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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호-영원한 백발소년
조글로미디어(ZOGLO) 2009년12월12일 13시43분    조회: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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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세상에 가더라도 붉은 넥타이만은 매고 가겠다


영원한 백발소년 오원호: 저 세상에 가더라도 붉은 넥타이만은 매고 가겠다

내 나이 올해로 85세, 머리도 하얗게 세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를 아직도 친절하게 《백발소년》이라고 부른다. 나는 이 부름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한것은 이 부름속에서 붉은 넥타이사업을 지지하는 인민대중의 마음을 읽을수있고 또 이 부름속에서 붉은 넥타이사업을 견지하는 내 자신에 한없는 영광을 느끼기 때문이다. 나는 붉은 넥타이를 사랑한다. 하기에 장장 50여년 세월을 붉은넥타이들과 어울려 살아온것이다.  앞으로도 나는 그렇게 살아갈것이다.

—오원호로인의 수기중에서

오원호로인(85세)은 장장 50여년 세월을 교외보도원 사업에 몸을 담그고 《전국우수교외지도원》(1989년) 《전국소년아동교외교양사업 선진일군》(1992년)등 허다한 영예를 따낸 《명인》이다.  85세 고령인 오늘에도 여전히 식을줄모르는 열정으로 붉은넥타이들을 위해 여생을 불태우고 계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전에 기자는 화룡시에 가서 오원원로인을 취재했다.

붉은넥타이들과의 인연

오원호로인은 1945년도에 21살 젊은 나이로 화룡에서 첫패로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하여 송하평, 안도, 돈화 등지의 토비숙청전투에 참가하였으며 돈화해방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3등 잔페군인으로 지방에 소환되여왔다. 지방에 돌아온후 화룡현 공안국에 배치되여 선후로 공안 특파원, 경찰중대 중대장, 수용소 소장 등 직무를 련임하였다. 공안사업에 참가한후 오원호로인은 적지 않은 청소년 범죄자들과 접촉하게 되였다. 그때마다 오원호로인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랠수 없었고 초조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오원호로인은 후대교양사업에 깊은 관심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952년 7월, 오원호로인은 백두산과 로령에 기여든 미장특무를 숙청하는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우고 돌아와 여러 학교의 초청을 받고 전투실황에 관한 순회보고를 하게 되였다. 오원호로인의 보고는 학생들에게 심각한 교양을 주었으며 깊은 감명과 게시를 주었다. 그때 오로인의 집은 하동촌에 있었는데 마을의 청소년들이 오로인의 전투이야기를 듣겠다고 저녁이면 집에 모여들군 했다. 여기에서 문뜩 기발한 생각이 떠오른 오로인은 이것이야말로 후대교양사업의 훌융한 도경임을 알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오로인의 집에 《소년의 집》이 처음 꾸려졌고 오로인의 교외지도원 사업이 시작되였다. 그때가 바로 1952년 12월이였다.

1963년 7월, 전국 상하가 뢰봉동지를 따라배우는 열조속에서 오원호로인은 화룡진 건설소학교의 교외지도원으로 초빙되였다. 오원호로인은 교외공안중대를 설립하고 학생들에게 뢰봉이야기독서 및 뢰봉사적도편전람 등 다양한 교외중대활동들을 펼쳐 좋은 교양효과를 보았다. 그때 오원호로인은 붉은넥타이 사업에 대한 보람을 느꼈으며 그것이 금후의 인생추구가 되는데 결정적인 작용을 놀았다.
           
10년동란의 풍운속에서도 붉은넥타이 사업 마음속에

하늘의 풍운조화를 예측키 어렵다더니 오원호로인이 한창 소년아동교양사업에 정력을 몰붓고있을때 미증유의 10년 대동란이 시작되였다. 오원호로인은 하루밤새에 연변군대내의 《9호특무》로 되였으며《교사범》으로 전락되였다. 오로인이 꾸린 교외활동실은 전복활동을 꾀하는《검은 소굴》로 치부되였고 오원호로인이 펼쳤던 붉은 넥타이 활동들은 모두《꼬마특무》를 양성하는 죄증으로 되였다.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였지만 역경속에서도 천진란만한 어린이들이 련루될가봐 오원호로인은 어린이들의 심득필기, 일기, 뢰봉사적도편과 중대활동자료들을 기름종이에 싸서 땅속깊이 파묻어 두었다. 조만간 먹장구름이 가셔지고 광명이 찾아올것이라고 굳게 믿었기때문이다.

1969년 5월, 성군구에 가서 8개월동안 갇혀있다가 석방되여 돌아온 오원호로인은 공장의 로동자로 배치받았다. 정치상에서 신임을 잃은 사람으로 되였던것이다. 하지만 오원호로인은 붉은 넥타이 사업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이 뒤에서 비웃었지만 오원호로인은 의연히 붉은넥타이들속에 몸을 담그었다. 오로인은 화룡진 전진가에《소년의 집》을 또다시 꾸렸다. 자신의 인생추구를 절대 저버릴수 없었기때문이다.

《4인무리》가 분쇄되자 오원호로인은 다시 공안국으로 돌아왔고 또다시 건설소학교 교외중대의 지도원직무를 찾게 되였다. 오원호로인은《10년동란》에서 빼앗긴 시간을 되찾아 오기위해 몇배, 몇십배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1986년, 오원호로인은 다년간 사업하던 공안국에서 정년리직을 하였다. 정년리직후 주위사람들은 이젠《아이들 대장》을 그만하고 만년에 복이나 누리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오로인은 누가 뭐라든 붉은 넥타이와는 절대 갈라질수없는 마음이였다. 아니, 붉은넥타이 사업이 과외로부터 이젠 전직으로 되였으니 만년에 이보다 더 행복한 일이 어디 더 있겠는가고 생각하였다.

1988년 11월, 화룡현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가 성립되면서 오원호로인은 위원회 부주임으로 당선되였고 더욱 활기찬 붉은넥타이 사업을 펼쳐나갔다.

《길림성청소년사업선진사업자》(1982년)
《길림성 로동모범》(1985년)
《전국 우수보도원》(1984)
《공안부2급금질영예상》(1991년)
《전국소년아동교외교육선진사업자》(1992년)
《길림성새일대관심영예》(2001년)
《주 새일대관심 20년 특수기여상》(2009년)…

오원호로인이 붉은넥타이사업을 하면서 받아안은 국가와 성, 주, 시 유관부문으로부터 받아안은 영예들은 이루 헤아릴수조차 없이 많다.

허다한 영예의 뒤에는 오원호로인의 붉은넥타이사업에 대한 드높은 열정과 신근한 땀방울이 스며있다.

정년리직후 오원호로인은 시간이 많아지니 모든 정력을 붉은 텍타이 사업에 돌렸다.

원래 화룡시 실험소학교 한개 중대교외지도원을 맡던데로부터 화룡시 4개중대 교외지도원사업을 맡았으며 룡정시 북신소학교 교외지도원으로도 초빙되였다. 5개점을 둔 외에도 오원호로인은 교양사업을 전반 화룡현을 대상하는데로 나아갔고 초청에 의해 주내 일부 학교들의 과외보도원사업도 진행했다. 화룡에서 나서 자란 현재의 30 , 40대들이라면 적어도 한두번쯤은 오원호로인의 애국주의 교양과 혁명전통교양 및 법제교양을 받아보았을것이다. 그만큼 오원호로인의 이같은 붉은텍타이 사업은 한세대, 또 한세대의 붉은넥타이들을 영향주었고 그들이 사회주의현대화건설의 건설자로 되는데 모름지기 커다란 작용을 놀았다.

저 세상에 가더라도 붉은 넥타이만은 매고 가겠다

지난 12월9일, 화룡에서 만난 오원호로인은 85세 고령의 로인이 아니였다. 고령의 로인답지않게 층계도 씨엉씨엉 올라갔고 얼굴에도 젊은이들처럼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는 자기가 이렇듯 건강하고 힘찬것은 모두다 평소 꾸준히 몸을 움직이기때문이라고 말했다. 오원호로인은 평소에도 그냥 40년이나 탄 자전거를 끌고 다니는데 몸단련에 도움이 크다고 말했다.

지난해는 력사적인 올림픽이 우리 나라에서 개최되고 또 모택동지가《뢰동동지를 따라배우자》는 제사를 쓴 45돐이 되는 해였다. 이에 따라 오원호로인의 원 소속단위인 화룡시공안국에서는 혁명전통교양에 관한 문건을 발부하였다. 오원호로인은 《뢰봉정신으로 올림픽을 영접하자》는 주제로 된 도편전람을 조직하고 3월4일부터 4월5일까지 한달사이 전시 8개 향진 32개 단위, 22개 학교, 10개 부대, 기관 등을 돌면서 도편전람활동을 진행했다. 그동안 오원호로인은 아침이면 20키로가 넘어되는 도편전람도구들을 자전거에 싣고 나갔다가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군 했다. 그러면서 자전거로 복동, 서성, 동성, 남평 등 주변 향진의300여키로메터나 되는 로정에 발자취를 남겼다.

한번은 화룡시가지와 30여키로메터 떨어진 서성진에 가서 도편전람을 하고 돌아오다가 자전거다이야가 터지는 바람에 몇십리길을 자전거를 밀면서 밤늦게야 집에 돌아온적도있다.

오원호로인의 가장 인상에 남는 한차례 도편전람은 학생 3명에 교원 5명밖에 없는 화룡시 남평소학교에서 도편전람을 가졌을때의 일이다. 그날 자전거로 학교에 당도해보니 학생 3명 가운데 1명은 병으로 학교에 못 나오고 2명만 있었다. 오원호로인은 선생님들과 함께 난로불을 지피고 1시간 반가량 정말 진지하게 애들에게 애국주의 교양과 혁명전통교양을 진행했다. 갈수록 조선족인구의 감소와 함께 농촌소학교의 조선족학생수가 줄어들고있다. 그러나 오원호로인은 학생들이 적다고 애국주의교양을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대부분 농촌학교의 학생수는 적지만 오원호로인은 한곳도 빠뜨리지 않고 도편전람을 끝까지 견지했다.

지난 한해에만해도 오원호로인이 전시 각지를 돌면서 조직한 도편전람 참관인수는 연인수로 9000여명에 달한다.

오원호로인은 새로운 시기 뢰봉 등 선진전형인물들의 정신을 통한 애국주의교양과 혁명전통교양, 법제교양은 아주 필요하고 의의있다고 말한다. 올해에도 오원호로인은 연인수로 800여명 학생들에 대한 혁명전통교육과 애국주의 교양, 그리고 법제교양을 진행했다.

《이제 남은 인생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죽는 순간까지 붉은 넥타이들을 위해 살겠다》는것이 오원호로인의 향후 타산이다.

오원호로인은 평생에 남은 재산이란 당과 정부에서 준 영예의 메달들과 상장, 기념품 그리고 수십년간 수집해놓은 소년아동교양자료들과 교외활동성과자료들뿐이라고 말한다. 오원호로인은 이 모든것이 후대교양에 참고가 되고 유용하게 쓰이도록 몽땅 소년아동교양기관에 바치겠다고 말했다.

《저 세상에 가더라도 붉은 넥타이만은 매고 가겠다》고 말하는 85세 고령의 오원호로인은 진정 영원한 《백발소년》이지 않을수없다.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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