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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시비,생가건립에 앞장선 사람-이윤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7월6일 11시07분    조회:6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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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비, 생가, 기념비 건립에 앞장선 이윤기 소장
창립 20주년 맞은 해외한민족연구소

국제화 시대에 국경은 ‘국토’보다 ‘문화’와 ‘경제’를 토대로 바뀌어 가고 있다. 현재 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 동포는 800만이 넘어가는 것으로 추정된다. 용정에 ‘윤동주 시비’와 ‘윤동주 기념관’을 건립하고 명동마을에 ‘윤동주 생가’를 복원하며, 연해주 고려인 유허지에 ‘신한촌기념탑’을 세우며 동분서주하는 사람, 중앙아시아에 흩어져 사는 고려인들을 애정의 눈길로 살피면서 민족 동질성을 강조하고 있는 사람, 각종 국제회의와 학술대회를 통해 문제해결을 위한 이론을 개발하고 정책제안을 하기에 영일이 없는 사람이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이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을 기자가 만났다.


↑ 해외한민족연구소 이윤기 소장 ⓒ문화저널21
‘해외한민족연구소’ 800만 재외 교포를 ‘문화’와 ‘경제’의 고리로 연결

최재원 기자 (이하 최기자) : 소장님 안녕하세요. 해외한민족연구소 창설 20주년을 축하합니다. 이윤기 소장님께서는 해외에 거주하는 800만 한민족을 ‘한민족공동체’의 기치 아래 문화와 경제의 고리로 연결해서 민족 공영의 길을 열어가는 일에 온 힘을 기울여오셨습니다. 해외한민족연구소를 설립하신 것이 1989년 6월 1일이었으니 만 20년이 된 것 같습니다. 우선 이 연구소를 설립하시게 된 동기를 말씀해주세요.

이윤기 소장 (이하 이소장) : 그러니까 꽤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제가 국회 외무 위원으로 있을 때 외국의 여러 가지 자료를 접하다 보니 외국 여러 나라에 교포들이 산재해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조국과 연락마저 끊어진 채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심을 두게 됐어요.

당시만 해도 재외 교포들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연구소를 설립해 교포들의 이주 배경과 정착 과정, 그리고 오늘날 처해 있는 상황과 전망 등에 관한 연구를 했습니다. 연구 과정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놀라운 사실들과 그들이 역사의 뒤편으로 내팽개쳐져 있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실상을 우리 국민에게 알리고 정부로 하여금 대책을 마련하도록 건의도 했습니다.

용정의 ‘윤동주 시비’, 명동마을의 ‘윤동주 생가’, 연해주의 ‘신한촌 기념비’ 건립
기자 : 한민족공동체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는 일에 전력해오셨는데, 매년 학술대회를 개최해오셨고, 학술지 ‘한민족공동체’를 간행해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의 중요한 업적들을 간략히 소개해주세요.

이 소장 :  연구소 설립 후 20년 동안 나름대로 모든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중에서도 재외 교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일에 주력하였습니다.

연변에서는 윤동주 시비를 세우고 옛 大成中學(대성중학 : 지금은 윤동주 기념관으로 사용)을 복원하고, 만주 독립운동의 요람인 명동촌(明東村)을 복원하면서 명동 교회와 윤동주 생가를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식을 거행하는 한편, 우리말과 우리글을 장려하고자 매년 한글백일장을 열어 젊은 학생들로 하여금 조국과 한민족에 대한 의식을 고취할 수 있도록 해왔습니다. 같은 사업을 중앙아시아와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등지에서도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었던 신한촌(新韓村)에 기념탑을 세워 옛 선열들의 얼을 기리고 연해주 고려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신한촌은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의 요람으로써 재외 망명 정부가 제일 먼저 들어섰던 곳입니다. 상해 임시정부보다 신한촌 임시정부가 먼저 세워졌습니다.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복원한 윤동주 생가 전경.  연변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옛 함경도식 한옥으로 방과 부엌이 딸린 난방과 취사를 겸한 구조로서 인근에 있는 한옥 2채를 사들여 고증을 거쳐 원형 그대로 복원.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만, 중국 요령성 심양(동북 삼성의 중심)에서 매년 조선족 민족 절 행사를 대대적으로 거행하고 있습니다. 조선족 참가 인원 약 2~3만 명이 모여 우리 한민족만이 행하는 각종 민속놀이를 하며(매년 9월 제 3 토요일) 삼양시를 요동치게 합니다. 중국 당국에서는 처음에 한, 두 해 정도 할 것으로 생각했던 이 행사가 20년 가까이 지속하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있으며, 앞으로 이날을 중국 전 조선족의 민속 절로 제정할 것을 고려 중이라는 고무적인 공문이 전달됐습니다.

기자 : 중국 연변 지역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용정의 용정중학교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참배하고 윤동주기념관, 그리고 명동 마을의 윤동주 생가를 둘러봅니다. 이 모든 것들을 이윤기 소장님께서 중심이 되어 추진하셔서 이뤄놓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조선족 민속 절’ 행사를 통해서도 중국 내에 흩어져 사는 조선족 동포들이 모처럼 동질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요. 그러면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 이런 일들을 추진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세요. 건립 과정에 어려움도 많으셨을 텐데요.

이 소장 :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한마디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중국에는 약 200만의 교포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 상징적인 인물을 선정해 집중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하고 민족시인 윤동주를 부각시켰는데, 예상이 적중한 것 같습니다.

윤동주 시비와 기념관 등을 복원할 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중국 당국에서는 이것을 문화 침투로 본 것이죠. 시비를 세우고도 제막식을 하지 못하고, 생가를 복원하고도 낙성식을 하지 못했습니다. 참으로 경계가 심했습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지요.
 
'해외한민족연구소'와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중국 용정중학교 교정에 건립한 윤동주 시비 (1993년 5월)

기자 : 조선족 동포들을 대상으로 ‘윤동주문학상’, ‘해외한민족 교육 진흥상’, ‘해외한민족 청년상’ 등을 시상하고 계신데요.

이소장 : 그렇습니다. 각종 시상식을 하고 있습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이제 깊숙이 뿌리가 내려졌습니다. 그곳 교포들의 기대가 날로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상의 규모나 역사, 또는 시상 금액 면에서 연길에서는 단연코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자 : 1997년인가요?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할 때의 참상을 그린 대작 작품을 그린 신순남(신니꼴라이)을 발굴하고 국립미술관에 전시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윤기 소장님이었죠.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비견되는 대작들이어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었습니다. 그 얘기 좀 들려주세요.

신순남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겪게 된 고려인들의 애환을 대형화폭에 그렸지요.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비견되는 대작들이었습니다. 국내 전시장엔 감동의 물결이 일었었지요.
 
신순남(신 니꼴라이) 화백의 이주사화(移住史畵) : 신순남 화백은 세계적인 민족화가로 이 그림은 1937년 한민족이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할 때의 참상을 형상화한 대서사시(높이 3.2m, 길이 45m).

이소장 : 1995년도로 기억합니다만,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들렀는데, 때마침 고려일보 기자 이웨체슬라브가 신순남(신 니콜라이)과 그의 그림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 이튿날 열릴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림을 보는 순간 매우 놀랐습니다. 우선 규모 면에서 높이 3m, 길이 45m인 데에 놀랐고, 다음은 그림의 배경 소재가 1937년도 스탈린의 강제이주 계획에 의해 연해주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는 내용인 데에 놀랐습니다. 민족의 애환을 담은 대서사시였지요. 작가 신순남은 동양의 피카소라고 일컬어지는 분인데,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비견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제가 작가와 인사를 나누고 전시회 이후 그림의 행방에 대해 물으니 신 화백은 전시회의 후원자가 미국 기업인인데, 유럽에서 전시회를 열고 미국으로 간다는 겁니다. 그다음 행방을 물으니 아직 잘 모르겠다며 내심 귀찮아하는 눈치였어요. 제가 이야기를 했지요. 이 그림이 유럽에서 순회전시회를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면 다시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못 돌아올 것이라고. 그런데 신 화백은 한국말을 잘 못해서 통역을 시켜 제 말의 뜻을 전했는데도 별 반응이 없더라고요. 제가 이 그림은 한민족의 애환을 담은 그림이니 한국으로 가서 전시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더니 고개를 저었어요. 다시 내가 어떻게든 주선해서 한국에서 전시하도록 할 테니 나를 믿으라고 하니 당신이 무슨 힘으로 한국에서 전시하도록 하겠느냐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는 다음날이면 모스크바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설득을 못 시키고 떠나면 한국에서의 전시는 영영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급한 김에 한국 대사관에 가서 서건이 대사를 만나 의논했습니다. 내일 전시회를 연다니 현장에 가서 테이프 끊기를 함께 하며 축하를 해 주고, 서 대사가 책임지고 한국에서의 전시회를 열도록 주선해 줄 테니 유럽으로 반출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설득했죠. 그리고 내가 귀국하면 요로에 이야기해서 책임지고 한국으로 가져갈 테니 서 대사가 나를 믿으라고 했지요. 대사는 재외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신분이기 때문에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귀국하자마자 당시 김영삼 대통령 비서실장인 박관용 실장과 문화부 주돈식 장관께 건의하여 2년여 교섭 끝에 한국에서 전시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엄청난 반향이 일어났습니다. 그림은 여러 점인데 길이 40~50m 되는 것이 여러 점이고, 소품도 많았습니다. 전시 후 전부 한국 구립 현대 미술관에 기증했고, 신 화백은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 최고 훈장을 받았으며 우즈베키스탄으로 돌아가서는 그곳 정부로부터도 문화 최고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신 화백의 그림은 그곳 정부의 허가 없이는 한 점도 외국으로의 반출이 금지되었습니다. 신 화백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고, 영국 BBC 방송에서는 동양의 피카소라고 극찬을 했습니다. 그림 전문가들의 평에 의하면 앞으로 국보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외에도 일화가 많습니다만,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 전’이 성사되었습니다.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따릅니다. 대단히 민감한 문제라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이야기가 많지요.
 
학술회의의 후속행사인 '아! 고구려-1500년 전의 고구려고분벽화전'은 수 많은 관람객이 참관했고, 과거 찬란한 고구려문화에 대한 보존과 연구를 전 국민적 관심사로 끌어올렸다.

기자 : ‘아! 고구려-1500년 전 고구려 고분 벽화 전’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켰었죠. 그 일을 주관한 것도 해외한민족연구소였죠?

이소장 : 그렇습니다. 1500년 전 고구려 고분 벽화를 처음 보게 됐지요. 정말 화려하고 정교하며 장관이었습니다. 말로 이루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세한 말씀을 드리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자칫 잘못되면 여러 사람이 다칠 우려가 있습니다. 대단히 민감한 문제로써 무덤까지 가져가야 할 이야기가 많지요. 책으로 써도 한 권은 족히 될 분량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긴 시간을 두고 이야기하겠습니다. 이해해 주세요.

조선일보에서 며칠간 연재 보도했는데 신문 창간 이후 일면에 최대의 천연색 사진을 실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전국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는데 관람객이 400만을 넘었고, 한국 전시 사상 최고 기록이라고 했지요.

기자 : 1937년 연해주의 동포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한 민족적 슬픔을 위무하고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심어주도록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기념비’를 세우셨지요? 탑신의 거대한 돌들을 모두 한국에서 가져갔다고 들었습니다. 연해주 고려인 유적지에 ‘신한촌기념비’를 세웠지요, 트레일러 4대 분량의 탑들은 모두 한국에서 가져다 건립했습니다.

이소장 : 조금 전에 신한촌 기념탑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 역시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도 찬성하는 눈빛이 아니었고, 이국 땅(러시아)에 와서 그런 탑을 세우면 누가 좋아하겠느냐고 별로 좋은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도 사실입니다만, 망명 정부가 세워졌던 신한촌에 기념물 하나 없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냐 하는 반감이 들어 무리하게 감행했지요. 그 탑돌(트레일러 4대 분량)을 모두 한국에서 가져갔다는 것에 의의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3․1절과 8․15 광복절에 그곳 고려인들이 탑에 와서 경축 행사를 한다면서 새로 부임한 총영사가 고마워했습니다.

이 기회에 한 가지 밝히고 싶은 것은 탑 건립에 큰 비용이 들었는데, 청년 실업가 백미 산업의 이인기 사장이 거금을 쾌척해 주셔서 건립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장은 한 번도 생색을 내지 않았습니다. 좋은 분이지요.

“미국의 화와이를 보세요. 형식적으로 미국의 주권이 미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영토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일 양국 간에는 하등의 갈등이나 마찰이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문화저널21

기자 : 중국, 연해주, 중앙아시아를 수도 없이 오가시면서 한민족공동체를 실천하는 많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앞으로 이루시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이소장 : 21세기는 국경의 벽은 낮아지고 대영토주권의 개념이 바뀝니다. 그리고 많은 인적 교류를 통해 인류 문화적인 큰 변화가 올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것은 곧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영역 또는 경제적 영역이 출현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조선족이 집거하고 있는 연변(간도)을 우리의 문화적 영역으로 !, 연해주는 우리의 경제적 영역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 제 소망입니다. 접근 방법은 어디까지나 문화적․경제적 접근 방법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찰 없이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입니다. 멀리 내다보면 결국 그렇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화와이를 보세요. 형식적으로는 미국의 주권이 미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영토화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일 양국 간에는 하등의 갈등이나 마찰이 야기되지 않습니다. 서로 공동 번영을 누리니까요. 이것이 앞으로의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인류 문화사의 획기적인 변화죠. 누가 이 추세를 막겠습니까. 우리도 앞으로 연해주로 진출하여 생활공간을 넓혀야 합니다.

즉,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영향을 벗어나야지요. 이를 위해 지리적인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혁명적인 사고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나는 미국의 제3대 대통령 제퍼슨이 루이지애나 지역을 사들여 서부 개척의 길을 연 것을 큰 교훈으로 삼고 있습니다. 당시 미 의회에서는 위헌이라고까지 주장하며 반대했지만, 제퍼슨 대통령은 긴 안목으로 루이지애나 지역을 사들여 서부개척의 길을 열어 오늘날 캘리포니아와 오리건 주를 편입하여 태평양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우리도 연해주 진출에 있어 이러한 안목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기자 :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소장 : 인류사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국민이나 정부 당국도 시대의 조류를 긴 안목에서 조망하고 국내의 문제에만 매달리지 말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사고의 획기적인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1620년 영국의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대서양의 험한 파도를 넘지 않았다면 미국의 신대륙을 개척하여, 오늘날의 미국을 건설했겠습니까?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사고의 변화였으며 위험이 따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연해주로 진출하자는 구상도 이와 같은 사고의 맥락에서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좋은 시간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자 : 해외한민족연구소의 사업이 날로 창성해지길 바랍니다. 이윤기 소장님께서도 늘 건강하셔서 뜻하시는 모든 일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오랫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문화저널21 최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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