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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성, 조선민족의 자랑스러운 외교관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2월2일 10시37분    조회:19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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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삼촌 金苏城은 조선 민족의 자랑스러운 외교관

외삼촌 김소성(金苏城)은 1950년 중국 주(驻)평양 령사관(外事机构)에 파견되여서부터 근 반세기 외교관직에 종사하셨다. 중국 외교 사업의 창시자인 주은래 총리는 중일 외교에 비중을 제일 많이 두었고, 외삼촌 김소성을 직접 령도하여 중일 외교의 주요직무를 초기부터 담당케하였다. 외삼촌께서는 중국과 세계각국 인민의 우호 발전을 위해 혼신을 쏟고 공헌을 세워 1991년 중국인민 대외우호협회로부터 영예증서를 발급 받았다. 외삼촌은 중국 조선족 걸출한 직업 외교관이였으며, 국가 수령 ,주요령도들의 중요한 외교 담화 조선어 통역 담당자였고 국제에서 인정하는 일본통이였다. 외삼촌 김소성은 우리 조선족들에게 긍지와 자호감을 주는 전기적 인물이였다.

1925년,로씨아 해삼위소성읍(海参威苏城镇)에서 출생한 외삼촌의 이름을 지명에 따라 김소성으로 지었다. 한국 전라남도에  살던 외조부님은 일제의 등쌀에 못배겨 로씨아로 살길 찾아 갔다가, 수년후 중국 연변 두도구(头道沟)로 이주했다. 두도구 소학교에서 외삼촌은 어느 과목이나 우수했으나 가정 생계가 어려워 13세부터 기차역전의 잡일을 했다.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진으로 이주했으나 그곳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이 뒤따랐고 외조부까지 세상뜨셔 살기 더 어려웠다.  

이즈음,외가집은 여섯 식구였는데 외할머니, 큰외삼촌, 둘째 외삼촌, 어머니. 셋째 외삼촌 (김소성), 그리고 막내 이모가 있었다. 둘째 외삼촌이 거리 떡을 사먹고 난치병에 걸려 생활이 더욱 쪼들리자 큰 외삼촌은 치산(治山)농막에서 자결했다. 외가집 기둥은 세살우인 김소성의 누님 김전남이었다. 누님 김전남이 로비를 마련하고 일본 고학을 제안하자 김소성은 흔쾌히 수락하고17세 봄 고학길에 올랐다. 동경에서 야학, 낮에는 삼륜차 운전외, 목도를 메고 무거운 철도 레루 운반 작업을 많이 한 연고로 오른쪽 어깨가 처졌다.태평양 전쟁이 극도에 치닫던1944년 추기, 일본의 징병을 피해 귀국하여 소학교원을 담임했고 이듬해, 일본 관동군 사령부 통역으로 징병되였다. 해림현 산시진(山市镇)소학교 광장 환송모임, 외삼촌은 일본군복 차림으로 광복을 위해 항일투쟁할걸  호소했다.

조선인은 성명까지 일본말로 불러야했던  준엄한 나날, 조선말은 절대 금지였으나 외삼촌은 조선말로 높히 웨쳤다.헌병 한개 련대의 삼엄한 경계속에서 수천명 군중을 향해 항일의 목소리를 높혔다는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였다.항일을 호소할때 군중들을 발동하여 호응하며 헌병들을 차단하던 누님 김전남의 치밀한 협조하에, 목단강역, 변소에서 군복을 벗어 똥물에 처넣고 민첩하게  평상복을 갈아 입은후, 반대 방향 렬차에 오른 김소성은 귀가하여 치산 깊은 산속에 은페, 일개월후 또 통화 어느 탄광으로 피신했다. 김소성을 놓친건 일반군인 백사람을 놓친것보다 손실이 커서 일본관동군은 눈에 쌍불을 켜고 찾았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관동군 사령관 통역은 높은 벼슬이였고 죽을 위험도 적어 친일파였다면 어깨 살리고 가입했을것이다.

8.15광복을 맞았다. 외가집은 도문시로 이주하였고,21세의 외삼촌은 도문~장춘 철로 렬차원,렬차장으로 부임했다. 그동안 돈없는 수많은 조선인 승객들을 면비로 운행시켜주었다. 가난속에서 성장한 외삼촌은 구차한 사람들을 제일 동정했고 열심히 돌봐주었다. 1946년 도문시 공안국 취직, 사업에 열중하고 중,조,일 삼국어가 능통하여1950년 봄,주(驻)평양 령사관(外事机构)에 파견되였다.1953년말 귀국전야, 평양에 도착한 주은래총리가 김일성 수상에게 웃으면서 “당신은 김소성이 조선족인걸 몰랐지요?” 라고하자, 김일성 수상은 무릎을 탁 치면서  “내가 김동무에게 4년간 깜쪽같이 속았습니다!” 라고 감탄을 보내셨다고한다. 국제 관계 요소로 신본을 한족으로 림시 고친후, 주은래의 약속을 지켰던것이였다. 귀국후 장기간 김일성 수상은 년년히 고려삼 등 선물을 보내왔고 조선중앙간부로 취임할걸 수차 요청하였다. 

외삼촌은 조선 전쟁때 팽덕회와 김일성의 담화 통역을 담당했는데 팽덕회가 자신의 년령이 많음을 리유로, 일개국 수상인 김일성을 “쇼찐/小金”이라고 칭하여 안쓰러운적이 많았다고 말씀하셨다.

귀국후 중앙 외교부 아시아 사 (亚洲司)를 담임하여 모택동,주은래,류소기 등 국가 령도들의 중요한 외교담화 통역을 전문 담당하였다. 류소기는 김일성과 담화시 대국을 턱대고 의자받이에 기대여 머리를 뒤로 젖히고 오만스레 “흥,흥…”대답을 던지군했는데 역시 곤혹스러웠다고 하였다.

김일성 수상은 팽덕회, 류소기와 담화시 소국의 “대접”을 받군했지만 담담한 모습으로 대화를 끝내군하였다고 하였다. 김일성 수상은 한어가 익숙하므로 모택동과 담화할때 통역에 혹간 차이점이 있으면 “김동무, 그대목은 내가 직접 말씀드리기오.” 라고 시정하면서 중국어로 직접 대화하셨단다.

 김일성은 조선의 성산 백두산 판도(版图) 문제로 세차례 모택동을 찾아 왔지만 번마다 좋은 결과가 없었다. 마지막 담화때 모택동은 팔을 내흔들고 “내팔을 하나 잘라 가라!”하면서 막무가내로 거절하여 무결되였다.

주은래는 궁리끝에 기존의 백두산 천지 경계선을 중국쪽으로 옮겨 조선의 천지를 더 넓혀주는것으로 최선을 다하였다. 두만강,압록강 국경선도 수심이 깊은 곳으로 정했는데 주은래의 노력이 컸다고 하였다.

한국의 일부분 사람들이 “김일성이 6.25전쟁값으로 백두산을 팔아먹었다.”라고 말하는데 무지한 편견에 불과하다. 력사는 공정하며 공평하게 론해야한다.이데오르기 차이로 함부로 난설함은 금지돼야한다.(한국의 막강한 친일파 세력이 정계, 언론계, 공상계를 엄연히 틀어쥐고 국민들을 괴롭히는 현실을 어떤 시점으로 볼것인가?!…이런 상황에서 7천만의 통합을 과연 이룩할 수 있단말인가?!통탄할일이다!)

김일성 수상은 귀국전 답연을 동방식 두레상에 귀빈들을 모셨다.거기에 쌀밥까지 올려놓아 중국 관원들의 절찬을 받았다고 하였다.그때까지의 서양식, 긴 식탁에 기립자세로 음주로 끝내는 겉치레 초대문화를, 의자에 편케 앉는 동방식으로 바꾸고 음주후 식사까지있었으니 래빈들은 사십초반의 젊은 수상을 높히 평가하였다고 하였다.연회석 (50년대) 귀중한 조선 사과를,부인들이 탐하는 눈치를 알고 애들을 먹이라고 고루 나눠주어 참말로 감지덕지했다고 하였다.

1955년,외삼촌은 중국인민대학 외교전업을 졸업하고 외교부 일본과에 조동되였다. 중앙 외교부는,수교전 국가의 외교 사업을 처리하는 외교부 소속 <중국인민 외교학회>의 일본처,처장으로 외삼촌을 부임했다. 그리하여 주은래,료승지(廖承志)의 직접 령도하에 중일 민간외교사업을 진척해나갔으며, 외삼촌은 그 당시 대일외교 < 8대금강>의 한사람으로 부상했다.동란시기 강서성 <5.7>간부학교 벼농사에 수년간 종사, 1971년 여름  복직, 대일외교 최전선에 재 참여하셨다. 주은래의 외교 생애중 가장 많이 회견한 외빈이 일본사람들이였는데 외삼촌은 신중국 최초의 대일외교사업부터 착수했기에 절대 다수 회견 활동에  동참하였다.

1974년, 중국 주 일본 대사관에 파견된 외삼촌은 일등비서장,참잔관(参赞官)요직에 계셨는데 성품이 온화하고 일처리에 능숙하여 어려운 문제는 모두 외삼촌께서 해결했다.하여 동사들은 외삼촌을 “김통수(金大帅)”라고 즐겨 불렀다.외삼촌은 일본 각계 인사들을 광범히 사귀였고<연변의학원,일본 성서대학(城西大学)우호합작협정>을 맺어주어 생물학 연구, 장백산 동식물 자원 탐구등 학술 교류에 혁신을 일켰고 조선족 자치주 의학 발전에 눈부신 공헌을 기여했다. 그리고 또 흑룡강성장 진뢰(陈雷), 부성장 왕군(王军)등 령도들을 도와 일본의 재벌들을 투자,고무하여 흑룡강 삼강 평원을 크게 발전 시켜주기도 하였다. 불모의 땅 삼강평원은 콩, 옥수수, 입쌀 등 오곡이 천문숫자로 쏟아지는 곡창으로 변했다. 

외삼촌은 1962년부터 농촌을 수차 방문하셨는데, 편안히 앉으시라고 담요를 펴드리면 마다하고 농민들과 같이 삿자리 펴놓은 온돌방에 앉아서 허물없이 이야길 수일간 나누군하셨다. 밥상의 고기 반찬은 언제나 상대에게 밀어붙히고 김치,된장국을 쌀밥과 푹푹 떠서 잡수시던 외삼촌의 고질적 소박한 모습이 력력히 떠오른다. 민족 문화와 얼이 뼈속에 푹배인 외삼촌은 국제급 연회석을 초월하여 김치와 토장국을 못잊으며 평생 선호하셨단다.

세상의 한다하는 벼슬 아치들은 대머리, 만삭배, 청와(青蛙)목, 소도적상 스타가 보편인데,외삼촌은 훤칠한 키에 주은래 후배다운 잘난 남자였다. 하건만 시골 농민들과 신통히 어울려 농부들은 당신을 농민으로 착각했습니다. 겨울 방문시는 울바자안,덩실한 벼짚무지우에 새 창애를 놓고 참새를 잡아 화로 숯불에 구워 맛갈스레 잡수셨는데, 당신에게는 동심을 떠올리는 진귀한 챤스였겠지요?! 창애에 노오란 벼 이삭을 끼우고 새들이 미혹되게 흰눈으로 깐깐히 위장하는 작업을 당신은 빨갛게 언손을 입김으로 홀홀 불면서 시범하셨습니다! 약사빠른 참새떼들도 외삼촌의 창애에는 벗어날길 없어 하루에도 십여마리가 흰 눈우에 조약돌처럼 나뒹굴었답니다! 아! 다시 못올 쾌적턴 겨울이여!…   

외삼촌은 하늘만큼 높은 벼슬에 계시면서도 조카들중 한명도 혜택,취업을 주지않았고, 늘상 자력갱생, 간고분투를 교육했다. 그 값진 교육의 결실로, 나의 누님은 개혁,개방 초기, 대련 개발구로 진출하여 무역 등 큰일을 해내고, 둘째 동생 부부도 대련에서 유럽 수출 식품업 공장을 엄청난 규모로 운영하고있다.

“사람은 내 배만 불리면 안된다. 사회와 민족사업을 도와줘야한다….”이말은 외삼촌께서 타계 3개월전, 병문안을 갔던 나의 누님 앞에서 자식들에게 남긴 귀중한 유훈이였다.그날 외삼촌은 마침, 국제방송프램에서 나의 누님이 작곡한 “아버지는 한줌흙이 되였네”노래를 들으시고 감개무량하여 자식들에게 “명옥이는 그렇게 가난한 가정에서도 결심이 있었기에 이름있는 작곡가로 성장할수있었다!”라고 말씀면서 누님을 본받으라고 교육하셨단다.

외삼촌은 중앙의 부탁을 받고 농촌 기층 생활을 세심히  메모했으며  농민들의 고난을 돌봐주려고 애쓰셨다.회충이 만연되던 60년대 초에는 직접 현장을 조사하시고 귀경후 촌에 대량의 회충약을 증송하셨다. 농민들의 곤난한 정경을 보시고 “앞으로 좋은 세상이 꼭 온다”며, 수십년을 앞서 “개혁개방”의 뜻을 말씀했건만  “인민공사”가 몸속에 뿌리내린 우린 리해할 수 없었다. 동란 시대, 1967년겨울, 친지 방문후 외삼촌께서는 40리 눈보라길을 걸어 산하툰(山河屯)기차역까지 가셨고, 1971년 8월,강서성<5.7>간부학교를 떠나 귀경 도중 친지집 다녀갈때도 삼복철 무더위를 견디면서 산하툰40리길을 또 다시 걸으셨다. 아! 너무나 가슴아픈 추억일뿐! 그때 산하툰에서 외삼촌을 모시고 찍은 흑백사진이 지금도 소중히  보존되여있다.
주외사관 임기제도3년을 돌파, 근8년을 근무하신 외삼촌의 리임(离任)고별 연회석은 래빈이 천명을 훨씬 넘겨(원계획 백명)사상 최고의 외교관 리임 주연으로 인정되였다.김소성이 귀국한다는 섭섭한 소식을 접하고 일본 각계 인사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던것이다. 1982년, 귀국후 외삼촌은 중국인민 대외 우호 협회 상무리사, 일본부 부주임,중일 우호 협회 부 비서장을 력임했다. 1990년 리직후 “21세기 인재배양 기금회”를 손수 창립,일본의 사인 관계 모금으로 호남성 상서(湘西)빈곤지구 ,현(县) 고중학생들을 적극 도와 주었다.

   
 
▲ 이 글의 저자 방명일 선생(소설가. 대련거주)
 
2001년 10월 12일 외삼촌,김소성은 76세를 일기로 병환중 불행히 타계하셨다.  외삼촌을 추모하여 일본정계, 문화계, 공상계,민간단체 등 각계 인사들이 조문, 전화를 수일동안 보냈고 일본 사회 민주당 당수, 전 중의원 의장 도이타가꼬(土井多贺子)녀사가 부고를 접하고 특별히 비행기로 북경 도착, 저택 령당에 분향, 참배하였다. 일본의 중요한 정치가가 특별히 조문하려 오기는 외교계에서 드믄 일이였다.

외삼촌께서 중일 우호사업 생애에 쌓은 업적을 일본인민들이 긍정하고 인격을 존중하기 때문이였다. 일찍1964년, “위대한 청년 외교관 김소성” 소책자가 이미 일본에서 출간되였다.

1989년 여름, 장춘 남호 호텔에서 외삼촌의 접견을 받은것이 마지막 상봉이였다. 조선 민족의 자랑스러운 외교관, 외삼촌 김소성은 영원히 우리 맘 속에 살아 계신다! 

2010년 1월 15일.대련에서.

출처: 동북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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