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한투자무역 법률봉사의 《1번지》
북경시금평변호사 사무소 김련숙대표변호사 만나본다
● 중국의 첫 중한투자무역법률봉사 사무소 설립
● 《전국 우수변호사 사무소》를 창설
● 《북경시 10대 변호사》 칭호, 전국녀성변호사협회 부회장
● 한국대기업과 주중 한국기관과 기구의 법률봉사 전담
북경시금평변호사 사무소는 한국 현대, SK중국, 대우, 롯데, POSCO, LG전선, 현대제철, 대한전선, 한국미래자산증권주식회사, 한국전력공사 등 대기업과 주중 한국대사관, 대한무역진흥공사, 주중 한국인회 등 기구를 위해 법률봉사를 제공
김련숙 프로필:
1956년 흑룡강성 목단강시 출생, 중공 당원
1985년― 1987년 중국인민대학 연구생원 법률학부 연구생
1987년―1994년 북경시위 당교 교연실 교원
1988년 변호사자격증 취득
1994년 북경시금평변호사 사무소 창설, 고급변호사
[주요 사회직무]
중화전국변호사협회 리사
중화전국녀변호사협회 부회장
북경시 조양구 제 11기 정협위원
중국인재연구회 녀성인재전문위원회 부비서장 겸 리사
북경시부녀련합회 집행위원
북경시민족련의회 리사
북경시인대상무위원회 립법자문전문가
중국인민대학 법학원 객원교수 등
[영예]
선후로 《전국 38붉은기기수》, 《2009년 전국 민족단결진보 모범개인》, 《제2기 북경시10대변호사》, 《수도민족단결진보 선진개인》
북경시금평변호사 사무소는 2008년 《전국 우수변호사 사무소》로 평정, 북경시에서 7개 사무소중의 하나, 《북경시 38붉은기집단》 등으로 평선
지난 세기 80년대 말, 중국에 대한 외국기업들의 투자가 급속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본이나 한국기업들도 중국투자의향이 짙으나 중국에 관한 해당 법률을 잘 몰라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한 상황이 였다.
그때 남먼저 시장을 파악한 한 조선족녀성은 일본정부로부터 장학금까지 받으면서 상법을 배울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한다. 그리고 한국기업의 중국투자를 위해 법률봉사를 제공하리라고 작심하고 단호히 북경에 남아 겸직 변호사로 있는다. 당시는 출국류학열이 한창 중국대지에 불어치던 시기였다.
20여년이 지난 오늘 이 녀성은 《제2기 북경시10대변호사》, 《전국 3촵8홍기수》, 《2009년 전국민족단결진보 모범개인》 등 영예를 안았고 현재 중화전국변호사협회리사, 중화전국녀성변호사협회 부회장, 북경시부녀련합회 집행위원, 북경시 조양구 제11기 정협위원 등 많은 사회적직위를 맡고있다. 이 녀성이 바로 북경시금평변호사사무소를 창설한 김련숙대표변호사 (주임)이다.
11월 7일 북경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기자는 예리한 매력의 변호사이면서도 조선족녀성다운 부드러움도 겸비한 녀성이라는 인상을 깊이 받았다.
도전 또 도전 ...무엇도 그녀앞을 막지 못했다
《노력했다면 실패했더라도 후회하지 않는다》
이는 취재중에 김련숙이 재삼 곱씹은 말이다.
1956년 목단강시의 한 보통로동자가정에서 태여난 김련숙은 무슨 일에나 끈질기게 달라붙는 성미이다. 참군하려고 6년동안 신청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자습하여 1979년 대학입시에 참가, 하지만 몇점 차이로 고등학교문에 들어서지 못했다.
실패앞에서 굴하지 않는 김련숙은 소학교음악교원도 했고 또 전자설비공장의 일군으로도 되였었다. 그녀는 매일 100여개 일본어단어를 외우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고진감래라고 1980년 그녀는 추천받고 할빈사범대학 외국어학부 일본어전공에 진학했다.
번역가로 되려던 그녀는 또 번역은 단지 공구일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전문지식을 배우려고 흑룡강대학 법륙학부 청강생으로 2년 공부했다.
1985년 2월, 감기에 걸린 김련숙은 39도나 되는 고열을 극복하고 중국인민대학 법률학부 석사연구생에 응시했으나 몇달동안 손꼽아 기다린것이 락방소식이였다. 점수를 본 그녀는 믿기 어려웠다. 그녀는 중국인민대학 학생모집판공실에 전화하여 점수를 다시 확인할것을 요구했다. 아니나 다를가 점수가 잘못 통계되고 그가 맞은 점수로 복수시험에 참가할수 있었다. 그는 바로 중국인민대학에 찾아갔다. 20여일동안 학교측과 교섭하여도 때는 이미 복수시험이 끝난지라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 김련숙은 국가민족사무위원회를 찾아갔다. 국가민위와 국가교육부의 조률하에 김련숙은 1985년 9월에 끝끝내 중국인민대학 법률학부 연구생에 입학하게 되였다.
고초를 겪고 얻은 학습기회라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였다. 1987년에 졸업한 김련숙은 1988년에 변호사자격증을 따고 겸직 변호사로 되였다.
중국의 첫 중한투자무역법률봉사 사무소 설립
중공 북경시위 당교 법률교원으로 있으면서 겸직 변호사로 있은 그는 중국진출 외국투자자가 날로 늘어남을 감지했다.
김련숙은 《당시 나는 중한수교는 시간상의 문제라고 판단하고 중한투자무역왕래가 빈번해지면 상응한 법률적수요가 많아질것임을 믿고 오매에도 기다리던 일본류학을 포기했다.》고 말한다.
1990년 9월, 아세아경기대회 자원봉사자로 보도조통역을 하는 기회를 빌어 김련숙은 한국기자들에게 중국의 개혁개방을 선전하고 1991년에는 자비로 한국에 가 중국의 투자환경을 열심히 선전하면서 중한경제무역의 법률가이드가 될 의향을 보였다.
《중한수교가 건립된 2년후인 1994년 11월 19일 저의 발기로 중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중한투자무역왕래 법률봉사를 제공하는것을 주업무로 하는 금평변호사 사무소가 창설됐습니다. 개업당일 당시 중국법학회 회장(사법부 전임부장)추유, 사법부 장경부부장과 주 중국 한국대사관 조상훈공사 등이 참석해 중한보도계를 깜짝 놀래웠습니다.》 김련숙은 웃으며 그때의 상황을 소개한다.
김련숙대표변호사가 한국무역투자진흥공사와 법률봉사계약 체결.
투자자들의 합법적권익에 나선 《수호신》
여러 면의 관계를 조정하여 대 중국 한국투자자들의 리익을 충분히 보장해주는것이 김련숙의 책임이였다.
1994년부터 김련숙은 뛰여난 소통력으로 《화해》의 방식을 리용하여 영향력이 큰 국제투자무역 분규를 해결해줌으로써 중국의 투자환경의 신용과 주변 국제환경을 조률하는데 돌출한 기여를 했다.
1996년 김련숙은 화해방식으로 단동 동항개발구 한국공업단지 중대항목을 추진하였으며 그해 국제상회규칙을 통해 4개 국 무역분규를 원만히 해결해주기도 했다.
1997년 김련숙은 북경시의 중대입찰항목인 북경갈릴리세계무역광장 투자건설중에서 국외 비금융기구인 한국대우그룹을 위해 토지사용권저당을 설정함으로써 3500만딸라의 대부금이 확실한 보장이 있도록 성공적이고 돌파적으로 처리하였다. 이 사건의 성공적인 해결은 북경시의 기초건설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사건 또한 북경시에서 경외비금융기구를 위해 토지사용권저당 설정의 첫 사건으로 해당 지방성 법규립법에 기여하였다.
2002년초 김련숙은 이름난 모 다국변호사사무소와 경쟁하여 한국 대우회사의 위탁을 쟁취, 이 회사를 위해 대련시 장하 국제항구항목건설중의 전 과정 법률봉사를 제공해주었다.
1992년―1998년 김련숙은 천진원양운수회사가 소송한 한국 현대종합상사(주) 무원본 선하증권, 하도지시서 분규사건의 한국측 대리를 맡았다. 7년동안의 시간을 들여 최종 최고인민법원이 직접 이 사건을 재심함으로써 당사자의 합법적권익을 수호했다.
2002년 5월 20일, 중국에서 발기한 첫 세이프가드(保障措施)사건중 김련숙을 팀장으로 하는 변호사팀은 한국 POSCO 등 전부 응소강철기업, 수출상과 국내 7개 외상투자기업을 포함한 생산상, 최종사용호 및 수출상(41개 기업)의 응소대리를 맡았다.
국가경제무역위원회와 대외경제무역부에서 소집한 부분 강철세이프가드 청문회에서 첫 응소측의 대표로 발언한 김련숙의 발언은 외국정부, 강철업종과 기타 위탁인 및 중국조사기관 관원들의 공인을 받았다. 그와 변호사팀이 제기한 대부분 의견은 조사기관에 의해 채납되였는바 2003년 상무부는 강철세이프가드실시를 중지하는 한편 다시는 이 조치하에서의 수입강철제품에 대한 관세를 더 징수하지 않기로 했다.
이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이프가드사건이 원만히 종지부를 찍은 사건으로 되였다.
1996년―2001년 중한 첫 마늘매매 분규사건중 김련숙은 피고 한국정부기구의 대리인으로 국제입찰관례와 중한 해당 법률을 리용하여 5년동안의 로정을 거쳐 끝내 승소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1999년 김련숙은 중국의 첫진의 반덤핌분야의 변호사신분으로 랭간압연강판(冷羅板卷)반덤핑사건, 비분광변위단모광섬유(非色散位移데模光駒)제품 반덤핑사건 등 반덤핑사건을 여러 개 처리했다.
2001년 11월 10일 중국이 세계무역기구 WTO에 가입한 후 김련숙이 인솔하는 금평변호사사무소는 중국사법기관, 주 중국 한국대사관, 한국기업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WTO와 중국법》등 전문테마로 7차례의 국제세미나를 가졌다.
2008년 개혁개방 30년에 즈음하여 김련숙 및 금평변호사사무소는 《경외로 나가야 한다》는 전략에 비추어 《금융위기배경하에서의 서택―한국투자》세미나를 소집하여 중국기업이 국문을 나서 경외로 진출하는 다리를 놓아주었다.
김련숙은 《현재까지 금평변호사사무소는 한국 현대, 삼성, SK중국, 대우, 롯데, POSCO, LG전선, 현대제철, 대한전선, 한국미래자산증권주식회사, 한국전력공사 등 기업에 법률봉사를 제공한 외 주 중국 한국대사관, 대한무역진흥공사, 주 중국 한국인회 등 기구를 위해 법률봉사를 제공해주었다.》고 밝혔다.
올해는 금평변호사사무소 설립 15주년, 김련숙이 변호사직에 종사한지 만 20년이 되는 해이다.
15년래 김련숙과 금평의 변호사들은 량호한 업무도덕으로 고객들의 인정을 받고있으며 금평이란 이름을 국내외에 날리고있다.
올림픽 그린가드매체촌 언어봉사센터의 경리
수년래 김련숙은 소수민족지역, 법률원조기금회, 독고로인 등 사회단체와 개인에게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고있다.
2004년래 그는 개인소득중의 46만원을 사회에 기부하고 중국인민대학에 《금평조학금》을 설치하여 빈곤학생들을 돕고있다. 지난해 사천지진재해구 방문에 이어 금년 4월 《조양구정협위원 손에 손잡고 활동》에 참가하여 재차 지진재해구인 십방에 가 어린이들을 위문한 김련숙은 5월 12일에 또 십방시의 형화중소학교, 홍백진소학교, 민주중심소학교의 어린이들에게 위문편지와 《6.1절》선물을 보내주었다.
2008년 봄, 52세의 나이도 불구하고 김련숙은 의연히 북경올림픽 자원봉사자에 신청, 7가지 언어를 갖춘 법률엘리트를 무어 변호사언어자원봉사팀을 조직했다. 김련숙은 올림픽 그린가드매체촌 언어봉사센터의 경리로 임명받고 36일 동안 팀원들을 이끌고 드팀없는 봉사를 하여 외국기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매체촌이 막을 내릴 무렵 김련숙이 변호사사무소의 대표변호사(사무소 주임)임을 알게 된 한 한국기자는 《변호사가 돈을 벌지 않고 자원봉사를 하다니요. 한국 변호사들은 절대 이렇게 할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의아해했다.
사회와 융합되고 진정으로 민생을 위해 일하는 그녀한테서 중국 녀변호사의 풍채가 체현된것이다.
조언: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제일 행복합니다》
기자가 조선족청년들에게 조언을 부탁하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금평변호사사무소에는 40여명 직원이 있다. 이중 4명 조선족박사졸업생을 포함해 조선족변호사가 10여명 된다. 이들은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능력이 있고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성심껏 일을 한다.
만 20년동안 변호사직에 종사하면서 조선족들이 문화수준이 높은만큼 볍률의식도 다른 민족보다 상대적으로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족들은 의리를 따지고 감정을 중히 여긴다. 좋은 점이긴 하나 사업할 때도 감정때문에 확실하게 해둘 문제를 두리뭉실하게 처리한다면 사업에서 손해를 볼 때가 많다. 합작파트너나 사장을 위해 일을 할 경우 서면계약 대신 구두로 약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사람이 말한대로 하는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숱한 수고를 하고도 나중에 서면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응당 받아야 할 부분을 잃고말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든 자신심을 가져라, 최선을 다 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제일 즐겁고 행복한 사람이다.
길림신문 홍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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