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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인민음악가 정률성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1일 10시09분    조회:6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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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가 고 정률성

●  섭이 신성해와 나란히 《중국 3대  최고음악가》로 공인
●  《새중국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100명》중 한명에 선정
●   중국과 조선 두 나라 군대 군가를  작곡한 전대미문의 기록

새중국창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중공 중앙선전부, 중앙조직부 등 중앙의 11개 부위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쌍백인물》평의에서 《중국인민해방군 군가 작곡가》 정률성이 중국 최고의 음악가 섭이, 신성해와 나란히  《새중국창건 특수기여 영웅모범인물》 100명의 한명으로 선정되였다.

나는 중국작가협회 2009년도 중점지원작품에 선정된 《정률성평전》집필을 위해 정률성의 가족, 동료, 친구들을 만나면서 가슴이 뭉클한 순간들을 많이 느꼈다.

인민음악가 정률성, 이는 정률성에 대한 중화인민공화국의 가장 높은 평가이다.

양림천은 유유히 흐르고

작년에 나는 정률성의 고향 한국 광주를 방문했다. 그가 소년시절까지 보낸 생가, 양림교회, 양림천을 두루 돌아보면서 무엇이 정률성음악을 만들어낸것일가 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정률성은 정부은이라는 이름으로 1914년 8월에 아버지 정해업과 어머니 최영온 사이에서 막내로 태여났다. 일제에 의해 한반도가 병탄된 후 1933년, 19세의 그는 셋째형을 따라 나라독립의 뜻을 안고 중국으로 떠났다.

정률성생가의 닳아서 반들반들한 나무마루를 바라보며 나는 아들 넷, 딸 하나를 모두 이 마루에서 중국으로 독립운동에 떠나보낸 정률성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큰아들과 둘째아들은 3.1운동에 참가한 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에 와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큰아들은 일제에 체포돼 옥살이를 하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둘째 아들은 중국국민혁명군에서 중교참모로 혁명하다 뇌막염으로 병사했다. 넷째아들은 중국의 조선정치군사혁명간부학교에서 학생모집임무를 맡고 중국과 조선을 드나들며 혁명했다. 그녀는 셋째인 딸 봉이와 막내아들 부은이마저 중국에 독립운동을 하러 보냈다.

무등산아래 양림천이 유유히 흘러갔다. 과연 정률성이 중국으로 떠나오지 않았던들 지금의 위대한 정률성음악이 있었을것인가? 양림천을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질문해보았다.

 


지난 9월 정률성의 부인 정설송의 집에서 정률성의 딸 정소제(오른쪽)와 인터뷰중인 작자.

 

지난 9월 9일 저명한 작사자,  중앙가극원 전임 원장, 정률성 생전 친구인 교우를 북경 순의별장에서 인터뷰했다.

그의 처녀작 그리고 신성해와의 만남

정률성은 중국에 온 후 남경조선혁명간부학교에서 맑스레닌주의, 삼민주의 등과 군사를 공부했고 조선혁명당에 가입했으며 전화국직원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의 정보를 탐지하는 등 지하활동에 종사했다. 한편으로는 매주 상해를 오가며 레닌그라드음대 교수 크리노와에게서 성악과 음악리론을 배웠다.

크리노와는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현실화시킨 중요한 인물이다. 크리노와의 음악교육을 통해 정률성은 어느 한 세계명곡음악회에서 남고음 테너선창으로 출연하기에 이르렀다. 이날의 음악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크리노와는 격동하여 정률성이 이딸리아에 가서 류학하면 동방의 카루소가 될것이라고 전망했다. 카루소는 20세기초 유럽음악계의 저명한 이딸리아 성악가다. 크리노와는 친구들을 소개해줄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이딸리아로 가라고 등을 다독였다. 하지만 혁명가였던 정률성은 이를 선택할수 없었다.

정률성은 1936년 5월 1일에 개최된 《남경 5월문예사》 설립대회에 참석하면서 음악이 가지는 혁명역할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이날 발기인 추취도가 애국의 열정을 불태운 7언시를 읊조렸는데 정률성은 즉석에서 그 시에 작곡했다. 이렇게 정률성의 처녀작이 탄생했다. 《5월 석류화 붉게 타고/ 중화 벽혈 낭자한데/원한 국치 누가 씻나/시대 청년 앞장서리》 회장은 그 노래를 부르며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날 정률성이 《아리랑》을 열창하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

그의 음악에는 아리랑이 뒤받침되여 있었다. 당시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생각했듯이 그도 중국혁명의 완성을 조선독립의 전제로 생각했다. 중국혁명에 헌신하여 나라를 되찾고 고향으로 달려가 엄마의 품에 안길 그 날을 고대했을것이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 거대한 에너지로 축적되여 혁명음악을 폭발시켰다.

정률성의 항일음악의 방향을 결정한 인연이 있다. 중국 신흥음악의 창시자이고 항일구국가곡의 창시자이며 《황하대합창》의 작곡자인 신성해다. 1937년에 로구교사건이 터지자 중국공산당은 전국에 항전선언을 했고 모든 애국자들은 반일애국투쟁에 뛰여들었다. 신성해는 프랑스류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바로 항일애국가곡창작의 선두에 섰다. 이때 정률성은 남경중앙반점에 갔다가 신성해를 만나게 됐다. 신성해는 그에게 금방 창작한 《구국군가》 악보를 넘겨주며 불러보라고 했다. 《총구는 침략자를 향해, 발맞춰 앞으로 나가자/... 중화민족 지켜내자, 영원한 자유인 되자.》 정률성은 항일구국의 호소로 불타는 그 가곡에 격동을 금할수 없었다. 정률성의 우렁찬 노래에 신성해는 무척 만족하였다. 정률성더러 상해에 와 자기와 합작하자고 제의했다. 그 소망은 이뤄지지 못했지만 신성해의 영향은 그 뒤 연안에서까지 이어지며 정률성음악형성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정률성의 연안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중국공산당 당원이고 상해부녀구국회 지도자였던 두군혜이다. 두군혜는 조선독립운동가였던 김성숙과 결혼했으며 조선혁명가들과 깊은 인연을 맺았다. 정률성은 두군혜의 영향을 받아 상해 대공영화 희곡독자회의 일원으로 거리에 나가 항일구국가곡을 가르치며 민중들의 항일정신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작곡한 《유격전가》,  《전투부녀가》, 《전시부녀가》 등 노래들은 열혈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그해 10월, 그는 두군혜의 주선으로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메고 《세계명곡집》을 품에 넣고 서안팔로군 판사처를 통해 연안으로 가게 된다.

아, 연안!

정률성은 연안섬북공학을 거쳐 로신예술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음악지도를 거쳐 태항산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에서 적들과 싸우는 한편 교육장을 담당했다. 정률성은 1935년부터 중공중앙의 소재지로 자리잡은 연안을 통해 중국해방의 희망을 보았고 조선반도를 망라한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의 미래를 보았다.

어느 석양이 아름다운 저녁, 정률성은 산비탈에 서서 생기로 넘치는 연안을 내려다보다가 곁에 서있던 로신예술학원 동창생 막야에게 연안의 모습을 노래한 가사를 부탁했다. 막야도 같은 심정이였으므로 그 자리에서 《연안을 노래하네》라는 제목의 가사를 적어 주었다. 며칠뒤 정률성은 연안강당에서 녀고음가수 당영매와 함께 이 가사에 작곡한 노래를 격정적으로 불렀다.

《석양은 산마루 보탑에 비끼고/ 달빛은 강가의 반디불 비추네/ 봄바람 광야에 불어오고/ 뭇산들 튼튼한 성새 이뤘네...》 혁명의 성지 연안에 대한 애정과 희망으로 충만된 서정적이고 전투적인 이 노래는 모택동을 비롯한 청중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이 노래를 창작할 때 그의 나이 24세였다.

《연안송》은 걷잡을수 없는 불길마냥 혁명근거지에서 적의 통치지역까지 퍼져나갔다. 저명한 음악가이고 전임 중앙가극단 부단장이였던 맹우는 북경 풍대의 딸집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적의 통치구에 있었어요. 어느날 연안에서 온 동지가 와서 가만히 〈연안송〉을 불렀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는 몹시 격동했고 혁명의 성지 연안으로 가고싶은 갈망으로 불타올랐지요.》 그녀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친구들과 함께 연안으로 달려왔다.

연안에 도착하기 전후 3―4년 동안 20대의 정률성은 음악창작의 고봉기를 맞이한다. 《연수요》, 《육탄용사》, 《항전돌격운동가》, 《시월혁명행진곡》, 《팔로군대합창》 등 50여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는데 이 속에는 불후의 명작이 많다.

《팔로군대합창》은 1939년 봄, 한 움막에 같이 있던 청년시인 공목과 함께 합작한 작품이다. 그 중의 《팔로군행진곡》은 나중에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로 채택돼 중화인민공화국력사의 한페지를 이룬다.

산이 갈라지고 바다가 쏟아지고 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섬광을 터뜨리는 웅위한 기백으로 넘치는 이 노래는 연안 혁명구를 진동했다. 그리고 전국을 뒤흔들었다.

 


학생들과 담소하고있는 정률성.

그리고 보탑산이 맺어준 사랑이여!

1938년 봄, 중경에서 혁명을 했던 19세의 사천처녀 정설송이 연안에 들어섰다. 정설송은 녀성대대장이였고 뛰여난 조직력과 미모로 인해 연안에서 이름이 자자했다.

그해 가을의 어느날, 정설송은 움집의 창턱에 싱싱한 마란화가 놓여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또 어느날, 그의 탁자우에는 책 두권이 놓여있었다. 한권은 《안나까레니나》이고 한권은 《춘희》였다.

그리고 또 어느날, 정률성이 수집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는 군복을 입고 혁띠를 두르고 다리에 단단히 각반을 친 이 단발머리 처녀에게 서뿔리 다가가지 못하고 먼저 시탐전술을 쓴것이다. 같은 리상과 가치관을 공유한 그들은 재빨리 행복한 련인이 되였다. 하지만 이런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정률성의 상해경력이 조직의 의심을 받으면서 그들의 련애는 2년간 중단되였다. 정설송은 당의 원칙을 어길수 없었다. 이때 무정장군이 나타났다. 무정장군은 유일하게 2만5천리장정을 한 조선인으로서 당의 신임을 받고있는 팔로군포병퇀 퇀장이였다. 그의 증명으로 정률성은 드디여 정치심사의 고비를 넘기고 1942년 음력설전야에 결혼식을 맞이했다.

팔로군 총사령 주덕은 음악재능이 뛰여난 정률성을 많이 관심했다. 정률성이 곧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결혼준비를 하라면서 보총을 빌려주고 탄알 두탄띠를 주었다. 정률성은 그 총으로 양을 잡아서 주양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정설송은 딸애를 낳은 뒤 젖이 없어 정률성이 목숨처럼 사랑하는 바이올린을 팔았다. 그 돈으로 양을 사서 양젖으로 딸을 키웠다. 그들은 바이올린을 기념하여 딸애의 이름을 《소제》(小提)라고 지었다.

 


정률성과 부인 정설송.

일류의 음악 일류의 인품

드디여 항일전쟁이 승리하고 정률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갔다. 정률성은 평양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 인민군협주단 단장 등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가곡을 작곡했다. 그중 《조선인민군가》의 작곡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류례없는 기록을 남긴다.

정률성은 조직의 수요에 의해 정설송과 함께 중국으로 오게 되며 북경인민예술극장, 중앙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 창작조를 거쳐 중앙악단에 소속됐다. 정률성은 드높은 열정으로 가극 《망부운》 등 많은 가곡을 창작했다.

하지만 정치운동이 빈번했던 시대에 그도 기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창작자유를 박탈당했다. 하지만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13년간 진행한 28수의 모택동시사에 대한 작곡이 그 일례이다.

그 무서운 세월에 혹시라도 련루될가봐 서로 발길을 끊는 상황이였지만 그는 투쟁을 당하는 동료들에게 직접 잡은 물고기거나 직접 만든 김치를 갖다주며 위안하곤 했다.

1976년 10월,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정률성도 창작의 봄을 맞이했다. 하지만 지나친 흥분으로 혈압이 급상승했다. 12월 7일, 그는 북경 교외 창평에서 뇌출혈로 쓰러진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정률성은 1963년 《북경만보》에 발표한 글에서 《나는 노래로써 사람들의 불평과 희망을 말하고싶었다.》라고 말했다. 정률성은 자신의 음악생애로써 이를 증명했다.

북경 순의의 한 별장에서 전임 중앙가극원 원장이고 저명한 작사자이고 정률성의 친구였던 교우를 만났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률성은 한마디로 일류의 음악, 일류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지요.》  정률성은 중국신음악운동의 선구자 및 군사제재음악 개척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화인민공화국 력사의 한페지를 기록했다.

길림신문 특별기고 리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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