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림민화-진가촌의 한송이 진달래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0월30일 10시17분    조회:931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진가촌의 한송이 진달래

33년 한족농민들의 건강을 지켜온 전국우수향촌의사 림민화

(흑룡강신문=하얼빈) 김태산 윤선미 기자 = 한 사람이 대학을 졸업하고 농촌에 뿌리를 내리기란 기실 조련치 않은 일이다. 그럴진대 한 조선족처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물설고 낯선 타향의 한족촌에 와서 장장 33년간을 향촌의료사업에 바쳐왔다면 사람들은 아마 잘 믿으려 하지 않을것이다. 해림시 해림진 진가촌 주변 몇십리의 한족농민들이 '우리의 백의천사'라고 다정하게 불러주는 조선족 향촌의사 림민화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림민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림영빈 기자

얼마전 기자가 60여평방미터되는 진가촌의 자그마한 단층진료소를 찾았을 때 마침 림민화의사는 없고 몇몇 린근의 촌에서 왔다는 로인들이 점적주사를 맞고있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기자의 사진기에서 무엇을 알아냈는지 환자들이 시키지도 않는 말을 지어 울먹이기까지 하며 이구동성으로 하는것이였다. "림의사는 좋은 사람입니다! ", "이것보시오, 저희들이 병보이러 오면 먼저 과일구럭부터 내놓지요.", "밥때가 되면 붙잡고 꼭 밥을 먹여보냅니다."...

림민화와 진가촌의 연분을 캐여보자면 우선 그의 지식청년시절로 거슬러올라가야 한다. '광활한 농촌에는 할일이 많다'는 부름을 받은 림민화는 연변의학원을 졸업하자바람으로 흑룡강의 해림시에 내려갔다. 그때 진가촌에 맨발의사가 없다는 말을 들은 그는 그길로 진가촌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촌의 간부들이 이마살을 찡그렸다. 당당한 대학졸업생이 그것도 조선족처녀애가 한족촌에서 구경 얼마나 견디여낼수 있겠는가 하는 우려심에서였다.

"만약 십년을 결혼하지 않고 십년을 이곳에서 보낸다면 우리가 받겠소." 촌의 로지서가 일부러 하는 말이였다."예, 그러지요. 전 십년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절대 이곳을 뜨지도 않겠습니다." 후날 이 말을 두고 림민화는 당시는 골속에 온통 리상뿐이여서 다른걸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실토했다.

이튿날 림민화는 로지서를 따라 마을서쪽에서 동쪽으로, 다시 마을 남쪽에서 북쪽으로 돌며 면목도 익히고 병도 봐주었는데 가는집마다 친인이나 만난것처럼 그를 반겨주었다. 그날 로지서는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 촌에서 이미 촌의사가 다섯명이나 떠났다네. 고생에 견디지 못한것이지. 난 자네만은 믿고싶네. 농촌이 좀 고생스러워도 이곳의 촌민들은 소박하다오."

외지에서 홀몸으로 간 림민화는 때시걱은 병을 보다 어느 집에 이르면 그집에서 먹군 하였다.

"저와 촌민들의 관계는 민족을 떠나서 친인사이입니다. 저에게 곤난이 있으면 촌민들이 찾아와 도와주지요. 저의 살림집도 촌민들이 도와 지어준것입니다. 제가 아이를 낳을 때도 촌의 남정네들이 병원에 실어다주었습니다."

연변의 농촌에서 자란 림민화는 이렇게 되여 오늘까지 진가촌에서 범상치 않은 33년을 보내게 되였다.

진가촌 사람들은 지금도 잊지 않고있다. 진가촌의 위생소에서 림민화가 가정형편이 어려운 사람, 로인, 영예군인과 렬군속, 오보호 등등에게 의약비를 선불해준것이 몇십원에서 몇백원에 이른다는것을. 림민화는 자그마한 상처는 처치비를 받지 않았으며 왕진환자에게서 일절 기타 비용을 받지 않았다. 아동의 백신접종도 무상으로 해주었다. "그들은 다 나의 친인이지요." 누가 궁금해할 때마다 그가 던져보는 말이다.

촌민 장영란은 아들이 몇년전에 대경석유학원에 가자 가계가 더욱 쪼들려졌다. 이때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뇌출혈로 드러누웠다. 이에 림민화는 다짜고짜 병원으로 끌고갔다. "돈은 무슨돈이야, 병부터 보여야지." 그때의 수만원의 치료비를 장영란은 아직 한푼도 림민화에게 드리지 못했다.

몇년전 새농촌합작의료가 시작될 때 일부 촌민들은 잘 가입하려 하지 않았다. 이에 림민화는 자기의 돈을 내여 선불하였는데 지난해만 4400원을 댔다. 올봄에는 자기돈 600원을 내여 소학교에 새 우물을 파주어 학생들의 겨울철식용수난을 풀어주었다.

여기에 림민화의 고결한 의덕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임신 6개월인 촌민 방숙민이 불찰로 전기에 치여 호흡이 멈춰졌을 때다. 림민화는 두말않고 인공호흡부터 하며 10여분간 긴장한 구급조치를 대였다. 환자의 호흡이 돌아섰을 때 언녕 땀벌창이 된 림민화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연신 거센숨을 몰아쉬였다. 1989년의 어느 겨울날, 년로한 한 할머니가 급성뇌막염에 걸린 손자를 데리고 위생소를 찾아왔다. 림민화는 그길로 아이를 업고 병원으로 뛰였다. 그리하여 아이는 위험에서 벗어났지만 림민화는 발에 동상을 남겼다.

지금도 일부 촌민들은 림민화를 찾아와 "내가 진빚이 도대체 얼마인가"고 묻군한다. 그때마다 림민화는 "그런 일이 있었나?"하고 시치미를 떼지 않으면 "난 언녕 잊어버렸다오."라고 말을 잘라버린다.

1977년 8월의 어느날, 연변의학원에서 편지가 한통 날아왔다. 사연인즉 그시절에 졸업한 대학생에 대한 분배가 시작되였는데 연길 아니면 도문의 큰병원으로 갈수 있다는것이였다. "그래도 정식일터가 아니냐, 좋은 전도가 기다릴거야." 친척들이 저마끔 가기를 권고했다. 로지서도 "가보거라, 도시에 가서도 우리 진가촌만은 잊으면 안돼."라고 석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튿날 림민화는 조용히 떠나려고 일부러 이른 아침에 집문을 나섰다. 그런데 동네사람들이 언녕 그를 바래주려고 울안을 꽉 메웠다. '림의사', '림의사'...촌민들이 미처 말문을 찾지 못해 술렁이는 모습을 보고 림민화는 대뜸 울음을 터뜨렸다. 나중에 그는 로지서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며 "저...가지 않겠어요."하고 울먹였다.

33년간 림민화는 루계 입호왕진을 3만여차례 했고 매년 의약비를 3000여원 감면해주었으며 촌의 적령기 아동들에게 무상으로 백신을 연 2만여명 접종해주었다. 진가촌에서 그가 받아준 부자세대가 적어도 100여명은 되는데 그는 접생비를 일푼도 받지 않았다. 촌에 위급환자가 나섰을 때도 모두 그가 시병원으로 옮겨주었다. 오늘날 벽촌의 림민화진료소는 유엔위생조직, 국가위생부가 찾아오는 전형진료소로 되였다.

20여년간 림민화는 또 촌의 부녀주임, 지부위원 등직을 맡아왔는데 그사이 시우수인대대표, '3.8'붉은기수, 우수공산당원 등 많은 영예가 뒤따랐다.

2008년 림민화는 북경에서 소집된 전국우수향촌의사대표대회에 참가하여 전국우수향촌의사 칭호를 받았다. 전국적으로 32명 대표가 출석하였는데 림민화는 흑룡강의 유일한 대표였다.

"전 정말로 평범한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단지 촌민들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을뿐입니다."

진가촌의 한송이 진달래로 불리우는 림민화의 영예후감이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리수림, 남,한족, 길림성 돈화시사람, 중공당원, 1953년 출생, 길림오동약업그룹주식유한회사 리사장.리수림리사장의 인솔하에 길림오동은 보잘것없는 한 작은 농업개간기업으로 부터 제약업, 증권업, 도로건설업, 탄광채굴업을 일체화한 주식형그룹 상장기업으로 발전했다. 그는 의약사업에 투신하여 기업의 중약현대화진척...
  • 2009-08-18
  • 가장 모범적인 단체로 불리는 조선족로인협회 중국 첫 로인협회 초대회장 황종원로인을 만나황종원 프로필:84세, 룡정시 동성용진에서 출생 1956년도 입당 동불사 소학교교원, 동성용정부 문화, 교육, 위생 조리원 겸 동성용농업중학교 교장, 동성용인민공사 당위 선전위원, 조직위원,  동성용인민공사 농기관리소...
  • 2009-08-17
  • "민족의식.민족혼 심어야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한국史강의.한국어학교설립.항일서적집필(서울=연합뉴스) 이상헌 기자 = "독립투사의 피와 땀이 어린 희생을 발굴해 후손들에게 민족의식을 가르치고 민족혼을 심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스러져간 투사들의 활동을 재...
  • 2009-08-15
  • 우주연구서 획기적 돌파 가져온 조선족과학자 중국달탐사공정 부총설계사 중국과학원 유일한 조선족원사 강경산 만나본다강경산(姜景山) 프로필:1936년 2월 8일 길림성 룡정시에서 출생 1962년 구쏘련 레닌그라드 우리아노브 전공학원 졸업 1981년―1983년 미국에서 미크로파원격기술 연구 현재 중국공정원 원사, 중국...
  • 2009-08-13
  • 대련시민족교육의 산 증인 —원 대련시조선족학교 계영자교장을 만나“학생들의 희로애락은 곧 나의 희로애락이였다. 교정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마치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하는 기분이였다…” 이는 원 대련시조선족학교 계영자교장(55살)의 민족교육사업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 2009-08-11
  • 김효(金枭) 중한 태권도무대 평정청도조선족 2세인 김효(金枭, 9살)가 제4차 중한무도태권도경기(中韩武道跆拳道大赛)에서 명성에 걸맞는 뛰여난 표현으로 금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태권도 신동 김효는 중앙텔레비죤방송과 호남, 천진 등 국내 10여개 방송국의 특별초청귀빈이며 중앙텔레비죤방송...
  • 2009-08-11
  • 사회가치창출도 기업의 중요한 목표 료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 표성룡회장을 만나성공한 기업은 경제적가치와 사회적가치를 동시에 추구한다. 그러나 기업가로 한두개의 좋은 일을 하는것은 쉽지만 사회에 그 부를 보답하는 의거를 견지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료녕성정협위원이며 료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이며 ...
  • 2009-08-10
  • 우리 민족 브랜드입쌀 만듭니다 흑룡강성유기벼협회 회장 홍상표를 만나《중국제2차 입쌀혁명의 선두주자》로 불리는 조선족농민, 중국내 첫 유기벼협회 설립한 홍상표농민의 말: 《지금까지 많은 일을 해왔고 많은 영예도 받아왔지만 평생에 해놓은 가장 큰 일은 유기벼협회를 성립한것》홍상표 프로필:홍상표, 중공당...
  • 2009-08-06
  • 미술꽃나무 육성에 혼신 다바쳐—연길시청소년활동쎈터 최봉덕교원 사적뒤늦게 찾아온 요즘의 무더위, 교원들마다 재충전을 기하면서 휴식의 한때를 즐기는 여름방학이것만 연길시청소년활동쎈터 활동부 부장이며 미술지도인 최봉덕교원(36살)은 미술꿈나무들의 자질적계발과 창의적 표현력 기량을 닦아주기 위해 비지...
  • 2009-08-05
  • 이 시대가 부르는 조선족대학생들의 모습 제4회 조선족대학생  《KSC고향탐방활동 팀장 북경대학 김문철학생 만나본다》 김문철 략력:1985년 8월  흑룡강성 탕원현 출생 탕왕향 조선족소학교, 중학교서 공부 2002―2006년 7월  길림성 장춘시조선족중학교  고중 졸업 2006년 9월―현재  북경...
  • 2009-08-04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