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천사
아나운서데뷔 4년차로 아직은 신인아나운서의 때를 벗지 못하였지만 자기절로 《음악편지》프로그램을 기획, 편집, 진행까지 야무지게 맡아하면서 실력을 인정받는 나날이 향상하는 아나운서 연영미, 이외에도 라지오소설에서는 어린이역에서부터 로인역까지 맡아하면서 성우 못지 않은 화술력으로 주위의 시선을 끌고있다.
어린시절 상상속에서 어렴풋이 꾸어왔던 아나운서꿈을 실현한 연영미는 “저는 노력하기 위해 태여난 사람인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루는 일도 나는 백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거든요. 그래도 다행스럽게 제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은 거의 없었어요. 원하는 일들이 노력끝에 꼭 이루어지거든요. 그래서 저는 노력의 단맛을 제대로 보았고 노력하는자에게 행운이 따른다고 굳게 믿고있어요”하고 감개무량하게 말했다.
그렇다, 연영미는 명실공히 노력파이다. 일찍 사범학원시절 그는 서예방학숙제를 잘하기 위해 온 방학동안 날마다 같은 구절을 써왔고 결국 그 숙제가 학생작품집에 입선되였다. 2005년 사범학원 졸업식에서는 5년기간의 개근생으로 선정되였으며 또 2000년 사법학원때 입당지원서를 내서부터 근 9년이란 세월을 남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여 금년 6월 10일에 마침내 입당하게 되였다. 그가 쓴 사상회보만 해도 그 얼마였던가? 입당하던 날 연영미는 “오래동안 지향해온 입당을 하게 되여 가슴이 벅찼어요”하고 입당소감을 밝히고나서 “아직은 예비당원이거든요.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사업하고 모든 일에 앞장서는 모범이 되여야지요”라고 당차게 말했다.
1984년, 도문시 석현진의 한 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난 연영미는 어려서부터 뭐든지 배우기를 즐겼다. 하여 학교에 입학하기전에 이미 신문을 줄줄 내리읽을수 있었고 우리 글 맞춤법도 막힘이 없었다. 하여 소학교에 갓 입학하여서 다른 애들이 과문을 한글자한글자 또박또박 읽을 때 그는 이미 표현랑독을 할수 있었다. 당시 담임선생님은 정확히 빨리 읽기시합을 자주 벌리였는데 그는 번마다 1등을 하였다. 그 시절 연영미는 여느 애들과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교원직업이 제일 고상해보였고 앞으로 교원으로 될 파아란 꿈을 키우면서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여 매년 3호학생, 우수소선대간부로 당선되며 가정의 보배둥이로 사랑을 듬뿍 받았다.
연영미는 소학교에 다닐 때 부모가 한국에 가는 바람에 외할머니슬하에서 자랐다. 그의 외할머니는 여느집 할머니와는 달리 손녀를 응석둥이로 키우지 않고 례절교양을 많이 시켰으며 사람사는 리치를 깨우쳐주었다. 당시 홀로 작은 두부방을 경영했던 외할머니는 영미에게 “네가 공부를 잘하면 너의 할머니처럼 출세하고(친할머니는 교원이였음) 공부를 잘하지 못하면 나처럼 두부나 해야 된다”며 입버릇처럼 외웠다.
중학교에 입학한후 TV를 즐겨보고 방송을 애청했던 연영미는 아나운서에 대해 호감이 가면서 “세상에 저런 신선한 직업도 있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나도 아나운서가 되고싶다”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같은 시골뜨기가 어떻게 아나운서로 될수 있을가? 아마 하늘의 별따기겠지”라는 생각과 함께 아나운서꿈은 평생 가슴속에 간직하기로 하고 그래도 현실에 더 가까운 꿈 ―교원으로 되기로 작심하였다. 고중입학시험을 앞두고 담임선생님이나 부모는 공부를 잘하니 앞으로 대학에 갈수 있다면서 고중에 다니라고 권고하였지만 다양하게 자신을 단련하고싶었던 연영미는 공부를 중시하면서도 과외활동이 많다는 사범학원을 선택했다.
2000년, 연영미는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사범분원에 입학하였다. 사범학원에 가보니 아니나다를가 소품, 춤, 노래 등 활동들이 정말 많았다. 원래 부지런하고 열정이 남달랐던 연영미는 학급에서 선전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선전란을 색다르게 꾸려 인기를 끌었는가 하면 학기마다 여러차례 열리는 주제반회를 기획하고 동학들을 조직하여 련습을 시켰으며 사회까지 맡아하였다.
첫방학때였다. 그는 서예숙제를 잘완수하기 위해 온 방학동안 같은 구절을 쓰고 또 써보았다. 처음에는 쓴 글씨들이 별로 신통치 않았는데 차츰 고운 글씨체가 나왔다. 개학에 숙제를 바쳤는데 글쎄 학생작품집에 입선될줄이야. 그때 그는 (아, 나도 서예를 잘할수 있구나) 하는 신심이 생겼고 그후부터 부지런히 서예를 갈고닦았다. 하여 제2기 연변대학 사범분원 서예전 학교서예시합에서 1등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졸업후에도 서예로 여러가지 상들을 수상하였는데 “삼원컵” 중한학생서예교류전 현장휘호대회에서 대상(2004년), 건국 55돐 “이동통신배” 전 주 조선족서예시합에서 금상(2004년), 제4회CJB직지국제서예대전에 입선(2007년), 제1회 중한일국제교류전에서 금상(2009년), 건국 60돐 기념 제1회 세종대왕한글서예전에서 성인조 대상(2009년)을 받았다.
연영미는 사범학원 3학년 방학때 연길에 남아 고학을 하면서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조직한 화술강습반에 참가하였다. 그때는 아나운서로 되고싶어서 배운것보다는 자신을 충전하기 위해 배웠고 또 교원으로 되는 밑거름으로 생각했다. 다른 동학들은 한번 참가한 화술강습반에도 연영미는 두번이나 참가했다. 4학년 방학때 그는 또 화술강습반에 참가하였다. 전해에 배운 교재와 똑같은 교재였고 배워주는 선생님도 바뀌지 않았지만 그는 지루하거나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첫해에 새롭기만 하였다면 두번째해에는 조금 깊이 다져지면서 점점 화술의 매력에 빠져들어갔다.
연영미는 졸업무렵 서방흥 등 선생님들이 강의하는 화술반에서 공부를 하고 최종 2명을 선발하는데 뽑히여 《출발21세기》라는 프로그램의 실습사회자로 되여 아나운서의 첫걸음을 떼였다. 당시 연북소학교에서 두달간 실습을 하게 되여 낮에는 학교에서 실습교원으로, 저녁에는 실습사회자로 분주히 돌아치면서 곧 실현할수 있는, 어려서부터 키워왔던 교원꿈과 아련하게 그려만 보았던 아나운서꿈을 눈앞에 두고 방황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하루하루 자신이 하고있는 일에 정성을 다하며 부지런히 재간을 익혀갔고 보람을 느꼈다.
그러던중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실습하던 동창생으로부터 연변인민방송에 FM이라는 새로운 채널이 나오면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은 연영미는 면접시험을 보게 되였고 행운스럽게 합격되여 아나운서와 인연을 맺게 되였다.
2005년 9월, 정식으로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한 연영미는 선배아나운서들을 모시고 꾸준히 배우면서 자신의 수준을 부단히 제고하였다.
금방 입사하여서 “외국음악” 프로진행을 맡았는데 얼마 안되여 김계월주임은 그에게 새로운 음악프로를 기획해보라는 임무를 주었다.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한 연영미에게 있어서 이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일이였다. 하지만 열정과 노력을 앞세워 사업에 손을 댄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밤잠을 설치며 날마다 머리를 쥐여짜서 마침내 《음악편지》라는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 물론 지금의 프로들이 나오기까지는 수차례 퇴짜도 맞고 많이 고치기도 하였지만 그 과정에 그는 하루가 새롭게 커갔다.
지금 그가 진행하는 《음악편지》프로그램은 월요일에는 마음에 힘이 되거나 알아두면 좋은 이야기들을 내용에 알맞는 연변가요와 함께 방송하는 《행복비타민》, 화요일에는 좋은 영화음악들을 영화줄거리거나 영화해당정보들과 함께 방송하는 《영화음악》, 수요일에는 연변가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위해 헛갈리기 쉬운 비슷한 노래들을 구별할수 있게 퀴즈(수수께끼)로 내거나 같은 주제의 노래들을 함께 묶어서 다루기도 하는 《음악퀴즈》, 목요일에는 세상의 모든 좋은 음악들을 만날수 있는 《뮤직월드(세계음악)》, 금요일에는 례의범절지식들을 알맞는 연변가요와 함께 방송하는 《국제표준례의》, 토요일과 일요일은 청취자들의 신청곡(연변가요)과 사연을 방송하는 《신청곡과 사연》 등 프로들을 다양하게 방송하고있다.
연영미는 지금 《음악편지》프로그램을 자체로 기획하고 편집하며 진행을 한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여러가지 애로들이 많았다. 《영화음악》종목이 제일 처음 나왔을 때 주위에서는 “착상은 좋은데 이걸 계속 이어나갈수 있겠는가”며 그를 대신해 걱정했었다. 사실 그 자신도 그런 걱정이 없었던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선 시도하면서 부지런히 자료를 찾노라면 방법이 생기겠지”하면서 시작이 절반이라고 저절로 신심을 북돋아주기도 하였다. 그렇게 지금까지 거의 4년동안 이 종목을 견지해온 연영미는 “우리 조선족매체에서 유일한 종목이기에 더욱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또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유일하게 청취자와 직접 전화교류할수 있는 종목인 《음악퀴즈》를 진행하면서 연영미는 “청취자들이 나를 아는 사람으로 가깝게 여기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훈훈할 때가 참 많다”고 고백하였다. 전화를 걸어온 청취자로부터 “서예대상받은걸 축하합니다”, “입당한걸 축하합니다” 하고 인사를 받은적이 있다는 연영미는 “사실 얼굴도 모르는 사람한테서 이런 축하를 받을 때면 청취자들이 내 일상생활의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든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면서 “이런 청취자들에게 정말로 행복한 비타민을 주는 아나운서로 되여야지”하는 결심이 선다고 털어놓았다.
이외에도 2년남짓이 《라지오소설》프로그램 성원으로 참가한 연영미는 지금은 장편소설 《아리랑》에서 10대소녀 곱단이역, 갓 시집간 혁명적녀인 달래역, 로인인 순녀역까지 1인3역을 한다. 다른 성원들은 연극학부 졸업생들이여서 연기를 아주 잘해내는데 연극을 정규적으로 배운적이 없는 그는 압력이 컸고 남보다 갑절 노력해야 했다. 그래도 항상 남한테 뒤쳐지는 기분이라면서 “다 연극을 하는 분들이여서 너무 유모아적이고 얘기도 잘하신다. 그래서 그분들을 보면 재미있는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며 “그분들처럼 되기 위해 백배의 노력을 해야 한다”고 자신을 편달한다.
연영미는 드높은 사업열정으로 나날이 향상하여 2005년부터 금년까지 “전 성 아나운서 및 사회자 프로그램사회”에서 4차례나 상을 탔고 2007년도에는 제12기전국조선어우수프로평의에서 3등상을 수상하였으며 연변방송본국의 선진사업일군으로 당선되였다.
연영미를 끔찍이 사랑하는 외할머니는 그가 입사해서부터 지금까지 손녀가 진행하는 방송을 빼놓은적이 한번도 없다고 한다. “우리 영미는 어쩜 이렇게 말을 잘하는지”하고 동네방네 자랑하여 지금은 동네할머니들이 다 라지오방송을 애청한다고 한다.
하늘의 별따기여서 마음에 간직하려고 했던 아나운서꿈을 실현하여 지금까지 4년간 아나운서생활을 해온 연영미는 “결코 생각했던것처럼 그렇게 사치스러운 직업이 아니다. 그때는 예쁘게 단장하고 말만 잘하면 될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방송을 듣는 사람의 손발이 되여 뛰고 청취자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록새록 느낀다”면서 힘들게 달려왔던 날들을 총화하고나서 “그래도 지향했던 일인것만큼 최선을 다할것”이라며 밝게 웃었다.
작년 9월에 연변인민방송국 제작부의 김걸과 결혼식을 올린 연영미는 남편과 시부모의 사랑과 응원에 요즘은 힘든줄 모른다. 신혼초라 남편의 사랑은 당연지사이지만 시부모의 남다른 사랑에 마냥 가슴이 훈훈해난다고 한다. “사업이 바쁜데 주말마다 오지 않아도 된다”면서도 은근히 기다리는 70고령의 시부모께 효도해드리려고 주말마다 찾아뵙는데 갈 때마다 이것저것 너무 주어서 오히려 빚지는 감이 들 때가 많다. 시어머니는 일하는 며느리가 힘들어한다고 밑반찬은 물론 고기에 남새까지 일주일장을 다 보아주고 시아버지는 술병에서 나오는 작은 장난감까지도 모았다 며느리한테 준다. 연변방송본국의 당지부서기로 계셨던 시아버지는 늘 며느리한테 “언제나 방송이 첫째이니 맡은 업무를 잘하거라”며 고무격려해준다. 어려서부터 부모와 떨어져 지내서인지 연영미는 살뜰한 시부모가 너무 좋아서 남편이 야근하는 날에는 혼자 있기 싫어서 시댁을 찾아 시부모와 담소를 나누면서 즐겁게 보내기도 한다.
행복한 신혼생활에 푹 빠진 연영미는 앞으로의 타산에 대해 “아직은 여러가지 프로그램을 다 진행할수 있는 능력이 없다. 앞으로 어떤 프로그램이든 자유자재로 진행할수 있는 풍격이 있는 아나운서, 사회자로 되고싶다”고 밝혔다.
노력의 주인공 연영미아나운서가 앞으로 더 정진하여 조선족방송계의 새별로 떠오르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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