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계를 뜨겁게 달군 새별
악바리 김미아의 눈물겨운 가수의 길
연변TV방송국 중화인민공화국창건60돐경축대형TV문예야회 《조국이여 축복하노라》 출연차 고향 연길을 찾은 김미아(본명: 김매)는 무대에서 노래 《신아리랑》과 《행복에로》를 열창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공연을 마친 그는 “고향무대만큼은 아무리 바빠도 빠뜨릴수 없다”면서 “고향인민들의 사랑과 지지가 없었다면 오늘의 내가 있을수 없다. 감사의 인사를 꼭 전하고싶었는데 오늘 연변TV방송국에서 기회를 주어서 너무 기쁘다. 고향인민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수 있는 오늘의 출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며 고향애를 내비쳤다.
동년시절은 피아노와 함께
작년 CCTV 프로그램 《성광대도(星光大道)》에서 당당하게 1위를 하면서 일약 인기가수로 부상한 김미아, 그녀의 어릴적 꿈은 가수가 아닌 피아노연주자로 되는것이였다. 5살부터 피아노선생님을 모시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니 그런 꿈을 가지는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였다. 김미아가 피아노를 배우게 된것은 4살때 아버지가 사준 장난감피아노덕이였다.
유치원을 다녀온 미아가 고사리같은 손으로 그날 배운 노래를 장난감피아노로 아주 정확하게 치는것을 본 부모는 딸한테서 음악에 대한 타고난 선천적인 기질을 발견하였다. 하여 이듬해부터 정식으로 피아노선생님을 모시고 피아노공부를 시켰다.
김미아는 동년시절을 피아노와 함께 하였다. 12살에 이미 피아노 8급을 따낸 그는 당시 밖에서 노는 애들이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딸한테 늘 엄격했던 어머니는 피아노뿐만아니라 학교에서 배운 학과목도 잘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착한 딸이였던 김미아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열심히 공부하여 소학교에서 련속 6년간 3호학생으로 당선되여 부모님과 선생님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소학교 4학년부터 음악을 좋아하는 부모의 영향을 받아서 노래하기 즐겨했고 학교중창대로 가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소녀가장으로 고학의 길
1996년, 부모의 의사대로 연변대학예술학원 피파전업을 선택한 김미아는 3년후 다시 민족성악전업으로 바꾸고 신광호선생을 지도교원으로 모시고 노래를 배웠다.
그런데 뜻밖의 불행이 닥쳐왔다. 그가 17살나는 해에 개인사업을 하던 아버지의 갑작스런 파산에 의해 생활이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였고 남동생은 아직 소학생이여서 한순간에 소녀가장이 돼버린 김미아, 어려서부터 항상 “김매는 부자집 딸이다”, “저 애는 하고싶은걸 다 할수 있는 운명이라서 좋다” … 이런 말들속에서 자랐지만 하루아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어려운 삶을 견뎌나가야 하는 또다른 운명에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러나 그는 묵묵히 현실을 받아들일수밖에 없었다. “맏딸인 내가 나서야 된다”는 생각에 김미아는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결심했다. 하루에 10곡의 노래를 매일같이 불러야 한달에 겨우 900원밖에 안됐다. 처음에는 어려운 역경속에서 부르는 노래여서인지 즐겁지 않았다. 단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뿐, 음악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그는 령하 27도되는 추운 겨울에도 가족을 살려야 한다는 리유하나만으로 부지런히 밤무대를 뛰였다. 학교를 그만둘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그대로 물러앉기에는 너무 억울했다. 그는 “어떻게든 꼭 견지해서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고 언젠가는 훌륭한 가수가 되여 오늘의 고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리라”고 속다짐하면서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살아갔다.
그렇게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노래를 부르면서 채바퀴처럼 바삐 돌아치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그늘이 음악으로 인해 점점 맑아지고있음을 느꼈다. 언제부터인지 밤무대에서 노래부르는것이 그의 전부가 되였고 그 또한 음악에 취해있는 자기자신을 좋아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돈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래부르기 위해서 밤무대를 찾아가군 했다. 열심히 살다보니 주위에 귀인들도 많았다. 항상 그를 도와주는 한 선배가 있었다. 당시 어느 예술쎈터의 대리인으로 있었던 그 선배는 김미아에게 많은 무대와 기회를 주었다. 어느덧 김미아는 연길에서 인기녀가수로 되여 매일 학교에서 돌아와 5곳이나 되는 밤무대때문에 분주히 돌아쳤다. 또한 연변TV방송국의 《청춘스타트》 등 프로그램에도 여러차 출연하기도 하였다.
타향에서의 설음
예술학원을 졸업한 김미아는 돈벌기 위해 홀로 고향땅을 떠나 대련으로 향했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두려움도 몰랐다. 단지 한국으로 돈벌러 간 어머니가 늘 마음에 걸렸던지라 하루빨리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돌아오게 해야겠다는 생각과 오직 가족을 위해 버텨야만 한다는 생각에 처음 맞이한 혼자만의 인생려정이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대련에 가서 보니 역시 조선족에 대해 아는 사람도 적었고 대부분 시골에서 왔다고 깔보고 구박하는것이였다. “진정 여기까지 와서 생고생을 해야 되는가”고 고뇌하면서 많은 밤을 혼자서 펑펑 울기도 하였다. 음력설이 다가왔지만 려비때문에 고향에 가지 못하고 친구랑 달랑 둘이서 보내는 그믐날밤, 우연히 TV에서 우리 조선족가수들로 이루어진 아리랑그룹의 열창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CCTV방송음력설맞이야회였다. 김미아는 아리랑그룹이 너무나 부러웠다. 그도 언젠가는 전국인민이 알아보는 국민가수가 되고싶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어떻게, 어디로, 누굴 찾아가야만이 자신의 가수꿈을 실현할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방황하던 그는 결국 또 무거운 배낭을 메고 다시 고향땅을 밟았다.
북경에서의 새로운 도전
고향에 돌아온 김미아는 어느날 우연히 CCTV공개사이트에서 전국청년가수노래대회소식을 보고 “드디여 기회가 왔구나”하는 생각에 다시 긴장감을 느꼈다. 때마침 고마운 한 선배가 그에게 노래DEMO를 록음해서 아리랑그룹의 소속사에 보내보라고 귀띔해주었다. DEMO를 보낸 뒤 그는 날마다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여 북경에 오라는 전화를 받은 김미아는 한껏 부푼 마음으로 가수들의 꿈의 도시인 북경행 기차에 올랐다.
2005년 여름, 북경에 간 김미아는 북경백혈문화예술유한회사(北京百碟文化艺术有限公司)의 라성철사장을 만나뵙고 사장님의 련계하에 행운스럽게 CCTV전국청년가수노래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는 자기절로 작사작곡한 노래 《사랑》을 불러 북경구역에서 3등을 했다. 하지만 전국결승전에는 앞 1, 2등만 참가자격이 있었기에 그는 또다시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김미아는 자신의 꿈이 물건너갈것 같아서 한달후 다시 북경으로 갔다. 이번엔 꼭 북경에서 끝을 보리라 맘을 든든히 먹었다. 라사장이 반겨맞아주셔서 다행스럽게 생각한 그는 우선 회사부근에 해빛도 없는 캄캄한 지하실에 방을 잡고 매일 눈뜨면 회사록음실에서 5~6시간가량 노래련습을 하였다. 그동안 저금해둔 돈이 겨우 3000원밖에 없었는데 방세를 물고나니 얼마 남지 않았다. 게다가 대도시여서 소비가 엄청나 큰 걱정거리였다. 그는 할수없이 또 그 지긋지긋한 밤무대를 찾아야 했다. 어쩐지 타향에서의 밤무대는 무서웠다. 고향과 달리 친구도 없고 친인도 없어 자신을 보호해줄 그 누구도 없다는 사실에 무서워났던것이다. 처음에 찾은 밤무대는 한달에 800원도 안되였다. 밤에는 뻐스가 없어 비싼 택시로 오가야만 했다. 그렇게 택시비 빼고나니 달랑 500원밖에 남지 않았다. 처음으로 계란볶음밥을 시켜 하루에 한끼씩 사흘동안 먹기도 했다.
이렇게 반년이 흐른 뒤 드디여 소속사와 계약을 맺고 소속계약가수로 된 김미아는 당금이라도 음반을 내고 공연하는 그런 일정이 바쁜 프로가수가 되는줄로 알고 가슴이 벅찼다. 그러나 13억 인구를 상대한 그의 R&B쟝르를 음악계에서는 결코 쉽게 받아주지를 않았다.
이때 아버지께서 뇌혈증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왔다. 아버지사연의 충격이 컸지만 그는 끝까지 달려야만 했다. 하여 4년간 각종 대회에 참가했다. 2005년에는 중국인외국노래부르기대회에서 특별상과 인기상 2가지 상을 수상, 2008년에는 또다시 혼성그룹으로 CCTV전국청년가수노래대회에 참가하여 동상을 받았다. 이 정도면 가수로서의 영향이 괜찮을거라 굳게 믿었는데 갑작스러운 5월 12일 사천대지진때문에 전국연예계활동이 거의 중지되였다.
김미아의 활동은 또다시 잠잠해졌다. “난 왜서 이럴가?”, “왜 운이 이렇게도 안 따르는걸가?” 하는 생각들로 우울증까지 걸렸다. 돈을 못벌기에 아버지의 치료비를 보태지 못하는 자신이 분통하고 미웠다. “과연 가수란 나와 맞지 않는걸가?”, “결국 이 길을 포기하여야만 하는걸가”하고 고민하던 김미아가 “결코 포기할수 없다”고 생각하며 다시 자기 자신한테 기회를 주기로 결심했을 때 갑자기 CCTV 시청률 1위인 프로그램 《성광대도》가 떠올랐다. 그는 자기의 재간을 마음껏 부릴수 있는 이 무대를 마지막희망이라고 생각하고 신청했다.
2008년 7월의 세번째주 김미아는 류행가곡을 불러 우승을 했다. 그리고 7월 월말결선에서 다시 한번 우승했다. 그러나 기뻐할수가 없었다. 병환에 계신 아버지가 불행히 돌아가셨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것같만 같았다. 진실이라고 하기엔 너무 숨막혀서 눈물도 안나왔다.
대회가 끝난 뒤 김미아는 고향에 가서 아버지의 마지막모습도 못본채 아버지를 보내드려야 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왜 인제야 오는가고 물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듯 아팠다. 아버지의 골회함을 꼭 안고 마음속깊이 결심했다。꼭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다고! 하늘나라에서라도 뿌듯한 마음 가질수있게 해낼거라고!
다가오는 《성광대도》 년말결선준비때문에 눈물을 닦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북경에 온 김미아는 여간 힘들지 않았다. 매일 아버지생각에 집중되지 않아서 괴로왔다. 그러나 고통을 동력으로 전환시켜 《아리랑》을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어쩐지 힘이 날것 같았다.
김미아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년말총결선에서 그는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그시각 그는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호감을 느끼는 한편 아버지에게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도 컸다. 연예계는 조선족새별 김미아의 소식으로 들끓었다. 여기저기서 취재를 요청해왔고 여러 TV방송프로그램에서 출연요청을 해왔다.
그는 선후로 CCTV3채널의 《몽상극장(梦想剧场)》의 대형콘서트(演唱会), 《믿음중국》 새둥지대형콘서트, 제10기중국훅호트소군문화절콘서트, “5。12”지진1돐청천기념공연, 2009년CCTV추석맞이야회 등에 참가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에 따라 우리 민족의 가요 《아리랑》도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울러퍼졌다.
금년 5월 9일에는 한국 SBS인기프로그램인 《스타킹》에 출연하여 뛰여난 노래실력을 선보였고 한국인기녀가수 인순이와 함께 열창했으며 한국인기그룹 슈퍼쥬니어와도 호흡을 맞춘 김미아는 두달간이나 한국인터넷검색순위 1위에 오르면서 한국에서의 인기를 실감했다.
인기의 급상승에 따라 화장품회사에서도 그를 찾았고 그는 녀연예인들의 가장 선망하는 화장품모델로 되여 녀성미를 한껏 과시했다.
금년에 한국에서 일하던 어머니를 북경으로 모셔와 함께 살게 되여 너무 좋다는 김미아는 “더 크게 성공하여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고싶다”며 효심을 내비쳤다.
현재 잦은 공연중에도 틈틈히 첫 음반을 준비하고있는 김미아는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방초선선생님을 비롯한 로조선족가수들이 아주 잘했다. 신세대 조선족가수로서 임무가 과중하다. 최선을 다해 가요계에서 조선족이미지를 올려주고싶다”고 야심차게 말했다.
가요계의 새별로 떠오른 김미아,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의 그가 꼭 자신의 새로운 꿈을 실현할것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 기자/조글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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