등을 다툰다고 한다. 과외로 피아노학습을 하고있는 변신금은 노래도 잘 불러 학교에 활동이 있을 때면 고운 목청을 자랑하기도 하는데 변강은 “딸애가 노래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 앞으로 병원의 의사나 사법부문의 일군으로 됐으면 좋겠다”고 딸애에 대한 기대를 밝혔다.

아직도 꿈이 많은 남자

밤무대를 전전하면서도 그동안 가수활동을 활발히 벌려온 변강은 선후로 연변방송, 연변TV를 통해 《당신》, 《그런 녀자 좋아》, 《달이 뜨는 저녁》, 연변TV련속극 《샘》의 삽곡 《사나이의 눈물》 등 자기만의 노래 40여수를 불러 인기를 끈 가운데 지난해 7월에는 드디여 노력의 결실로 음반 《당신》을 출시했다. 현재 음반 《당신》은 기본상 다 판매된 상황이라 이제 오는 11월에는 DVD를 출시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미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프로에 5차나 참여한적이 있는 그는 5 30일 여섯번째로 나서서 《어머님께 드리는 노래》를 부르게 된다. 자식위해 한생을 헌신해오신 어머님께 진작부터 어머님을 노래하는 노래를 불러드리고싶었던 변강은 《어머님께 드리는 노래》가 너무 늦게 나온 까닭에 어머님 생전에 불러드리지 못했다며 “어머님께서 좀만 더 계셨더라도 아니, 한달만 더 계셨더라도 이 아들이 어머님께 불러올리는 어머님노래를 들으셨을텐데…” 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예전에 변강이 텔레비에 나올 때면 투병중에 운신도 어려운 상황에서 곁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 끝까지 아들이 노래부르는 모습을 보고 내내 웃으며 기뻐하시던 어머님이였기에 자식된 마음은 더욱 아픈것이였다.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변강은 “살펴보면 연변에도 중국가요나 한국가요 못지 않은 가요들이 많은데 그 가요들을 보급하는 경로가 부족한바 이는 텔레비를 비롯한 모든 매체와 예술인들이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일뿐만아니라 사회각계에서도 춤의 고향, 노래의 고향을 홍보하는 차원에서 적극 발벗고나서야 할일”이라면서 “래년쯤엔 순수하게 연변노래만 부르는 나이트클럽을 꾸려 연변노래보급에 조금이나마 기여하고싶다”고 밝혔다. 또 “연변에 노래 잘하는 애들이 많은데 양성체계가 따라가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라면서 “여건이 허락되면 나 혼자든지 몇몇이 힘을 합치든지 해서 후배양성에 힘을 기울이고싶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판소리를 배우고싶다며 앞으로 한국에 다녀와 판소리를 배울 타산까지 내비쳤다.

아직도 꿈이 많은 남자, 변강가수의 모든 꿈이 하루빨리 현실로 되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2009.5.28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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