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책의 본명은 김락(쏜€{e), 혁명사업의 수요로 김인식, 김홍인, 김인, 라동현 등 여러가지 이름을 썼다. 그는 1903년 8월 14일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 학상면 방평촌에서 태여났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나어린 김책도 가정을 따라 중국 길림성 연길현 평강기성촌에 와서 생활하게 되였다. 가정살림이 가난하여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남다른 총명한 재질로 야학교에서 고심히 배운데서 조선어를 정통했을뿐만아니라 한어구두능력과 문자수준도 크게 제고되였다. 이는 금후 혁명사업에 종사하고 항일지도자로 부상하는데 튼튼한 토대로 되였다.
지하당사업으로부터 혁명에 투신
김책은 어려서부터 진보적사상의 영향하에 형님 김홍선(김성), 동생 김종희와 함께 혁명활동에 참가하였다. 1925년 만주조선청년운동, 농민운동이 보편적으로 조직되였다. 김책은 연길현에서 청년운동에 참가하였으며 1926년 겨울에는 리주화(쟀鷺뵨)의 소개로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뛰여난 재질과 사업능력으로 1927년 조선공산당 재만총국으로부터 북만도집행위원으로 제발되였다.
1930년 5월 국제공산당의 “1국1당”정책과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김책은 1930년 7월 27일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동경성지부 조직간사를 담임하였다. 이해 8월 동경성당지부가 중공동경성구위로 되면서 김책이 구위서기를 담임하였다. 10월에는 녕안현위에서 녕안현쏘베트림시정부를 성립했는데 김책이 주석을 담임하였다. 1930년 11월 28일 김책을 비롯한 6명이 국민당군대에 체포되여 할빈 호로군사령부 구류소에 압송되였고 이듬해 9월 길림성감옥으로 옮겼다가 후에 봉천(심양)감옥으로 넘겨 7년 도형을 받았다.
1931년 “9.18”사변후 김책은 허형식(리희산) 등 여러 지하당원과 함께 석방되여 할빈특위의 령도하에서 사업하였다. 1932년 1월 할빈특위에서는 김책을 당시 길림성정부 소재지인 빈현의 중공빈주특별지부서기로 파견하였다. 김책은 빈현에 도착한후 허형식과 함께 빈현의 첫 특별지부를 농촌에다 건립하고 지하당조직을 발전시켰다. 1년 남짓한 기간 조선족과 한족 당원 33명, 4개의 지부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단원과 “항일회”를 조직하여 군중들속에서 반일선전을 널리하여 새로운 국면을 열어놓았다.
1933년 1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김책을 주하중심현위 위원 겸 마이하동 당지부서기로 전근시켰다. 이해 가을 김책은 리복림과 함께 마이하동에서 천여명이 참가한 반일시위행진을 조직했다. 그때 시위에 참가한 로항일전사 량재문의 회억에 의하면 당시 천여명 시위자는 포위되여 사흘밤낮 꼼짝못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후에 김책은 주하중심현위 비서장, 서기 등 직무를 력임하였다.
유격구를 개척하고 항일부대를 확장
1933년 10월 10일 주하중심현위에서 창건한 주하항일유격대는 13명밖에 안되였지만 한달만에 40여명으로 발전하여 유격대대로 편성되였고 1934년 6월 29일에는 이미 500명의 대원을 가진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재편성되였다. 지대산하에는 3개 종대, 9개 대대, 27개 중대가 있었는데 조상지를 사령으로, 리조린을 정위로, 리복림을 당위서기로 임명했고 김책은 제3대대 정치지도원으로 파견되였다가 7월에는 지대사령부 군수처장으로 임명되였다. 1935년 1월 합동지대는 삼고류에서 청년의용군을 받아들인후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으로 확건되여 산하에 1개 사, 3개 퇀을 두었는데 김책이 제2퇀 정치부 주임, 3월에는 1퇀 정치부 주임직을 맡았다.
1935년 10월 새로운 투쟁에 적응하기 위해 3군은 원래의 3개퇀으로부터 5개퇀으로 확건되였다. 김책은 제4퇀 정치부주임으로 임명되였는데 퇀장은 호귀림이고 전퇀의 70여명 관병들은 의란, 벌리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듬해 봄, 김책은 부대를 이끌고 보청, 밀산 일대로 원정하여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했다. 당시 보청현일대에 국민당반일병사들로 구성된 《천덕대》란 부대가 있었는데 지휘자 리명순(그때는 천덕이라 불렀음)은 일군과 자위군을 몇번 습격하여 일정한 전투성과는 올렸으나 내부 대원들이 소질이 낮고 규률이 산만하고 명령에도 제대로 복종하지 않아 골머리를 앓고있었다. 그는 군중들의 찬사를 듣고 김책이 인솔하는 부대에 호감이 생겨 부관 진유재를 파견하여 김책을 찾도록 하였다. 리명순의 요청에 의해 김책은 전체 관병들에게 형세보고를 하였다. 김책의 생동하고 구체적인 강연은 관병들의 심금을 울렸으며 어떤 병사들은 눈물까지 흘렸다. 김책의 연설을 통해 리명순과 그의 대원들은 공산당은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고 문무에 정통하고 흉금이 넓으므로 그야말로 전민족의 항일의 령도중임을 떠멜수 있다고 인정하고 천덕대대호를 취소하고 무조건 3군4퇀에 편입하였다.
김책이 이렇게 항일무장력량을 장대시킨 실례는 한두번이 아니였다. 1935년 10월 3군 각 퇀은 사로 개편되였는데 김책은 제4사 정치부 주임으로 임명되였다. 6월 4사는 60여명 전사들을 의란, 벌리에 남겨 투쟁을 견지하는외에 나머지 부대는 김책과 호귀림의 인솔하에 제4군의 리연록부대와 같이 보청현으로 원정하였다. 김책은 원정할 때 4군군부와 같이 행동하면서 4군의 정치사업도 책임졌다. 하여 그때 4사는 3군의 모범부대로 되였다. 7월중순 간고한 원정을 거쳐 부대는 보청현 란화정자동부(?quot;뇔?t앺?{1꼬)에 도착하여 새 유격구를 개척했다.
1936년 8월 1일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은 정식으로 동북항일련군 제3군으로 개편하고 산하에 10개사를 두었다. 김책은 제4사 정치부주임직을 맡았다. 4사와 10사는 의란, 화천, 벌리, 보청, 부금, 수빈, 라북, 밀산, 호림, 요하 등 현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 가을 위만주국군정부는 일본관동군사령부의 “치안숙정강요”(撈갛???V몎?에 따라 빈현, 목란, 통하, 탕원, 의란 5개현을 중심으로 하는 토벌계획을 제정하고 9월부터 항일유격구를 포위하고 진공했다. 이때 항일부대는 중공중앙과 련계가 끊어지고 만주성위는 국제공산당주재 중공국제대표단의 직접적인 령도를 받게 되였다. 형세를 바르게 인식하고 금후의 방침정책을 결정하고저 9월 18일 3, 6군당위와 주하, 탕원 중심현위에서는 탕원 모아산 3군피복공장에서 련석회의(주탕련석회의라고도 간칭)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성립하고 풍중운을 서기로 하는 7명 상무위원을 선거하고 조상지를 집행위원회주석으로 하는 15명 집행위원을 선거했는데 김책이 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37년 “7.7”사변후 3군4사는 대부분이 기병으로 편입되여 밀산, 호림 변경지역에서 활동하면서 부단히 적들을 타격하며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동년 10월, 일위군들은 집중하여 보청일대로 진공하여왔다. 적들을 효과있게 견제하고 동시에 강적과의 정면접촉을 피면하기 위하여 김책의 제의하에 4사의 부분 기병과 6군1사의 도합 250여명 인원을 모범사로 련합편성시킨후 요하 무원경내로 들어갔다. 그해겨울 제7군과 합동하여 우쑤리강연안에서 적들을 습격하여 역시 일정한 승리를 거두었다.
1937년 10월, 중공북만림시성위 제6차상무위원회의에서는 김책을 성위에 전근시켜 성위상무위원, 선전부장 겸 3군정치부주임을 담임하게 하였다. 조상지는 3군 선전과장 우보합을 파견하여 벌리4사 밀영에 가서 김책을 대체하게 하였다. 하지만 그당시 김책의 발상처가 채 낫지 않았고 사업도 미처 교대하지 못했기에 조상지에게 편지를 띄워 아직은 떠나지 못하겠다고 기별을 보내고 계속 4사를 거느리고 밀산, 호림 변경지구에서 적들을 족쳤다.
서정하여 적들의 “토벌”과 “소탕” 분쇄
1938년초, 일위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송화강하류일대의 항일유격구와 근거지에 발광적인 토벌을 감행하여 항일부대의 손실은 날로 커갔다. 이런 형세하에 북만림시성위는 6월에 통하현경내에서 제8차 상위회의를 열고 항일련군 제3, 6, 9, 11군을 조직하여 서북으로 두번째 원정을 하여 적들의 포위를 뚫고나갈데 대하여 결의를 지었다. 회의결정에 따라 김책은 하강지구에서 3군의 제3, 4, 10사를 정돈한후 1938년 8월 7일 원 3군3사 정치부주임 후계강 등 70여명 대원을 이끌고 보청으로부터 출발하여 송화강을 건너 라북 오동하하류에서 6군3사 사장 왕명귀의 부대와 같이 서북의 원정길에 올랐다. 9월 6일 원정전사들은 한사람이 옥수수 네이삭과 약간의 식량을 가지고 련속 며칠간의 행진을 거쳐 수빈에 도착하여 거기에서 장수전(리조린)의 부대와 합친후 계속 서정하였다.
김책이 거느린 부대가 수빈1, 2, 3구평원의 좁은 삼각지대에 이르렀을 때 일본위군의 2개 퇀과 국경경찰부대의 추격을 부단히 받았다. 김책은 급행진으로 적들을 떼버렸다. 그때 부대는 련 며칠간 식량이 떨어지고 게다가 늘 비가 왔기에 악렬한 환경에서 행군은 아주 간고했다. 그러나 항일전사들은 누구나 동요하지 않고 산나물, 과일로 때를 이으면서 계속 전진하였다.
9월 10일 김책이 부대를 거느리고 도로하(떼?붉)북쭉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불어서 전진도로가 가로막혔다. 마침 당지 군중들의 지원하에 자그마한 배로 30여차례에 걸쳐 부대와 말들은 강을 건너게 되였다. 부대는 계속하여 학립방면으로 진군했는데 학립부근의 왕싸즈툰에서 위자위단을 쳐부시고 군사물자를 얻게 되였다. 부대가 류가툰부근에 이르렀을 때 탕원현의 300여명 위치안부대가 뒤를 쫓아왔다. 적의 예봉을 피하고 병력을 보존하기 위해 김책은 소수 기관총사수들을 조직하여 석장골에서 저격하게 하고 대부대는 에돌아 전진하게 하였다. 과연 적들은 매복에 걸려 몇십개의 시체를 던지고는 산아래로 도주했다. 아군은 한명의 상망자도 없었다. 김책은 부대를 거느리고 무인지경에서 가시덤불을 헤치며 간고한 행진을 거쳐 1938년 10월 8일(음력 8월 15일) 수릉현 장가완 강가의 백마석일대에 도착하여 풍지강과 새로 평성한 3군 3사 사장 허형식, 부사장 장광적과 회합하였다.
중공북만성위 서기의 중임을 떠메고
서정부대가 흑눈평원에 도착하여 새로운 유격활동이 개시되자 중공북만림시성위에서는 1939년 3월 9일 철리에서, 4월 12일에는 통하에서 제9차상무위원 2차집행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중공북만림시성위를 정식으로 북만성위로 개칭하고 김책을 서기로, 장수전을 조직부장, 풍중운을 선전부장으로 선거하였다. 김책은 북만성위서기로 된후 주요하게 경성, 수릉, 철리 산구에서 활동하면서 전반 항일투쟁과 지방사업을 지도하였다.
그는 항일부대에서 골간을 선출하여 3조(조원, 조주, 조동현)를 경성, 눌하 등지에 파견하여 항일을 선전하고 군중을 발동하여 중공3조지구 공작위원회(룡강공위라고도 불렀음), 중공눌하현위, 중공경성지부 등 당조직을 건립하였다. 북만성위에서는 북만항일구국총회도 건립했는데 김책이 회장직을 맡았다. 하여 지방에서 당원 수십명, 항일구국회원 수백명을 발전시켰다. 그 간고한 나날에도 김책은 들끓는 항일열정과 책임감으로 북만성위의 기관간물인 《통일》을 꾸렸는데 1939년 6월부터 1940년 8월까지 도합 10기를 출간하였다. 그는 《통일》에다 “당조직을 건전하게 하기 위해 투쟁하자”란 글을 발표하여 북만당 투쟁의 력사경험을 총화하고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명확히 제기하였다.
김책은 일을 처리할 때 아주 침착하고 결단성이 있고 모략이 있는 령도인재였다. 1940년 가을, 하루는 그가 로금구(일쏜?") 심산밀영에서 문건을 쓰고있는데 돌연히 12명의 농민차림으로 손에 총을 든 사람들이 나타나 항일부대를 찾아온 산림대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비록 농민옷차림을 했지만 언행이 자연스럽지 못했기에 김책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그때 성위의 주재지에는 김책과 그의 부인 안경숙과 비서 김창택뿐이였다. 김책은 모르는척하고 그들과 숨박곡질을 하였다. 기실 일전에 안방하상류에 있는 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이 소진붕을 위수로 하는 경성의 12명 특무가 로금구성위 주재지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받고 인차 교통원을 파견하여 적들 먼저 김책에게 소식을 알리고 특무들을 대체하도록 하였다. 이튿날 저녁무렵에 교통원 유란각이 700여리의 길을 뛰다싶이하면서 성위주재지에 도착했다. 그는 비밀리에 김책에게 급보를 전했다. 원래 이놈들은 변절자의 고발로 성위를 털러 왔던 특무들이였다. 김책은 특무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유란각과 대책을 상론한후 식사지점을 바꾸는 방법으로 적들이 총둔 곳을 떠나게 한후 무기를 압수하고 지혜롭게 특무들을 몽땅 생포했다.
김책은 옳바른 결책으로 북만당과 항일부대를 지도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대쏘전쟁준비를 위해 동북에 대량의 병력을 증파하였는데 1934년의 30만 병력으로부터 1941년에는 70만으로 증가되였다. 이런 준엄한 형세하에서 김책은 3로군 제6, 12지대를 지휘하여 줄곧 1943년말까지 소부대활동을 견지하며 일제의 후방을 부단히 교란시켰다.
1938년 6월이후 동북항일련군은 일제의 끊임없는 “토벌”과 “소탕”으로 유격근거지는 거의 파괴되고 양정우, 왕덕태, 하운걸, 리복림, 등 우수한 고위급지휘관들이 희생되였고 1940년말에 이르러 부대는 천여명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정황하에서 1940년초와 1941년초, 쏘련 하바롭스크에서 중공 북만, 길동, 남만성위와 각로군의 책임자가 참가한 두차례의 대표대회를 열었다. 회의에서는 김책, 위증민, 주보중으로 3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쏘련경내에로 항일부대를 이동시켜 장기투쟁을 견지하자는 방침을 제출하였다.
1941년 7월 10일 야영당조직과 주보중의 건의에 의해 쏘련방면의 대표 왕신림은 김책을 제3로군 정위로 임명하는데 찬동한다고 하였다. 김책은 7월 13일에 쏘련을 떠나 중국동북으로 돌아왔다. 여러가지 악렬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10월중순에야 김책은 수릉, 경성일대에 있는 제3로군 총부에 도착하여 장수전과 만나게 되였다. 그는 장수전과 토론한후 3로군총참모장 허형식에게 편지를 띄워 3로군의 주력부대를 쏘련경내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허형식은 총부의 편지를 받은후 제6, 9, 12지대 인원을 집중하여 6지대 정위 우천방의 인솔하에 백여명의 관병을 11월에 쏘련으로 보내여 휴식정돈하고 학습하도록 하였다.
북만항일련군의 주력부대가 철거한후 김책은 허형식과 함께 계속 북만에 남아서 2개 소부대를 인솔하여 항일구국회를 발전시키고 량식을 장만하고 적정을 정찰하면서 투쟁을 견지했디.
동북전장에서 끝까지 싸우다
1942년 3월 19일 제3로군 총지휘부에서는 김책이 발에 상처가 있어서 악렬한 환경하에 행동하기 불편하므로 우천방에게 김책의 사업을 대체하게 하고 김책은 쏘련에 돌아와 휴식하도록 하였다. 김책은 이에 감사를 표하고 계속 동북에 남아서 투쟁을 견지하겠다고 하였다. 우천방과 같이 온 6명의 대원도 계속 남아서 활동하였다.
가을이 닥쳐호자 겨울준비를 위해 김책은 소분대에 경찰서나 자위단을 치도록 지시하였다. 3로군 6지대정위 우천방, 12지대 정치부주임 박길송, 지도원 장서린은 3개 소분대를 거느리고 파목동(파언, 목란, 동성)일대에 들어가 군중을 발동하고 유격전을 벌려 선후로 경성의 대라진, 목란의 석두하자와 대귀진, 파언의 4간묘 등지의 경찰서, 촌공소와 자위단을 습격하여 일위군경과 한간들을 호되게 족쳤으며 군중들속에 또다시 항일의 씨앗을 뿌렸다. 이 세개 현에서 14개 항일구국회와 13개 청년의용대를 건립하여 회원이 천여명에 달하고 농민무장대도 600여명에 달했다.
이때 룡남지구의 1호수장으로 불리우는 허형식이 파목동지구의 사업을 검사지도하고 총지휘부밀영으로 돌아오던중 8월 3일 아침 소령하부근에서 200여명 위만산림경찰들에게 포위당해 치렬한 전투를 벌렸다. 그는 적 40여명을 쓸어눕히고 장렬히 희생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33세밖에 안되였다.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3로군장이며 북만성위 상무위원인 허형식은 그의 제일 친밀한 전우였다.
김책은 비통한 심정을 누르며 10월상순 경성남산에서 룡남지구 소분대 간부회의를 열고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며 적들을 호되게 타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소분대 34명을 3개 소분대로 다시 편성하였다.
룡남회의후 김책은 류철석, 장향동을 데리고 적들의 정황을 정찰하고 후방량식을 지키면서 계속 항일투쟁을 지휘하였으며 몇개월후 “반일구국회”를 조직하여 군중사업기초를 닦아놓았다.
1943년 겨울 쏘련 야영에서는 6명 인원을 파견하여 김책을 쏘련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쏘련항일련군 교도려 야영에 돌아온후 김책은 중국공산당동북위원회 위원 겸 동북항일련군 교도려 제3영 정치위원으로 사업했다.
1945년8월, 항일전쟁의 최후승리를 앞두고 중공동북당위에서는 항일련군의 한족동지들은 중국에 돌아가서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동북을 해방하고 조선동지들은 조선으로 나가 조선로동당 건설에 참여하라는 결정을 지었다. 하여 김책은 근 20년간 피땀을 흘리며 싸워오던 북만대지를 떠나 김일성, 최용건 등 300여명 항일장병들과 함께 조선으로 갔다. 조선에 돌아간후 김책은 조선로동당중앙위원휘 정치국위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을 담임하면서 조선의 건설발전과 국방사업에 모든 심혈을 몰부었다.
1951년 1월 13일, 그는 아쉽게도 심장병으로 서거하였다.
압록강 수풍땜을 시찰하고있는 김책
인터넷료녕신문 최광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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