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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판룡-20세기 중국조선족문화의 일대산맥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1월10일 10시05분    조회:7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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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조선족문화의 일대산맥
연변대학 전임 부교장 고 정판룡교수를 회고한다

○ 정판룡은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가장 우수한 문화지성인중의 한사람이며 저명한 문학교수,교육가였으며 문학평론가, 산문작가였으며 사회활동가였다.

정판룡 프로필:

1931년 10월 2일 전라남도 담양군 담양면 항교리에서 출생
1949년 연변대학 입학
195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55년 쏘련 모스크바대학 류학
1960년 쏘련문학 준박사 학위를 획득
귀국후 장장 40여년간 연변대학에서 교수와 연구 및 사회활동
1960년 5월 연변대학 어문학부 당총지부서기 겸 부학부장 직무를 맡은 후 중국의 첫 동방문학 교재편찬 시작,  《문화대혁명》때문에 1978년부터 외국문학사편찬활동을 회복,1980년 동서방문학이 다 들어있는 중국의 첫 완전한 외국문학사 전(前) 4권 출간.
1979년 정교수로, 이듬해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승진, 1986년부터 조선어문박사연구생도사로20여명의 박사를 양성. 선후로 《세계문학간사》, 《제2차세계대전이후의 세계문학》, 《외국문학강좌》, 《조선어문수첩》, 《정판룡문집》1, 2, 3권, 《세계속의 우리 민족》, 《중국조선족과 21세기》 등 많은 저서들을 출간.
중국외국문학회 상무리사, 중국조선족문학연구회 리사장, 하와이 동서방센터 객원연구원, 길림성문학련합부 주석, 중국비교문학연구회 리사, 중국조선족발전연구회 회장 등 많은 사회직을 맡고 활약.1991년 국무원 특수수당금 획득자. 부교장직에서 퇴임한 후 1993년 길림성 영재훈장을 수상, 1997년 한국KBS 해외동포상 학술상 수상.
2001년 10월 병환으로 타계.
 

휘황찬란한 생애로 본 정판룡교수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인물 정판룡교수가 타계한지도 어언 9년세월이 가까와온다. 하지만 정판룡교수의 위대한 업적과 고매한 인격적매력은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마음에 비석으로 아로새겨져있다.

정판룡교수는 1931년 10월 2일 한국 전라남도 담양군에서 태여났고 1938년 가족을 따라 중국 료녕성 반산현으로 이주했으며 1939년 3월 다시 흑룡강성 상지시 하동촌에 이주했다. 그해 4월 하동소학교에 입학했고 1946년 3월 송강성조선족중학교에 입학했다. 1949년 봄, 연변대학이 설립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17세의 애젊은 나이에 배움에 대한 갈망을 안고 불원천리 연길에 달려와 주덕해주장 등의 배려하에 연변대학 리공학부 수학부에 입학했고 후에 조문학부에 전입하였다. 1952년 10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변대학 교원으로 남았다.

1954년 9월, 뛰여난 성적으로 쏘련에 파견하는 대학원생으로 선발되여 모스크바대학교 어문학부 쏘련문학강좌에 대학원생으로 입학했다. 1959년 11월 중국류학생 왕유와 결혼했고 뛰여난 총명과 강한 의지력을 가지고 불철주야 학문을 닦아 1960년 2월 학위론문 《알렉쎄이 똘스또이의 3부작 󰡐고난의 길󰡑의 인민묘사원칙》을 내놓아 수많은 중국류학생들가운데서 선참으로 준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 5월, 정판룡교수는 북경 등 중국 이름난 대학교와 과학연구원의 초빙도 마다하고 부인 왕유와 함께 편벽한 연변땅, 연변대학에 돌아왔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정판룡교수는 《반동학술권위》,  《수정주의분자》로 몰려 비판투쟁을 받았다. 1969년 복권된 후 학술연구에 더욱더 박차를 가해 1980년 중국에서 처음으로 동서방문학을 총 망라한 《외국문학사》(4권)를 펴냈다. 1979년 3월 그는 부교수로 승진하고 같은 해 12월 교수로 승진했으며 1980년 7월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임명되고 1986년 국무원 학위위원회에 의해 중국의 첫 조선언어문학박사생 지도교원으로 임명되였다.

정판룡교수는 한평생 연변대학을 눈동자처럼 사랑했고 연변대학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자신의 열성, 슬기와 지혜를 다 바쳐온 우리 민족의 걸출한 교육가이다. 그는 연변대학의 첫 박사생지도교수로서 20명의 문학박사를 비롯한 수많은 인재들을 키워냈고 연변대학을 현대적인 종합대학으로 일떠세우는데 거대한 기여를 했다.

1997년 10월 한국 KBS해외동포상을 수상한 정판룡교수는 상금 10여만원을 헌납해 《정판룡교육발전기금회》를 설립, 가난한 대학생들의 학업을 격려했다. 그는 평소 장학금의 운영에 깊은 관심을 돌렸으며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전에도 병상에서 친히 6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발급했다. 지어 그는 떠나면서 부인 왕유교수에게 집에 남은 돈을 장학금에 넣으라는 유언을 남겼고 왕유교수는 정판룡교수의 유지대로 11만원의 저금통장을 선뜻 장학회 리사회에 바쳤다.

우리 민족 대학이 선다는 소식을 접하고 흑룡강성에서 불원천리 연변에 달려온 그날부터 정판룡교수는 연변대학을 위한 일을 사명감으로 간주하고 시종 연변대학을 눈동자처럼 사랑하면서 연변대학의 발전을 위해 로심초사하고 동분서주했으며 학교사랑, 제자사랑의 깊은 정을 보여주면서 수많은 동료와 후배들의 존경을 받았다.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교육가, 학자, 사회활동가, 문학평론가였던 정판룡교수는 우리 민족문화의 한그루 거목이였다.

정판룡교수는 10여만원을 헌납해 《정판룡교육발전기금회》를 설립, 가난한 대학생들의 학업을 격려했다.

우리 민족문화의 곤혹과 반성을 걱정한 정판룡교수

《중국조선족의 력사》라는 글에서 정판룡교수는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상을 《개혁개방속에서의 곤혹과 반성》이라고 개괄하면서  중국조선족의 삶의 현상을 조감해보면 위기감에 잠기게 되며 곤혹에 빠지기도 한다고 경종을 울린적이 있다.

정판룡교수는 중국조선족은 개혁개방이래 전국인민과 함께 전통문화와 현대문화, 동방문화와 서방문화, 농경문화와 도시문화의 화합과 강등속에서 심각한 곤혹을 치르지 않을수 없었으며 그 소용돌이속에서 자체의 우점을 발양함과 아울러 자체의 렬근성을 폭로하지 않을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특히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립중에서 필연적인 문화의 분류와 문화의 대이동중에서 조선족의 거동은 사림들을 눈물겹도록 하는 일면과 온 나라가 주목하는 성과를 쌓아올린 반면에 또 사람을 근심하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술 소모량이 전국의 제일, 카라오케, 나이트클럽, 술집 등 유흥업소가 중국의 제일, 택시도 전국의 제일인 연변의 농촌경제의 락후성과 거의 파산의 변두리에서 헤매는 교육현장, 완만한 경제증장속도에 비해 반비례로 팽창하는 소비관념... 이러한 현상들은 개혁개방이래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건립중에서 폭로된 중국조선족의 렬근성을 보아낼수 있으며 장원한 타산이 없는 단기행위, 쾌락주의경향, 과소비현상으로 개괄해 볼수 있다고 따끔하게 지적한 학자가 바로 정판룡교수이다.

정판룡교수는 대중문화적인 시점에서 보나 구체적인 문화형태에 대한 고찰에서 보나 중국 조선족문화에 대한 연구는 아직 많은 과제를 남겨주고있다고 지적, 지금처럼 계속 발굴한 문화재에 대한 연구, 채집한 전설, 민담, 민요에 대한 연구가 따라가지 못하고 민족예술, 민간신앙 등에 대한 연구가 따라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자기의 전통문화가운데서 귀중한 재부를 잃게 될것이며 민족정신이 계속 담백해질것이며 기회가 지나간 다음 잃은것을 다시 찾으려고 하여도 그때는 후회막급으로 될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무너지는 교육때문에 희망을 잃어가는 농촌의 어린이들을 보면 몇십년후의 조선족운명에 대해 자신을 가질수가 없다고 질호하면서 깊은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정판룡교수는 적지 않은 사람들 더우기 젊은세대들이 외래문화에 편승하면서 민족공동체의 일치감에 흥취가 없고 전통문화의 가치에 대하여 우습게 보는 현상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민족의 우월감에 들떠있는것도 바랄바가 못되지만 민족허무주의에 빠지는것은 더욱 위험하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우리 민족문화에 대한 곤혹과 반성에서 정판룡교수는 《오직 우리 민족의 지성인들이 일심으로 단합하여 우리 자신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를 성과적으로 해나갈 때만이 우리 민족의 문화선택이 굴곡적인 길을 적게 걸을것이며 또 자신의 생존과 발전을 도모하는 성스러운 사업에서 더욱 위대한 성과를 쌓아올릴것이다》고 미래지향적인 제언을 했다.

지성인들이 보는 정판룡교수

연변대학교 김관웅교수는 《김학철옹과 정판룡선생》이라는 글에서 정판룡선생은 의(義)와 리(理), 현실과 리상, 원칙과 구체적상황, 학문연구과 벼슬살이를 조화시킴으로써 이들 량자 사에서 평형을 유지하려고 한평생 시도한 분이라고 할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관웅교수는 중국에서의 우리 민족의 처지를 념두에 두고 내놓은 정판룡선생의 이른바 《며느리론》은 이러한 조화정신의 가장 전형적인 본보기인바 우리는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시집온 며느리같은 위치에 있기에 시집이 잘되게 시집처리도 잘해야 할뿐만 아니라 친청 일도 돌봐야 한다고 말한 주장 및 중국조선족 문화나 문학의 이른바 《이중성격》에 관한 정판룡선생의 견해도 바로 똑같은 맥락에서 흘러 나온것이라고 지적했다.

《사람은 살아서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정판룡선생의 이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이러한 인생 태도와 가치관을 잘 보여주고있다. 여기에는 동서남북, 상하좌우의 인간관계를 원활히 처리해야 한다는 조화정신이 안받침되여 있다.

연변대학교 김병민총장은 《정판룡과 그의 문학에 대한 문화학적인 고찰》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정판룡교수를 평가하고있다.

정판룡은 20세기 중국조선족이 낳은 가장 우수한 문화지성인중의 한사람이며 저명한 문학교수,교육가였으며 문학평론가, 산문작가였으며 사회활동가였다. 대학교수로서의 정판룡교수는 강당에서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풍부한 지식과 달변으로 새로운 학문을 가르쳐 청년학생들의 숭배자로 되였고 문학사저술, 기행문창작, 수필창작, 전기물창작 등 다양한 쟝르와 분야를 아우르는 창작활동을 통해 사회의 여러 계층의 독자들로부터 애독을 받은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고 했다. 수백만자에 달하는 그의 방대한 저술에서 우리는 교육가, 사회활동가, 학자, 작가 등 여러가지 모습들을 한몸에 체현한, 우리 시대가 낳은 가장 뛰여난 민족지성인의 산 모습을 읽게 된다. 아울러 그의 학자적인 인격과 넓은 흉금, 민족적인 사랑과 전략가적인 자세, 도도한 기백과 거침없는 사유 등에 실로 찬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그는 정녕 민족력사의 주인공이였고 민족의 문화거목이였다. 정판룡은 민족을 위해서 필요한 존재였고 또한 자신만이 할수 있었던 모든 일들을 훌륭히 해놓았다.하기에 그는 민족성원 모두로부터 애정과 흠모를 받을수 있었고 나아가서 력사가 기리는 인물로 남게 되였으며 따라서 자연히 학문적연구대상이 되고있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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