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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업에 몸을 담아 40성상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1월19일 10시50분    조회:9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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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텔레비죤방송의 첫 남성아나운서 설상순의 이야기

연변라지오방송이나 텔레비죤방송을 시청해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 목소리며 얼굴을 기억할 정도로 청취자, 시청자들에게 익숙해진 설상순 1970년대초에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하여 10여년을 청취자들과 함께 울고웃다가 1982년 연변텔레비죤방송의 첫 남성아나운서로 TV화면에 등장한 그는 최근년에 와서 꽃송이를 받쳐주는 잎새처럼 후배아나운서들을 뒤받침해주는 사업에 모든것을 다 바쳐가고있다.

불우한 운명 유정한 사람들

설상순이 태여난 곳은 장백산아래의 안도현 량강진 석인(石人)촌으로서 수토조건이 악렬한탓으로 병에 걸려 죽는 사람이 특별히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돌석자와 똑같은 한자발음을 따다가 아예 이 마을을 “사인(死人)”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심산밀림속에 위치한 이 고장에는 독벌레가 욱실거려 그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푸술했는데 설상순의 어머니도 사람을 물면 살을 파고들어간다는 “어애”라는 독벌레에게 물려 겨우 돌이 지난 아들을 남겨놓고 세상뜨고말았다. 

설상순의 아버지는 한국 전라남도 순창군 구립면 구암리에서 결혼을 하고 아들딸을 낳아키우며 살다가 1945년초에 일본군의 학도병으로 중국땅에 들어왔고 석달만에 도주하여 인적기 드문 석인촌에 숨어살았다. 그후 안도현삼림경영국을 거쳐 팔가자림업국에 취직한터라 중국내에 일점혈육도 없는 아버지는 얼마후 어린애를 낳지 못해 리혼당하고 홀몰으로 살아가는 녀성을 후실로 맞아들였다. 그런데 아버지 또한 상순이가 열두살되던 해 암병으로 세상을 떠날줄이야?! 엎친데덮친격으로 계모까지 자궁암에 걸려 치료를 받아야 할 형편이였다.         
                
앓는 몸으로 전남편의 자식까지 키우며 살아가기가 힘들어진 계모는 상순이를 고아원에 보낼 타산에서 두번이나 함께 룡정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나 10여년간 고락을 함께 한 남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친자식처럼 키워온 아들과 떨어질수 없어서인지 상순이를 데리고 화룡시 서성진 북대촌에 살고있는 로중의한테로 재가했다.

자기 자식이 하나도 없는 중의는 의술이 꽤나 높아 린근에 소문이 있는건 물론 마음씨도 후더워서 후처의 병을 정성껏 치료해줌과 동시에 데리고온 전실자식 상순이를 친아들처럼 이뻐해주었다. 덕분에 상순이는 근심걱정을 모르고 학교에 다닐수 있었으며 초중을 졸업하고 귀향한후에는 장차 계부의 재간을 물려받을 속셈에서 짬이 생기는대로 의술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전례없는 “문화대혁명”때문에 초중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수준으로 심오한 중의학지식을 소화한다는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러던 1970년에 서성중학교에 고중반이 설립되였다. 이렇게 되여 공부를 좀 더 하고나서 의학을 전공하고싶었던 상순이는 늦깎이고중생이 되였다. 

그 이듬해 여름이였다.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서성중학교에 아나운서모집을 내려오자 모두들 시험을 치느라 부산을 떠는데 유독 상순이만은 미동도 없었다. 소학교때부터 랑독도 잘하고 목소리가 좋다고 칭찬을 받아왔지만 의사로 되겠다고 벌써 마음을 정한 그로서는 다른 진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던것이였다. 

그즈음 제일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설상순이 시험이 거의 끝나도록 나타나지 않자 담임교원인 방수길선생이 기다리다못해 찾아나섰다. 이렇게 설상순은 제일 마지막 사람으로 시험장에 들어갔는데 예상밖으로 박홍섭 등 시험관들의 눈에 들어 공사(할)방송소에 가서 록음할수 있는 행운을 얻었고 몇달후에는 강습에 참가하고 박청죽, 김순옥과 더불어 연변인민방송국에 아나운서로 취직하게 되였다.

따뜻한 사랑, 끈질긴 노력

타고난 목소리덕분에 아나운서로 되였지만 1년간 랑독훈련을 견지한 박청죽과 대비하면 설상순의 수준은 형편없었고 한동안 지나도 뚜렷하게 제고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여기저기에서 방송을 못한다는 혹평이 날아들었고 지어 희망이 없으니 돌려보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당시 방송조 조장으로 사업하던 박홍섭선생만은 설상순이 꼭 아나운서로 성공할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5년까지 지켜보는것이 좋겠다고 간곡하게 제기하였다. 이리하여 설상순은 《간추린 소식》이나 《프로안내》, 《일기예보》 등을 진행하면서 방송실력을 쌓아갈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점심시간에 설상순은 《간추린 소식》을 생방송하다 그만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수를 빚어냈다. 그런줄도 모르고 다른 방송임무까지 수행하고나니 퇴근시간이 가까와오는데 남상렬국장이 부른다는 전갈이 왔다. (도대체 무슨 일로 나를 찾을가?)

설상순이 이런 생각을 굴리며 국장사무실에 들어서니 남상렬국장이 책상우에 놓여있는 원고를 건네주며 한대목을 읽어보라고 하는것이였다. 바로 점심시간에 방송한 《간추린 소식》원고라 아무 생각도 없이 그 부분을 다시 읽으며 실수를 반복하는데 남상렬국장이 틀린 발음을 시정해주고나서 “방송을 그렇게 할려면 차라리 하지 말라”고 하면서 엄하게 닦아세웠다.

알고보니 그날 방송을 청취한 남상렬국장은 프로가 끝나기 바쁘게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와 우선 다른 프로가 있는가고 문의를 했었고 기타 프로의 정상적인 진행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담화시간을 퇴근무렵으로 정했던것이다.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된 설상순은 신출내기 아나운서의 정서에까지 신경을 써주는 남상렬국장의 흉금에 가슴이 후더워났다. 

(그래, 이런 훌륭한 령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방송을 잘해야지…) 이렇게 마음을 다잡은 설상순은 압력을 동력으로 간주하면서 실무제고에 왼심을 썼다. 우선은 박홍섭, 최정자, 김후남 등 선배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엇이든 열심히 배웠고 복도를 걸어다닐 때에도 《여기는 연변인민방송국입니다》라고 중얼거리면서 목소리를 좀 더 부드럽고 달콤하게, 웅글지게 낼수 있는 비법을 더듬어내기에 신경을 썼다. 무엇무엇해도 실전중에서 자기를 제고하는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단정한 그는 또 2,3년을 하루와 같이 《연변일보》 4개면의 기사를 전부 소리내여 읽으면서 랑독훈련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보람으로 설상순의 방송수준은 빠른 속도로 제고를 가져왔고 5년이 아니라 3년만에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차츰 《연변뉴스》, 《국내외뉴스》며 특별기획프로들을 담당하고 여러 급별의 상을 타면서 방송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지난 40년간 조건이 보다 좋은 지방이나 단위를 넘보지 않고 자리를 굳건히 지켜올수 있은데 대해 설상순은 받은 사랑이 너무 커서 보답하고싶은 심정이 간절했기때문이라고 고백했다.

설상순이 연변인민방송국에 취직한후 계모는 병세가 점점 더 악화되여 생활을 완전히 자립할수 없게 되였다. 그때에 와서 계부도 년세가 있는건 둘째치고 건강상황이 좋지 않아 앓는 안해를 돌볼 계제가 못되였다. 그렇다고 총각의 몸으로 환자 두분을 보살펴드릴수도 없게 된 설상순은 1974년초에 계부를 서성양로원에 모시고 계모만 연길로 업어왔다. 이때로부터 그는 꼬박 10개월간 비좁은 단칸숙사에서 출근하는 한편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계모의 병시중을 하느라 팽이처럼 돌아쳤다. 

그동안 병원출입도 자주 하다보니 계모가 사망될 때 설상순은 700여원의 빚을 지고 사는 신세로 되였다. 한달 로임이 고작 32원밖에 안되는 형편에서 그것은 7,8년이 지나서야 갚을수 있을가말가 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그런데 이런 실정을 료해한 방송국지도부에서 고맙게도 1974년 년말보조금으로 이 빚을 몽땅 면제해주었다. 이 소식을 전달받은 설상순은 뜨거운 감격에 목이 메였다. 이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사업을 더 잘하고 기여를 더 많이 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조건이 좋은 지방으로 자리를 옮길 기회가 있었지만 단연히 포기하였고 1982년부터 거의 3년간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은 라지오방송국에, 화요일, 목요일과 토요일엔 텔레비죤방송국에 나가면서 보수를 따지지 않고 줄기차게 뛰였다.

잎새처럼 살아가는 인생

1982년 자치주창립 30돐을 맞으며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첫 남성아나운서로 TV화면에 등장한 설상순선생은 대번에 시청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인기인물로 되였다. 

그때로부터 택시에 앉아도 운전수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고 거리에 나서도 본인이 무안할 정도로 눈박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젠가 머리를 깎으려고 리발관에 들어갔을 때였다. 생면부지의 한족리발사가 선생을 반기면서 자기도 애청자의 일원이라고 자아소개를 하는것이였다. 한족리발사가 자기의 방송을 즐겨듣는다니 이상야릇해나서 “그럼 조선말을 알아듣는단 말이예요?” 라고 넌지시 물었더니 그녀는 “아니, 음악을 감상하는것처럼 억양을 통해 일종 향수를 느끼는거죠.” 라고 대답하는것이였다. 거기에서 계발을 받은 선생은 그후부터 방송을 좀더 부드럽게, 친근하게, 달콤하게 하면서 듣는 사람들에게 색다른 향수를 안겨주기에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애청자군체가 날로 늘어났고 선생은 연변텔레비죤방송뿐만아니라 자치주창립경축대회, 민속관광박람회 등 대형행사의 남성사회자배역을 전담하다싶이 하면서 이름을 날리게 되였다.

1991년에 아나운서부의 부주임으로 승진한 설상순선생은 하루속히 후배들을 양성해서 연변텔레비죤방송의 미래를 이끌어가도록 해야겠다는 사명감으로부터 출발해서 신인양성에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는 타산을 조직에 제기했다. 

그즈음 설상순선생을 우상으로 간주하면서 스승으로 모시고싶다고 찾아오는 아나운서지망생들이 줄을 섰다. 선생은 이런 젊은이들속에서 싹수가 있는 사람들을 골라내여 알심들여 지도했는데 그중 여러명이 여러 매체에서 골간으로 활약하고있다. 지금까지 설상순선생이 가장 심혈을 많이 쏟아부으면서 양성해낸 아나운서는 현재 중앙인민방송국에서 사업하고있는 리국호이다. 

연변에 남성아나운서가 모자라는 실정에서 모처럼 여러가지 여건을 구비하고있는 대상자를 물색해낸 선생은 당시 국호에게 특별한 사랑을 몰부으면서 중점적으로 양성하였는데 국호 또한 배움에 싫증을 느끼지 않고 잘해주어 빠른 시간내에 중견으로 부상하였으며 그후 몇년간은 아나운서부의 주임직을 맡고 장끼를 자랑하였다.

후배양성에 있어서 설상순선생은 아무리 사랑하는 제자라 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눈물이 날 정도로 야단을 치는 엄한 스승이지만 착오를 범한 젊은이들을 버리지 않고 품어주는 너그러운 선배이기도 하다. 어느해인가 한 후배가 출국했다가 두달 늦게 귀국했다. 일반편집기자면 단칼에 제명처분을 내리겠지만 수요되는 재목이라 그럴수도 없게 된 지도부에서는 주임인 설상순선생을 불러 의견을 청취하였다. 그때 선생은 허락도 없이 늦게 귀국한 당사자의 행실이 야속하기는 하지만 하루이틀도 아니고 여러해나 공력을 들여 양성해낸 인재를 이렇게 포기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하면서 착오는 뼈저리게 뉘우치도록 하되 사람은 아끼고 보듬어주어야 한다고 진심으로 호소하였다. 선생의 후배사랑에 감동된 지도부에서는 그 아나운서가 사업을 계속할수 있도록 조건을 창조해주었고 본인 또한 그후 몸을 내번지고 사업하는것으로 착오를 미봉하기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여러 급별의 방송작품평의나 사회자콩클때면 심사위원직을 맡게 되는 선생은 또 엄격한 요구를 제기하고 합리화건의를 내놓으면서 역할에 충직하는 공정한 심판관이다. 어느해인가 길림성조선말사회자콩클에서 1등상을 탈만한 우수한 사회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느 심사위원들은 두루 맞춰서 1등상을 선발할것을 주장했지만 선생은 그렇게 하면 1등상의 무게가 떨어진다고 하면서 조건이 안되면 억지로 빚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견해를 견지하였다. 결과 그번 콩클에서 1등상을 내오지 않았는데 이때로부터 연변에서 심사를 공정하게 한다고 정평이 나서 길림성 해당부문으로부터 인정을 받기까지 했다. 이밖에도 선생은 무릇 1등을 한번 가진 사람이면 3년이내에 재차 경쟁에 나서는것을 제한하자는 건의를 제기함으로써 참가자들의 적극성을 고무하고 더욱 많은 젊은이들에게 기회가 차례지게끔 했다.

병마와의 싸움

금년 3월에 설상순선생은 갑자기 가슴이 미여지는것처럼 아파나면서 숨이 차서 사무실에서 대문밖까지 걸어나가기도 힘들어했다. 연변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보니 관심병이라는 진단이 나왔는데 수시로 심근경색이 올 위험이 있다고 했다. 의사의 건의에 따라 수술치료를 받은 선생은 현재 회복단계, 출근은 하고있지만 아직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실정이다. 거기다 장기간 복장업에 종사하던 안해까지 엄중한 경추골질증식으로 수술을 받다보니 일본에 가있는 큰딸이나 지난해에 대학을 졸업한 둘째딸은 아빠엄마의 건강때문에 항상 걱정을 안고지낸다.

그럼에도 본분을 잊지 않고있는 선생은 후배욕심이 대단해서 대학전과이상 학력에 목소리가 좋으며 꼭 성공할 희망이 있는 사람이면 제자로 받아들여 알심들여 양성하련다고 속심을 터놓았다.  같은 값이면 남자를 선택양성해서 남성아나운서가 모자라는 현실문제를 해결하는데 동조하고싶다는것이 설상순선생의 “욕심”이다. 
                                                            

연변라지오TV신문  채선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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