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달래동아가씨”로 우리앞에 다가선 그녀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1월22일 11시03분    조회:787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ㅡ연변가무단 녀중음가수 최향란에 대한 이야기

온갖 역경을 딛고 성공의 대안에 올랐을 때야말로 그 기쁨이 배가 되는 법이다. 오늘날 많은 팬들의 사랑을 받고있는 녀중음가수 최향란 불과 6살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천진란만한 소녀시절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떠나보낸 그녀는 역경속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한보한보 전진했고 결국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가수로 성장하게 되였다.

1966년 8월 15일, 도문시 석현진의 한 로동자가정에서 5남매중 셋째로 태여난 최향란은 퉁소를 잘 부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게 되였다. 그녀는 학창시절에 공부를 잘해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은건 물론 음악과 체육에도 장끼가 있어 줄곧 학교문예선전대의 골간으로 활약했는가 하면 소학교시절에는 단거리달리기, 중학교시절에는 장거리달리기, 고중시절에는 투창, 수류탄 던지기 등 체육활동에서 능력을 뽐내며 학창시절내내 도문시학생운동회에서 자신이 참여한 종목에서 번마다 1등의 영예를 따냈을뿐만아니라 주대회의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술지망이나 운동선수꿈은 최초에 아버지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학생이라면 우선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게 아버지의 방침이였다. 결국 그때 악기라는 악기는 다 다루고싶었고 그래서 조선족악기는 물론 얼후 등 한족악기까지 동네집에서 빌어다가 련습할 때면 아버지가 “집안이 소란스럽다”며 그 악기들을 박산내기도 했다. 그러면 나어린 향란이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6살때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군 했다. (어머니가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가?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일을 반대하지 않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으로 뒤척이며 잠간 꿈속에서 어머니를 만나 서러움을 하소연하다가 이튿날 깨여나서는 서운한 마음으로 등교했고 학교에 가서는 또 공부여가에 학교문예선전대활동이며 체육활동에 참가해 실력을 제고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결국 공부, 음악, 체육 등 다방면에서 동학들의 앞장에 선 그는 해마다 우수학생의 영예를 따내기도 했다.                                     
                                                         
최향란이 중학교를 졸업할 림박에 주변에서는 그의 지망을 두고 의론이 많았다. 학교측에서는 그의 뛰여난 운동실력을 감안해 체육학교시험을 볼것을 권고했고 일가친척들은 “운동이 녀자애들에게 적합하지 않다”며 예술에 장끼가 있는만큼 예술로 성공할것을 기대했다. 당시 향란의 마음 또한 음악쪽으로 더 기운 상황이라 앞으로 예술을 전공할 꿈을 품었지만 아쉽게도 가난한 가정형편은 그녀가 예술학교시험을 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모교인 석현종이공장자제1중에서 물거품이 되여가는 그의 꿈을 아쉽게 생각하고 도문시예술단의 성악배우 장건군을 스승으로 소개해주었다.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대학시험은 고사하고 예술학교에도 못가는 서러움을 애어린 가슴에 품어야 했지만 그때의 상황에서 최향란은 오직 배울수 있다는것 하나만으로도 좋았다. 그 배울수 있다는 자체가 그녀에게는 비록 어렴풋한것이기는 하나 앞으로 꼭 성공할수 있다는 한가닥 희망이였던것이다. 그때로부터 그는 2년 반동안 매일과 같이 석현에서 도문을 기차편으로 통학하면서 성악공부를 했는데 장건군선생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배우러 다니는 그의 노력에 감동되여 한푼의 보수도 받지 않고 정성스레 배워주었다.

이처럼 자신의 앞길에 단 한오리 희망의 끈도 놓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보람으로 최향란에게 마침내 기회가 왔다. 그가 연변예술학교시험을 치러 갔을 때 만난 성악부 정영숙부장은 그의 목청이 아까와 1년간 성악지도를 해주고 그후 가정형편때문에 다시 예술학교시험을 칠수 없는 그의 형편을 고려해 연변가무단 학원반에 입학시켰다. 이로써 체계적으로 음악을 배울수 있게 된 최향란은 드디여 자신의 앞길에 한줄기 눈부신 해살이 비쳐드는감을 느꼈다. 그떄 그는 남들보다 곱절 노력해서 반드시 예술인으로 성공하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그때 그녀는 한가지 생각지 못한게 있었다. 활달한 성격인데다 어려서부터 한어말을 잘했던 까닭에 석현에서 소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쭉 한족학교들 다닌 그로서는 연변가무단 학원반에 발을 들여놓은후 전부 조선말로 하는 선생님들의 강의를 도무지 리해할수 없었다. 교수시간에 선생님이 흑판에 가로금, 내리금, 세로금, 동그라미, 네모칸 등을 조합해 글자를 적어내려가는데 그게 무슨 글이고 무슨 뜻인지 전혀 알수 없었다. 어떻게 발을 들여놓은 학원반인데… 막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설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조선어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아니, 앞으로 연변에서 가수로 성공하려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게 조선어였다. 그때 그는 아는 사람의 겨우 8살난 소학생아들에게서 “ㄱ ㄴ ㄷ ㄹ”로부터 시작해 열심히 배우기 시작했다. 학원반에서 당시 연변가무단 성악부 부장 림성호선생 등 유명한 예술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음악지식을 배울라, 과외시간을 리용해 소학생한테서 조선글을 배울라니 그녀에게는 단 1분1초의 시간도 귀중하기 그지없었다. 숙사생활을 하는 그녀에게 밤에 겨우 쪽잠이나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시간 모두가 공부하는 시간이였다. 누워서도 걸으면서도 그는 배운것을 외우고 또 외웠다. 정성이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했던가. 이처럼 피타는 노력의 대가로 그는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학원반을 졸업하게 되였고 1985년도에 안도현가무단에 독창가수로 배치받으면서 전직예술생애의 첫
걸음을 떼기에 이르렀다.

안도현가무단에 발을 들여놓은후 최향란은 자신을 수요하는 모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한편 공청단안도현위 선전위원로 활약하면서 각 방면에서 한층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했다. 사실 당시는 안도현가무단도 공연임무가 많을 때라 1년에 300~400차씩 공연하며 동북3성을 다 돌다보면 거의 반년은 밖에 나가서 다니는게 보통이였다. 하지만 그녀는 매번 공연임무가 있을 때마다 빠진적이 한번도 없었고 여가시간에도 마른일 궂은일 마다하지 않았다.  특히 결혼한후 임신 3개월의 몸으로 공연차 흑룡강성 녕안으로 갔을 때는 곁사람들이 다 손에 땀을  쥘 정도로 이 마을, 저 마을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손잡이뜨락또르에 앉아다니며 매번 7~8수의 노래를 불렀으나 힘든줄을 몰랐다. 다행히 배속의 아이가 별탈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사실 당시의 상황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아이를 낳은후에도 사업을 첫자리에 놓은 그녀는 그냥 단위의 수요에 의해 외지공연을 다녔고 시어머니가 애를 안고 공연팀을 따라다니며 공연여가에 애한테 젖을 먹이게 하군 했다. 이처럼 사업에 심혈을 몰부은 결과 그녀는 해마다 단위의 선진사업일군 및 안도현선진사업일군로 당선되기도 했다.

안도현가무단에 있는 기간 그는 또 자신의 기량을 점검하기 위해 각종 콩클에도 부지런히 참가했는데 특히 1987년 제2차연변예술절에서 독창으로 표연상(1등상)을 수상했고 길림성중청년회보공연에도 참가해 국내 유명한 교수들과 평심위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갈고 닦은 그의 실력이 인정을 받게 되자 차츰 그를 눈독들이는 예술단체들도 많아지게 되였다. 특히 북경, 할빈, 심양 등 대도시의 큰 예술단체들에서도 최향란에게 유혹의 손길을 보내왔지만 이미 인재로 성장한 그녀를 안도현가무단에서 쉽사리 놓아줄리 없었다. 어느새 큰 예술단체들의 유혹을 알아차린 가무단 지도부에서는 그녀를 불러놓고 “여기서도 섭섭하지 않게 대우를 잘해줄테니 가지 말라,

 잘못 갔다가 한발 잘못 내디디면 전도를 망친다”며 극구 말렸고 최향란 역시 그때까지 바깥세상에 나다녀본 경험이 별로 없었던만큼 두려움이 앞서 결국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말았다.

이렇듯 단위 령도들의 신임을 한몸에 받으며 예술의 무대에서 립지를 다져가던 최향란은 차츰 자신의 기량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공부할수 있는 기회를 찾다가 사업의 수요로 룡정시예술단으로 자리를 옮긴후 드디여 그 꿈을 실현할수 있었다. 1992년 6월에 룡정시예술단의 추천으로 오매에도 그리던 중앙음악학원에 가서 1년 반 연수하게 된것이였다. 사실 그녀는 그전에도 음악대학에 가서 공부할 기회는 있었다. 안도현가무단에 발을 들여놓은 이듬해 즉 1986년도에 시험을 쳐서 중앙민족학원 음악학부의 입학통지서를 받았지만 학비를 댈수 없어 아쉬운대로 배움의 꿈을 접어야 했고 그 이듬해에도 시험을 쳐서 가려 했으나 그 몹쓸놈의 가난때문에 또 한번 발목을 잡혔다. 하다보니 룡정시예술단에서 추천해준 배움의 기회가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지 않을수 없었다.

중앙음악학원에서 저명한 성악교수인 고 심상선생의 강의도 방청하고 고운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체계적으로 음악기초리론과 가창기교를 학습하며 꿈같은 2년간의 학업을 원만하게 마무리한 뒤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독창가수로 입사한 최향란은 그후 서서히 전성기를 열어가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룡정시예술단시절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40돐맞이 제3회 “연변의 여름” 예술절활동에서 독창 《추억의 강》을 불러 창작곡 1등상을 수상했고 1993년도에 제1회 길림성 “인기배우( 歌星)”초청콩클에 전 성적으로 유명가수들이 대거 참가한 가운데 무명가수로 참가해 중국가요 《헌신》을 부름으로써 절찬을 받은것은 물론 음악교수들의 요구에 의해 한국가요 1수를 더 부르고 단연 1등의 월계관을 따내 주변사람들을 깜짝 놀래웠다. 

1994년 길림TV 음력설문예야회에도 출연한 최향란은 차츰 연변TV 《음력설문예야회》, 《토요무대》, 《매주일가》 등 문예프로에 빠짐없이 출연하며 연변의 관중들과 가수와 팬의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되였다.

최향란이 예술인생의 전성기에 들어선후 많은 팬들이 그녀의 노래에 흠뻑 취했다. 2005년 5월의 어느날 연변TV방송국에 장애자 한명이 찾아와 자신은 최향란의 팬이지만 장애자의 몸이라서 한번도 공연구경을 못간 까닭에 최향란이 무대에서 노래하는 장면을 직접 본적이 없다며 꼭 한번 만나보고싶다는 심정을 털어놓았다. 결국 연변TV 의 초쳥으로 뉴스프로담당자들과 함께 장애자 김명복의 집을 찾은 최향란은 김명복가정에서 가장 즐겨듣는다는 《달래동아가씨》를 비롯해 여러수의 노래를 부르고 자신이 부른 노래 15수가 수록된 VCD 《달래동아가씨》(2003년 연변TV 제작)까지 선물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일이 계기가 되여 그후 많은 장애자팬들이 연변TV방송국 등 단위를 찾아 “우리도 최향란가수를 청하면 안되는가”고 떠드는 바람에 최향란은 그런 팬들의 뜨거운 사랑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길에서 삼륜차를 몰고가던 남자가 급정거하며 차에서 내려 최향란의 앞으로 다가와 어줍게 두손을 맞잡고 “최향란가수가 옳습니까? 어떻게 여기서 볼수 있습니까?”하고 기뻐서 어쩔줄 몰라하던 일, 시장에 가면 아줌마들이 서로서로 붙잡고 《달래동아가씨》의 가사 한대목을 모르겠으니 가르쳐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대여 하는수없이 노래를 불러주던 일, 채소사러 가서는 할머니들이 “에그ㅡ 가수구만”라고 반겨줄 때면 부끄러워 흥정도 못하고 생각했던것보다 더 많이 사던 일 등 그녀와 팬들 사이의 일화는 많고도 많다.

지금까지 《달래동아가씨》, 《장백의 새 아리랑》,《추억의 강》 등 창작곡 50수를 부르고 많은 묵직한 상을 받아안은 최향란가수의 예술무대는 단지 연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97년 5월에 연변문화계의 제1대원로들인 허세록, 석희만, 채택룡, 조득현, 김례삼, 최정연 등 작사자, 작곡가, 화가, 안무가들과 함께 한국관악국의 초청으로 한국에 가서 한국국회가 주최한 “제10회관악산철죽제”와 “어머니절” 대형행사에 참가, 연변가요 《그리운 고향》을 불러 특별상을 수상한데 이어 주최측의 추천으로 미인선발대회에 참가해 “연변아가씨”특별상을 받아안은 최향란은 2004년에는 조선 평양에서 열린 제22차 “4월의 봄”친선예술축전에 참가하여 독창 은상을 수상하고 녀성4중창에 출연하여 금상을 수상한 뒤 2008년에 열린 조선 제1차 태양절기
념 전국예술축전에서도 조선가요 《조국의 밝은 달》, 《우리는 하나》를 불러 금메달을 따내며 자신의 진가를 해외에도 알려왔다.

1998년에 사업의 수요에 의해 연변가무단으로 자리를 옮겨서 지금까지 줄곧 가수로 활약하고있는 최향란은 이미 거둔 성과에 대해 “모두 과정일뿐 성공하려면 아직 멀었다”면서 “무슨 일이든 언젠가 한계를 느끼고 무너지는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무대에서 나자신이 계속 존재해있는 모습을 보이자면 나절로 노력하는수밖에 없다”며 앞으로 기회가 있으면 음악공부를 더할 의향을 내비쳤다. 이어 이미 3년전부터 별러오던 VCD, DVD 음반을 올해에는 꼭 출판할것이라고 밝혔다.

노력에 노력을 경주하여 자신의 존재가치를 새롭게 증명하고싶다는 최향란가수의 말과 같이 앞으로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팬들앞에 나타날지 기대해볼 일이다.            
                                                        

연변라지오TV신문  전일봉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흑룡강신문=하얼빈) 김호 기자 = '어린시절 흰색가운을 입은 사람이 부러워 의사직업을 선택했어요'라고 말하는 할빈의과대학제1부속병원 리영화주임의사(녀, 교수, 45세, 연변 룡정 출신)는 림파암, 백혈병, 골수암 등 혈액관련 병마를 잡아주며 환자건강을 지켜주는 백의천사이다. 리영화 의사는 중국의과대학 의학...
  • 2010-04-26
  • -“가주중국동포연합회” 제 8임 회장 강성씨를 만나서  태평양건너편 머나먼 미국땅에서 조선족들의 질고와 친목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단체가 있다. 미국 LA현지의 “가주중국동포연합회”가 바로 그 장본인이다. 일전 연합회의 회장직을 맡고있는 강성씨가 연변을 찾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 2010-04-21
  • —연길시공안국 형사경찰대대 정보자료중대 김란중대장을 만나 "어릴적 꿈이였던만큼 경찰사업에 종사할수 있다는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백성들에게 믿음과 신임을 안겨주는 훌륭한 경찰로 되기에 노력하겠습니다." 15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연길시공안...
  • 2010-04-19
  • (흑룡강신문=하얼빈) 리수봉 기자 = 동북농업대학 농학원 장현철박사(부교수, 40세, 연변출신)는 '감자역병의 생리분화형 연구'에서 성과를 거두어 괄목받고 있다. 1993년 연변농학원을 졸업하고 연변 룡정시에 있는 과수농장에서 7년간 사업하다 공부를 더 하려는 의욕으로 2001년 3월 한국 강릉대학에 입학, 여기서 석, 박...
  • 2010-04-16
  • 채순희-오래가는 향기 오래 가는 녀자—조선족 녀성기업인 태평양미용병원 채순희원장의 도전하는 세상사람들은 흔히 "마음"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세상만사 마음먹기에 달려있다고. 그런데 정말 마음의 위대함을 속속들이 인식하고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은것 같다. 연길시태평양미용병원의...
  • 2010-04-14
  • 중국광대은행 하얼빈 홍기지행 김룡 부행장 (흑룡강신문=심양) 장초령 특파원 = 중국광대은행 하얼빈 홍기지행 김룡 부행장이 바로 금융학과를 나와 젊은 나이에 걸출한 금융인사로 되겠다는 꿈을 품고 수십 년간 하루와 같이 사업을 열심히 해오면서 현재 금융업계에서 맹활약하는 훌륭한 조선족 은행가이다. 1990년 김룡씨...
  • 2010-04-13
  • 2009년 YBTV음력설문예야회 《아리랑대잔치》에서 웃통을 벗어제끼고 장백산천지에서 힘있게 북을 치며 야회의 서막을 열었던 사나이, 1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근육질몸매와 강렬한 눈빛으로 뭇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사나이 리주용은 2010년 YBTV음력설문예야회 《두만강의 새봄》에서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노...
  • 2010-04-12
  • “한국인들에게 가장 듣고픈 말 ‘우리나라 사람’” 중국 동포들로 구성된 ‘동포자율방범대’ 이림빈 대장(왼쪽)과 대원들의 모습. 이 자율방범대는 2008년부터 매주 화요일 오후 9시∼밤 12시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일대에서 순찰과 취객 귀가 활동 등을 펼치고 있다. 사진 제공 이림빈...
  • 2010-04-12
  • 전국애민 모범선진파출소를 이끄는 조선족소장 전국 유일한 조선족대표로 선발된 왕청 춘양파출소 윤철남소장을 만나 기자는 일전 지난 3월 26일에 북경에서 호금도, 온가보, 리장춘, 주영강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은 후 수도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전국공안기관 애민모범선진사적보고회》에 참가하고 ...
  • 2010-04-11
  • 조선족연극예술의 코기러기 지난해에 이름난 극작가 리광수선생의 뒤를 이어 연변연극가협회 주석으로 선거된 전득주 30여년간의 피타는 노력을 거쳐 이름없는 연극배우로부터 유능한 연출로, 조선족연극예술의 코기러기로 자리매김한 그의 인생궤적을 진맥해본다. 가수의 꿈을 키우던 나날1951년, 군인가정의 3남매중 맏...
  • 2010-04-0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