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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화-연변가무단 악사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1월23일 16시45분    조회:7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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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8월 대경교향악초청공연장에서 나어린 연주자동료들과 어깨나란히(왼쪽 첫사람).

55년 무대예술생애에 무지개 비꼈다 
연변가무단 황룡화악사의 이야기를 듣는다

[길림신문 김청수 2010-11-23]76세의 로인이 대형교향악공연단의 일원으로 무대에서 손주벌 되는 단원들과 호흡을 맞추며 비올라(中提琴)를 연주하는 모습, 그 누구는 본적 있는지. 연변가무단의 공연을 관람한적 있는 이들은 누구나 다 보았을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그를 알아본 사람은 거의 없다. 무대에서 늘 뒤켠에 위치한 연주자의 모습은 별로 사람들의 눈에 띄이지 않으니깐.

연변가무단의 황룡화로악사의 55년 무대생애는 줄곧 그렇게 흘러갔다. 하기에 기자의 인터뷰에 응하면서《가수도, 독주가도, 지휘도 아닌 한 평범한 연주자를 신문사 기자가 이렇게 찾아 격려하는 일 아마 전국적으로도 드문 사례일것》이라며 그토록 감격을 한다.

연변교향악단의 공백을 메운 비올라수

바이올린보다 크고 첼로보다 작은 이 악기, 비올라를 연변가무단에서는 거의 그 한사람만이 다뤄왔다고 한다. 여직껏 연변음악계나 음악학교에도 비올라를 가르치는 교원이 별로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교향악은 비올라가 없어서는 협화음을 이룰수 없다.

1959년부터 그는 조직의 임무를 맡고 비올라를 자체로 배워내기 시작하였고 1960년에는 중앙악단에 파견되여 연수를 받았다. 당시 마침 쏘련의 유명한 니야끼지휘가 중앙악단에서 교수를 하고있어 그의 교수를 경청하기도 하고 견학도 하면서 열심히 배워 능란한 비올라수로 되였다.

그뒤로 그는 연변가무단 관현악단의 부총지휘도 맡으면서 비올라로 관현악의 조화와 협화음의 경지를 이뤄내는데 공백을 메웠다. 그 독보적인 존재는 누구도 대신할수 없었고 그는 주위의 신인들을 가르치기에 솔선적이였다. 올 8월 대경에서 열린 대형음악회에 초빙되여가보니 대경가무단의 수석비올라수도 역시 그가 30년전에 가르쳤던 학생이였다.

조직의 수요에 의해 비올라를 배워냈듯이 그가 전국순회공연을 하면서 때론 악사들이 특수사정으로 결석하여 공연을 할수 없게 될 때마다 고심한 연찬끝에 다뤄낸 악기들만도 꽹쇄, 만도링 (신강북), 손풍금, 원금, 삼현, 전자기타, 새장구 등이 있다. 그로 하여 전 악단이 곤경에서 벗어나고 공연이 원만하게 치뤄질 때마다 그는 책임자들로부터 «천재연주자» 라 자랑스럽게 불리며 다면수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개혁개방이래 전자기타를 연변공연무대에 처음으로 등장시킨이도 역시 그였다. 능란한 기타연주에 깔끔한 예술인의 이미지를 모두 갖추고 무대에서 신선한 기타바람을 일구며 신명을 돋굴 때면 관객모두가 그매력에 빠졌다. 하여 한때는 연변가무단의 기타수 보러 일부러 찾아오는 관객들도 있었다.

로연주자의 영원한 감격과 행복

1948년경 그가 여라문살되던 해 아버지는 마차실이 품삯 35원 주고 그에게 기타를 사 선물하였다. 아버지한테서 기타를 선사받던 그순간의 감동을 그는 영원히 잊지 못하고있다.

당시 그의 고향마을인 왕쳥현 신흥촌치고 온마을에 낡은 축음기 한대뿐이였는데 나어린 황룡화는 축음기바늘을 줄칼로 쓸어가며 한곡두곡 열심히 감상하였다. 아들이 음악에 각별한 애호가 있는것을 발견한 아버지는 이름조차 모르는 악기(기타)를 사다 아들에게 선물하였던것이다. 그뒤로 1955년 그때는 아버지께서 할빈에 가 입담배를 팔아서 그 돈으로 바이올린을 사다주며 아들을 할빈쏘련고등음악학교로 인편에 보내주셨다. 그는 거기서 뽀꼬진이라는 쏘련음악교원을 모시고 바이올린을 배우고 교향곡연주도 능숙하게 익혀냈던것이다.

1956년 6월 15일, 그는 연변가무단 단장들의 요청편지를 받고 연변가무단 악단에 편입되였다. 그해 7월 제1차전국음악주순회공연차로 북경에 당도한 연변가무단은 저명한 작곡가 정진옥의《장백의 노래》를 대합창으로 불러 전 북경시를 들썽하게 만들었다. 장내가 떠나갈듯한 박수소리, 재창을 요구하는 함성소리 북경의 밤하늘에 울려퍼졌고 매체들에서는 연변가무단을 보도하느라 열띤 응전을 벌렸다. 이때로부터 연변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연변가무단은 연변의 간판으로 되였던것이다.

그이듬해인 1957년 당시 스무살밖에 안된 그는 또 전국문예단체회연으로 북경무대에 올라 교향곡연주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공연이 끝난 어느 오후 3시경 긴급소집으로 전원이 커텐을 친 뻐스에 앉아 어디론가 들어갔다. 그곳은 다름아닌 중남해 회인당이였다. 갑자기 거룩한 모습의 모주석께서 름름히 걸어나오시며 손을 저으시였다. 류소기동지, 등소평동지 국가최고지도자들이 연변가무단일행을 접견해주신것이였다. 감격의 도가니에 빠져 울며불며 «모주석만세!»를 웨치고 또 웨쳤고 중앙수장들을 모시고 1000여명의 대합동기념촬영을 하였다. 뒤켠 어느 틈새에 끼여 기념사진에서는 얼굴조차 찾아보기 힘들지만 50여년이 지난 지금 그 행복한 순간을 돌이키는 로연주자는 역시 격동으로 울먹인다.

《저희같은 한 평범한 소수민족 연주자가 신신과 같은 모택동주석을 만나뵙다니 그 기쁨이야 이를데 있었겠습니까? 그때로부터 민족예술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은 일편단심이였고 충천하는 열의로 예술사업에서 혼심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줄곧 중앙고위급지도자회보공연, 외국수상환영공연, 출국공연, 국경경축공연, 자치주창립경축공연 할것 없이 연변가무단의 중요한 공연마다 한번도 빠짐 없이 수석비올라수로 등장하였다. 연변가무단과 운명을 함께 하며 연주사업에 충실했던 그는 수석비올라수 1등상을 수여받았고 문화부 신극목상 (장백정), 전국소수민족문예회연금상(대형가무극), 제3차연변예술절교향악 1등상(무극 «춘향전», 교향음악회) 등 상을 수상하는데 한몫을 차지하였다. 순회공연차로 광주무역회며 무한, 상해 어데라 할 것 없이 전국을 일주하였고 연변의 마을마다 골짜기마다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라곤 없다. 그는 1995년에 퇴직한 뒤에도 15년동안 가무단의 초빙악사로 무대에 올라 연주하면서 55년이라는 무대예술생애의 기나긴 한 현을 그어왔다.

«예술가문»의 희망과 소망의 소야곡

《아버지께서 선줄을 이끌어준 예술의 길에서 저는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리하여 저 또한 자손들의 손목을 잡고 그들을 예술의 길로 인도해왔습니다. <예술의 가문>이라 자랑할만큼 자손들이 훌륭하게 일떠서니 더없는 기쁨과 안위를 느끼고있습니다.》 로연주자는 내심의 희열을 감추지 못하였다.

큰아들 황기욱이는 다섯살부터 손목 잡고 바이올린연주를 시키며 예술과 접하도록 이끌었다. 아들은 그 길에서 방황을 모르고 줄곧 정진하여 상해음악학원 작곡계를 졸업하고 연변가무단창작실 주임으로 교향악의 진품들을 창작하면서 맹활약을 펼친다. 셋째아들 기연이 또한 어린시절부터 기타를 안고다니며 괜한 멋이나 부리는가 싶더니 100여개 음악곡을 외워가며 시험에 통과되고 입대를 하여 북경천안문 국기게양 군악단 대장으로 성장하였다.

큰손녀 미령이 역시 다섯살부터 할아버지에게 업혀 피아노 배우러 다니더니 지금 중앙음악학원의 어엿한 석사추천생으로 되였다. 그는 이딸리아, 오지리, 프랑스 등 여러 나라 피아노경연에 참가하여 대상을 받아안기도 하면서 세계적인 피아노수로 싹수를 보이고있다. 둘째아들집 큰손자도 애니메이션제작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할아버지한테 종종 좋은 소식을 전해와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고있다.

살아있는 자신은 벅찬 행복을 만끽하고있지만 저 세상으로 일찍 떠난 안해 박송자씨를 생각하면 가슴이 쓰린다. 워낙 가무단합창대 일원으로 북경에서 «장백의 노래»를 함께 열창하며 예술의 한길을 걸어왔던 안해는 오로지 연주에만 혼심을 몰부어가는 남편과 세 아들들의 뒤바라지를 위해 다른 단위로 전근하였다. 공산당원이였던 그녀는 가도주임사업까지 떠메고 헌신적으로 일하였는데 1990년 여름, 폭우가 내리던 날 가두주민들의 생명안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그만 뇌출혈로 쓰러지고말았다.

«정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아들들의 출세를 눈앞에 두고 락이 없이 떠났습니다. 어쩌면 그런 안해에게 식당음식 한번 대접 못하고……» 안해를 잘 돌보지 못한 자신의 «죄»를 탓하며 그는 뒤말을 잇지 못한다. 이윽고 «우리 큰며느리 역시 시어머니와 성정미도 비슷한데 정말 자랑할만한 녀성입니다.»라고 하며 그는 기색을 활짝 피웠다.

연길시조선족예술단의 가수였던 큰며느리 김순녀씨는 남편이 상해음악학원에서 공부하게 되고 딸 미령이가 중앙음악학원에서 피아노에 전념하게 되자 자신은 미국으로 돈 벌러 떠났다. 그는 5년동안 아글타글 번 돈을 모조리 남편과 딸의 뒤바라지에 받쳐올리며 마음껏 기량을 펴도록 섬겨왔다. 자신은 귀걸이 하나 하지 않은채 귀국하여 지금은 단란한 가정을 고이 지키고 열심히 사업하면서 딸 미령이가 세계적인 예술인재로 성장하는 길에 든든한 디딤돌이 되여주고있다.

«이제 제가 더 바랄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 조선족음악과 연변음악을 위해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이야 변함없습니다. 다만 대만이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는 그날 축하공연연주를 하는것이 저의 불같은 소망일따름입니다. 이미 홍콩회귀축하공연, 오문회귀축하공연에도 참가하였데 대만이 조국의 품에 돌아올 그날도 멀지 않다고 믿고싶습니다. »

듣는이에게는 뜻하지 않은 그 소망이 황룡화연주자에게는 절실한 바람으로 다가와있었다. 그는 그날을 위해 고래희를 넘은 지금도 체력단력을 계속하고있고 바이올린으로 기본공훈련도 하면서 연변가무단초청에 수시로 응할 준비태세를 하고있었다.

로씨야 음악연주자들과 교류를 하고있는 장면.

광복 50주년기념 한국초청공연장에서.

큰아들한테 기타연주법을 가르치고있는 장면.

변합없는 정열의 연주자 황룡화씨의 공연장에서의 한장면(가운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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