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림민화-진가촌의 한송이 진달래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0월30일 10시17분    조회:930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진가촌의 한송이 진달래

33년 한족농민들의 건강을 지켜온 전국우수향촌의사 림민화

(흑룡강신문=하얼빈) 김태산 윤선미 기자 = 한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에 뿌리를 내리기란 기실 조련치 않은 일이다. 그럴진대 한 조선족처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물설고 낯선 타향의 한족촌에 와서 장장 33년간을 향촌의료사업에 바쳐왔다면 사람들은 아마 잘 믿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해림시 해림진 진가촌 주변 몇십리의 한족농민들이 '우리의 백의천사'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조선족 향촌의사 림민화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림민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림영빈 기자

얼마전 기자가 60여평방미터되는 진가촌의 자그마한 단층진료소를 찾았을 때 마침 림민화의사는 없고 몇몇 린근의 촌에서 왔다는 로인들이 점적주사를 맞고있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기자의 사진기에서 무엇을 알아냈는지 환자들이 시키지도 않는 말을 지어 울먹이기까지 하며 이구동성으로 하는것이였다. "림의사는 좋은 사람입니다! ", "이것보시오, 저희들이 병보이러 오면 먼저 과일구럭부터 내놓지요.", "밥때가 되면 붙잡고 꼭 밥을 먹여보냅니다."...

림민화와 진가촌의 연분을 캐여보자면 우선 그의 지식청년시절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광활한 농촌에는 할일이 많다'는 부름을 받은 림민화는 연변의학원을 졸업하자바람으로 흑룡강의 해림시에 내려갔다. 그때 진가촌에 맨발의사가 없다는 말을 들은 그는 그길로 진가촌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촌의 간부들이 이마살을 찡그렸다. 당당한 대학졸업생이 그것도 조선족처녀애가 한족촌에서 구경 얼마나 견디여낼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심에서였다.

"만약 십년을 결혼하지 않고 십년을 이곳에서 보낸다면 우리가 받겠소." 촌의 로지서가 일부러 하는 말이였다."예, 그러지요. 전 십년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절대 이곳을 뜨지도 않겠습니다." 후날 이 말을 두고 림민화는 당시는 골속에 온통 리상뿐이여서 다른걸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실토했다.

이튿날 림민화는 로지서를 따라 마을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마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돌며 면목도 익히고 병도 봐주었는데 가는집마다 친인이나 만난것처럼 그를 반겨주었다. 그날 로지서는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 촌에서 이미 촌의사가 다섯명이나 떠났다네. 고생에 견디지 못한것이지. 난 자네만은 믿고싶네. 농촌이 좀 고생스러워도 이곳의 촌민들은 소박하다오."

외지에서 홀몸으로 간 림민화는 때시걱은 병을 보다 어느 집에 이르면 그집에서 먹군 하였다.

"저와 촌민들의 관계는 민족을 떠나서 친인사이입니다. 저에게 곤난이 있으면 촌민들이 찾아와 도와주지요. 저의 살림집도 촌민들이 도와 지어준것입니다. 제가 아이를 낳을 때도 촌의 남정네들이 병원에 실어다주었습니다."

연변의 농촌에서 자란 림민화는 이렇게 되여 오늘까지 진가촌에서 범상치 않은 33년을 보내게 되였다.

진가촌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않고있다. 진가촌의 위생소에서 림민화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 로인, 영예군인과 렬군속, 오보호 등등에게 의약비를 선불해준것이 몇십원에서 몇백원에 이른다는것을. 림민화는 자그마한 상처는 처치비를 받지 않았으며 왕진환자에게서 일절 기타 비용을 받지 않았다. 아동의 백신접종도 무상으로 해주었다. "그들은 다 나의 친인이지요." 누가 궁금해할 때마다 그가 던져보는 말이다.

촌민 장영란은 아들이 몇년전에 대경석유학원에 가자 가계가 더욱 쪼들려졌다. 이때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뇌출혈로 드러누웠다. 이에 림민화는 다짜고짜 병원으로 끌고갔다. "돈은 무슨돈이야, 병부터 보여야지." 그때의 수만원의 치료비를 장영란은 아직 한푼도 림민화에게 드리지 못했다.

몇년전 새농촌합작의료가 시작될 때 일부 촌민들은 잘 가입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림민화는 자기의 돈을 내여 선불하였는데 지난해만 4400원을 댔다. 올봄에는 자기돈 600원을 내여 소학교에 새 우물을 파주어 학생들의 겨울철식용수난을 풀어주었다.

여기에 림민화의 고결한 의덕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임신 6개월인 촌민 방숙민이 불찰로 전기에 치여 호흡이 멈춰졌을 때다. 림민화는 두말않고 인공호흡부터 하며 10여분간 긴장한 구급조치를 대였다. 환자의 호흡이 돌아섰을 때 언녕 땀벌창이 된 림민화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거센숨을 몰아쉬였다. 1989년의 어느 겨울날, 년로한 한 할머니가 급성뇌막염에 걸린 손자를 데리고 위생소를 찾아왔다. 림민화는 그길로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뛰였다. 그리하여 아이는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림민화는 발에 동상을 남겼다.

지금도 일부 촌민들은 림민화를 찾아와 "내가 진빚이 도대체 얼마인가"고 묻군한다. 그때마다 림민화는 "그런 일이 있었나?"하고 시치미를 떼지 않으면 "난 언녕 잊어버렸다오."라고 말을 잘라버린다.

1977년 8월의 어느날, 연변의학원에서 편지가 한통 날아왔다. 사연인즉 그시절에 졸업한 대학생에 대한 분배가 시작되였는데 연길 아니면 도문의 큰병원으로 갈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래도 정식일터가 아니냐, 좋은 전도가 기다릴거야." 친척들이 저마끔 가기를 권고했다. 로지서도 "가보거라, 도시에 가서도 우리 진가촌만은 잊으면 안돼."라고 석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튿날 림민화는 조용히 떠나려고 일부러 이른 아침에 집문을 나섰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언녕 그를 바래주려고 울안을 꽉 메웠다. '림의사', '림의사'...촌민들이 미처 말문을 찾지 못해 술렁이는 모습을 보고 림민화는 대뜸 울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그는 로지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저...가지 않겠어요."하고 울먹였다.

33년간 림민화는 루계 입호왕진을 3만여차례 했고 매년 의약비를 3000여원 감면해주었으며 촌의 적령기 아동들에게 무상으로 백신을 연 2만여명 접종해주었다. 진가촌에서 그가 받아준 부자세대가 적어도 100여명은 되는데 그는 접생비를 일푼도 받지 않았다. 촌에 위급환자가 나섰을 때도 모두 그가 시병원으로 옮겨주었다. 오늘날 벽촌의 림민화진료소는 유엔위생조직, 국가위생부가 찾아오는 전형진료소로 되였다.

20여년간 림민화는 또 촌의 부녀주임, 지부위원 등직을 맡아왔는데 그사이 시우수인대대표, '3.8'붉은기수, 우수공산당원 등 많은 영예가 뒤따랐다.

2008년 림민화는 북경에서 소집된 전국우수향촌의사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전국우수향촌의사 칭호를 받았다. 전국적으로 32명 대표가 출석하였는데 림민화는 흑룡강의 유일한 대표였다.

"전 정말로 평범한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단지 촌민들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을뿐입니다."

진가촌의 한송이 진달래로 불리우는 림민화의 영예후감이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흑룡강신문=하얼빈) 리수봉 기자 = 중국농업과학원 작물과학연구소 벼유전자원연구실 주임, 길림성농업과학원 벼연구소 부소장을 겸임하고 있는 한룡식 박사(연구원, 48세, 흑룡강성 동녕현 출신)는 중국 벼 유전자원학과의 선두주자 중의 한사람으로 손꼽힌다. 1984년 동북농업대학 농학원 졸업, 1987년 모교 작물유전육...
  • 2010-06-17
  • 로인협회를 찾아 활동정황을 료해하고있는 홍순도촌장(오른쪽 첫번째). 배초구촌의 코기러기 촌장 ―홍순도촌장 4년간  마을 공익사업에 개인 돈 25만원 기부가야하기슭에 자리잡은 왕청현 배초구진 배초구촌에는 자기의 신근한 두 손으로 새농촌건설의 앞장에 서서 촌민들을 이끌어 공동히 치부의 길로 나가는 코...
  • 2010-06-08
  • (흑룡강신문=하얼빈) 정명자 견습기자 = 곤충, 남들이 다 꺼려하는 연구에 전념하며 곤충과 '친구'가 된 녀박사가 화제다. 동북농업대학 농학원의 한란란 박사(녀, 40세, 부교수, 수화출신)는 "부모님이 농업대학 졸업생으로서 그 뒤를 이어 이 전공을 선택하게 됐다"면서 "처음에는 곤충이 무서웠지만 인젠...
  • 2010-06-07
  • 인성교육으로 학교를 리드해가며 룡정시룡정중학교 박철교장의 사업담룡정시룡정중학의 박철(46세)교장은 1988년에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하고 동성향중학교로부터 교단에 오른 장장 21년간 룡정시 제5중학교와 룡정중학교를 전전하면서 인성교육으로 조선족중학교정을 이끌어왔다. 박철은 초불정신으로 동성향중학교와 ...
  • 2010-06-03
  • 리숙경리 음식개발 ,특허획득 등 노력으로 해외시장 겨냥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게 뭘가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먹는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전 행복을 팔고 돈까지 버는 좋은 직업을 갖고있는셈이죠.” 이는 지난 4월 18일 2010 서울세계음식박람회 한국국제료리경연대회에서 조...
  • 2010-06-01
  • 1급 지체장애인 박창송(35세)씨가  훈춘에 “창명컴퓨터봉사부”를 꾸린지도 어언 10여년이 된다.박창송씨는 선천적인 연골병으로 두다리가 마비되면서 9살에야 겨우 소학교에 입학, 학습성적이 줄곧 앞자리를 차지하였지만 6학년때 병이 더 악화되여 더는 학교에 다닐수 없었다.그때로부터 그는 병마와...
  • 2010-05-31
  • 왕영명로인 《공화국영웅인물》칭호 수여 올해 76세 나는 왕청현의 왕영명(王永明)로인이 지난 5월 1일부터 2일까지 이틀간 수도 북경인민대회당에서 거행된 전국영웅인물표창대회에서 영광스럽게 《공화국영웅인물》로 평의되였다. 현재 왕청현화하석두지(돌로 종이를 만드는 공장) 춘양기지의 기술고문으로 있는 그는 길림...
  • 2010-05-29
  • —연변연극가협회 전득주주석을 찾아서연변연극가협회 전득주주석을 처음 만났을 때 그한테서 서글서글한 인상속에 간간히 풍기는 카리스마를 느낄수 있었다. 전득주주석이 자신의 꿈을 피우기 위해 연극의 길에서 좌충우돌하던 얘기를 들으면서 그분의 세월속에 얼룩진 각고의 노력을 엿볼수 있었다. 그의 꿈은 애초부...
  • 2010-05-27
  • 전국 로동모범의 영예를 안고 천안문광장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김룡수당지부서기. ―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서기 김룡수의 이야기길림성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촌에는 과학적인 산업구조조절과 자신의 시범으로 촌민들을 치부길로 이끌어 가고있는 선두주자가 있으니 그가 바로 광소촌당지부서기이며 촌민위원회 주임인 김룡...
  • 2010-05-25
  • 고구려옛공예전승자―갈천 전국농촌민간수공업대사 칭호 받아 집안시 우산예술사의 갈영춘(필명 갈천,1978년 2월 10일 집안태생)은 고구려옛문명옛기예전승자로 고구려전통수공업에 능한 자기의 특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고구려 옛도성의 관광업발전에 한몫을 하고있다. 고구려전통수공업, 도자기공예, 보검류 타제, 구리...
  • 2010-05-2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