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11월, 일본침략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동만유격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감행했다. 이듬해 2월 11일 밤, 룡정, 로투구방면의 일본수비대와 이도구의 무장자위단 및 10여명 일본경찰 230여명으로 조직된 토벌대는 밤도와 왕지평으로부터 어랑촌유격근거지를 향해 출발했다. 이날 밤 일본수비대 대장 쯔루오까를 위수로 하는 삼도구방면의 백여명 적들도 어랑촌을 향해 패를 나누어 포위망을 좁혀왔다. 360여명의 적들은 총과 박격포를 포함한 여러가지 무기를 지녔다.
2월 12일 새벽, 왕지평방면에서 먼거리보초를 서고있던 제2소대 대원 하지섭이 토벌대를 발견하고 총을 발사해 위급함을 알렸다. 제1소대 대원이 총소리를 듣고 유격대대부로 뛰여와 보고했다. 그뒤로부터 5분이 지나 날이 밝을무렵 보초병이 많은 적들이 이미 어랑촌을 포위한것을 발견하고 "적들이 들이닥쳤다"고 높은 소리로 웨쳤다.
유격대대부에 있던 중대장 김세를 비롯한 몇몇 대원들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기 위해 유격대대부 서북쪽방향에로 달려갔다. 제1소대 소대장 리구희는 몇몇 대원을 거느리고 동쪽켠으로 포위를 돌파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적들이 유격대대부에 대해 맹렬한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막부득이 상황에서 이들은 유격대대부에서 적들한테 반격을 가했다. 현당위 군사부장 방상범은 몇몇 대원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포위를 돌파했다.
이 시각 왕지평의 유격대 제2소대는 신속하게 어랑촌의 북쪽산으로 접근, 제1소대의 전우들을 구출하려 했으나 적아의 력량차이가 커 효과를 보지 못했다.현, 구 당위에 있던 최상동을 비롯한 유격대원들은 포위를 돌파하고 마을의 남쪽을 향해 달려갔다.
중대장 김세를 비롯한 몇몇 대원들은 유격대 대부와 백여메터 되는 작은 산비탈에서 적들과 치렬한 격전을 펼쳤다. 그들은 저마다 일당백의 기세로 마지막 피한방울이 남을 때까지 적들과 싸웠다. 유격대대부내에서 적들과 싸우던 리구희를 비롯한 몇몇 대원들은 유격대대부가 불길에 휩싸이고 무너지는 순간 밖으로 뛰쳐나오며 남쪽으로 포위를 돌파하려고 시도, 이 과정에 몇몇 적들을 사살했으나 최종 탄알이 떨어져 전부 비장한 최후를 마쳤다.
동쪽방향으로 포위를 돌파했던 리길원 등 3명 유격대원은 적들의 밀집사격에 제각기 흩어져 반격을 가하다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현, 구 당위를 뛰쳐나온 현당위 서기 최상동은 대원들을 엄호하며 철퇴하다 거처에서 백여메터 되는 곳에서 복부에 탄알을 맞고 땅에 쓰러졌으며 눈밭에서 적들과 마지막 피 한방울 남을 때까지 싸우다 장렬히 희생되였다.현, 구 당위와 제1소대 용사들이 피흘리며 싸우고 있을 때 일부 적위대원과 소선대원들도 자원적으로 전투에 뛰여들었다.
어랑촌포위돌파전은 새벽부터 시작하여 근 6시간 동안 지속되였으며 도합 18명의 적을 소멸했다. 그번 전역에서 도합 17명의 군민이 희생, 그중 적들과 영용하게 싸운 13명의 용사가 있는데 력사적으로 이들을 "어랑촌 13용사"라고 부르고 있다.
연변일보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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