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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악대지휘의 계주봉을 이어받아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2월1일 14시40분    조회:8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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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가무단 관현악단 수석지휘 조예천의 이야기

안국민, 리하수, 최룡국 등 연변예술의 한시대를 풍미했던 원로예술인들이 선후로 퇴직, 사업일선에서 물러나며 연변예술계에 공백으로 남을번했던 관현악대지휘, 바로 그 공백이 될번한 자리에 선배들의 계주봉을 이어받아 젊음의 패기로 우뚝 선 한 남자가 있다. 현재 연변가무단 관현악단 수석지휘로 활약하고있는 조예천(원명 조영)씨, 연변은 물론 일찍 국내 유명한 교향악단들의 초청을 받아 객원지휘로 활약하며 우리 민족의 예술계에도 뛰여난 인재가 있음을 만방에 과시해온 정열의 남자 조예천씨, 하지만 지금 그의 화려한 무대 뒤쪽에는 본인의 피타는 노력과 부모님들의 로고 그리고 많은 은사님들의 사심없는 가르침이 안받침되여있다.

1976년 3월 28일, 왕청현에서 태여난 조예천씨는 일찍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왕청현문공단에서 안무가로 활약하던 아버지 조승길의 영향을 받아 어릴적부터 예술에 남다른 흥취를 가지고있었다. 하여 유치원시절부터 손풍금을 배우기 시작하여 왕청현제2소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당시의 음악교원 김정룡선생한테서 손풍금을 익혔다.  나어린 조예천에게서 장차 예술인으로 성장할수 있는 싹수를 보아낸 김정룡선생이 연변예술학교 강광훈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체계적으로 가르침을 받을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때 8살밖에 안되였던 그는 매주 토요일 이른새벽이면 어머니의 손을 잡고 기차편으로 연길에 도착해서는 근 이틀간 강광훈선생의 지도를 받고 일요일 오후이면 다음날의 학교수업을 위해 왕청행기차에 몸을 실으면서 옹근 2년을 견지했다. 그 짧지도 않은 2년간 하루도 휴식날이 없이 공부할라 손풍금 배울라 또 학교축구대에서 뽈까지 찰라니 어린 그의 고생도 고생이겠지만 특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며 로심초사하는 어머니 황승희의 지극정성이 대단했다.                                           

당시 왕청진정부에서 사업하던 어머니는 매주 토요일이면 우선 별들이 총총한 이른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모든 준비를 마친 뒤 아들대신 손풍금을 메다주고 손풍금을 배울 때면 나어린 아들이 손풍금을 메고 힘들어할가봐 손풍금을 받들어주었을뿐만아니라 무더운 여름철이면 더워할세라 곁에서 부채질도 해주면서 구석구석 보살펴주군 했다. 또 방학이면 연길에 있는 작은할머니 집에 주숙하며 음악공부를 했는데 그가 어디에 가든 어머니는 늘 그의 신변에 있으면서 온갖 정성을 몰부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지 않듯이 본인의 노력과 어머니의 적극적인 헌신 그리고 은사님들의 사심없는 가르침에 받들려 조예천은 차츰 소년아동무대에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였다.

1984년 여름, 원 중공중앙 호요방총서기가 연변을 방문했을 당시 전 주적으로 우수한 학생배우들을 모집해 로동자문화궁에서 공연을 펼치게 되였다. 은사님들의 추천으로 그 공연팀의 일원이 된 조예천은 그때 손풍금독주를 성공적으로 마쳐 예술계의 주목을 끌게 되였는데 특히 연길시소년궁에서는 그가 연길에 와서 체계적으로 음악을 배울것을 권고했다. 결국 소년궁의 주선으로 조예천은 연길시 중앙소학교로 전학하게 되였고 또 소년궁과 문화국의 노력으로 그의 아버지는 연변재정무역학교 인사과로, 어머니는 중앙소학교 재회실로 전근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인재를 알아보고 보다 훌륭하게 양성하려는 백락의 마음이 조예천의 한가정을 모두 연변의 수부도시에서 살수 있도록 배려하게 된것이였다. 그후부터 그는 중앙소학교에서 공부하는 한편 소년궁에 가서 음악공부를 하는 분망한 배움의 길을 걷게 되였다.

바로 중앙소학교에 전학한 이듬해 즉 1985년에 국가 교육부와 문화부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6.1절맞이행사에 초청을 받아 연변조선족소년아동문예공연팀의 일원으로 중남해에 간 그는 양상곤 등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앞에서 손풍금독주를 멋들어지게 하여 당시 연변공연팀이 대성공을 거두는데 일조했다.

 그후 연변TV 소년아동프로에 거의 단골이다싶이 등장해온 그는 손풍금독주는 물론 반주로도 재능을 보여주었는바 당시 소년아동가요계의 인기가수로 활약하던 서향화 등의 노래도 반주하여 실력을 인정받았다. 특히 조예천이 중남해에 다녀온 뒤 그의 싹수를 발견한 연변예술학교 오금란선생이 강광훈선생을 찾아 피아노를 배워주고싶다는 의향을 내비쳤다. 결국 선생님들끼리 얘기를 마치고 조예천의 부모님들을 찾아 상의한 뒤 조예천은 곁들어 피아노를 배우는 행운까지 잡게 되였다. 하지만 피아노를 배우는 과정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가정형편이 넉넉치 못해 피아노를 갖출수 없었던 그는 다행히 오금란선생이 예술학원 련습실의 열쇠를 그에게 주어 다른 학생들이 련습하지 않을 때면 혼자 련습할수 있도록 배려해준 덕분에 힘들게나마 련습을 견지할수 있었다.

이처럼 소년아동무대에서의 뛰여난 활약과 더불어 여러 은사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예술인생의 걸음마를 뗀 조예천은 그러나 소학교를 졸업할 림박인 5학년때는 자신의 진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학교에서 공부성적이 늘 앞자리를 차지했고 학급에서 반장, 학습위원 등 직을 맡으며 우수학생으로 활약해온 그에게 학교측에서는 계속 공부하여 우수한 인재가 될것을 권고했고 한편 학교축구팀에서 공격수로 거의 경기때마다 꼴을 넣으며 전 주 중소학교축구대회에서 중앙소학교팀이 2등을 하는데 크게 기여한 그의 운동기질에 호감을 가진 주체육운동학교에서는 시험칠 필요도 없이 받겠다며 유혹의 손길을 보내왔다. 결국 공부냐 예술이냐 축구냐 갈림길에 섰던 그는 1986년 9월에 부모님들과 은사님들의 권고에 따라 시험을 거쳐 연변예술학교 소학반에 입학했다.

연변예술학교 소학반을 졸업하고 3년제 초중과정과 3년제 고중과정을 합쳐 6년제인 중등전문학교에 진학한 조예천은 고중 2학년때 무작정 북경으로 향발, 학적은 그냥 연변예술학교에 두고 중앙음악학원 방청생으로 들어가 예술공부에 정진했는데 특히 사화진선생에게서 피아노를 배우는 여가에 곁들여 소하선생에게서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이렇게 방청생으로 중앙음악학원에서 공부하며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그후 시험을 거쳐 대학과정인 중앙음악학원 피아노학부에 입학, 1학년공부부터 다시 시작하며 차츰 작곡과 악대지휘에 흥취를 가진 끝에 결국 5년제 지휘전업으로 전공을 바꿨다. 바로 그 지휘전업을 전공하는 과정에서 그는 일본의 국제지휘대가인 쎄이지 오자와선생, 프랑스의 국제지휘대가인 샤르 띠뚜와선생, 로씨야의 음악대가인 로스트르보이치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대가들과 만나 그들에게서 지휘전업을 체계적으로 습득하며 긍정적인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끈질긴 노력과 뛰여난 성적에 감복한 학교측에서는 여러번이나 그에게 “인민장학금”과 “우수전업장학금”을 발급하기도 했다.

오매불망 그리던 그의 성인무대 데뷔는 바로 중앙음악학원에서 공부하는 기간에 이루어졌다. 중앙음악학원 3학년 후학기때의 어느날 공연임무가 있었던 학원의 유봉교수가 그만 몸이 불편해 못나가게 되면서 대리로 조예천이 지목된것이였다. 하지만 당시 련습 한번도 못해봤을뿐만아니라 악보조차 본적이 없는 상황에서 조예천은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싶지는 않았다. 긴장한 마음을 안고 북경음악청에서 열리는 중국청년교향악단음악회에 나선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지휘봉을 잡았다. 차츰 음악의 흐름과 함께 정서가 안정된 그는 인차 선률에 파묻혀 기량껏 지휘봉을 열심히 휘저을수 있게 되였다. 결국 그날의 공연은 대성공이였다. 바로 그날의 대성공을 계기로 그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였으며 그후부터 많은 공연무대가 그를 부르게 되였다. 그는 선후로 중앙발레무교향악단, 곤명시교향
악단, 하북성교향악단, 산서성가극원교향악단, 중국청년교향악단 등 국내 유명한 예술단체들의 객원지휘로 초청되여 중국대륙을 누비며 수십차의 공연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도 뛰여난 관현악대지휘가 있음을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또 1999년도에 북경에서 열린 한국 서울 제1차, 제2차 “동방기원”국제현대음악축제의 수석지휘로 활약하는 등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하고 예술학사학위를 획득한 조예천은 그냥 마음속으로 뭔가 모자라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여 중앙음악학원을 졸업한 뒤 그는 미국류학을 신청했고 그의 성적표와 리력서 등을 본 미국 이스트만음악대학(뉴욕에 있음)에서는 전액장학금을 내줄 의향을 제시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침 그때 9.11테로사건과 함께 이라크전쟁까지 발생하는 바람에 류학생비자가 나오지 못해 그의 류학꿈은 아쉽게 무산되고말았다. 아, 그때의 실망감이란…

그후 조예천이 근 2년간 더 북경에서 객원지휘로 활약하다가 2003년 6월에 잠간 귀향하여 집에서 휴식하고있을 때 연변대학 예술학원에서 련락이 왔다. 즉 연변대학 예술학원관악단이 초청을 받고 한국제주도국제관악제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학생들로 무어진 공연팀을 맡아줄수 없겠느냐는 제의였다. 이는 국제공연인만큼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 제의에 선뜻이 응해나선 조예천은 7월 한달간의 짧은 시간내에 학생들을 부지런히 련습시켜가지고 8월에 한국으로 향발, 세계 22개국이 참가한국제관악제에서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전문가들을 깜짝 놀래웠을뿐만아니라 관객들에게 “연변에도 이렇게 훌륭한 관악팀이 있구나”하는 느낌을 심어주었다. 그번 대성공으로 인해 연길에 돌아온후에도 예술학원극장에서 10여차의 회보공연을 펼쳐 연변예술계의 지명인사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고 따라서 조예천의 인기도 크게 올라갔다.

그후 연변대학 예술학원 강광훈원장이 그를 찾아 예술학원에 교원으로 남아달라고 초청한데 이어 연변가무단 박서성단장이 그를 찾아 “연변에 악대지휘가 대끊어질 가능성이 있는데 비추어 연변가무단에 와서 일해달라”고 초청하여 잠시 그는 량손에 떡을 쥐고 어찌할바를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 결국 연변가무단에서 아직도 배움에 목마른 그의 마음을 헤아려 한국 최고의 예술전문대학 한국국립예술종합대학에 보내 석사공부를 할수 있도록 배려해주는 조건을 내걸어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말았다.

이렇게 2003년말에 연변가무단과 계약을 맺고 2004년 3월에 한국에 간 그는 한국국립예술종합대학 지휘학부에서 3년간 공부하는 여가에 대학측의 초빙에 응해 한국국립예술종합대학 청소년관현악단 수석지휘로 활약하는 동시에 원주시립교향악단 지휘로 근무하면서 하루에 5시간도 못자는 일정을 보냈다. 또 그 3년간 첫학기외의 나머지 5학기의 전액장학금을 받으며 연변에서 간 학생의 우수함을 해외에도 널리 알리였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공부를 원만히 마치고 석사학위를 획득한 뒤 2007년 6월에 귀국한 조예천씨는 그후부터 줄곧 연변가무단 관현악단 수석지휘, 연변대학 예술학원 관현악단 상임지휘를 맡고 지금까지 열심히 뛰고있다. 물론 그동안 그가 해낸 일들은 헤아릴수 없이 많다. 특히 조예천씨의 발기로 주당위 선전부와 주문화국의 지지하에 연변가무단, 연변라지오영화TV방송예술단, 연변대학 예술학원의 청년교원들과 우수학생들로 진영을 무어가지고 연변을 비롯해 국내외의 관현악작품과 예술가요를 위주로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음력설전야에 연변예술극장에서 공익성공연을 견지해온 《신춘(新春)음악회》는 음악계와 대중들의 한결같은 찬사를 받고있다. 또 개혁개방 30돐기념음악회와 공화국창건 60돐맞이 헌례공연당시 음악부분의 록음을 전담당하는 등 최근년간 그의 행보는 많은 예술무대에서 빛을 뿌렸다. 그동안의 성적에 대해 조예천씨는 “나의 전도를 위해 모든 심혈을 기울여주신 부모님들과 사심없이 가르쳐준 은사님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가 있게 되였다”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모든분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또 “연변에 우리 민족 문화예술의 특징을 상징할수 있는 정규화된 교향악단이 만들어졌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있다”면서 “이것을 위해 더 열심히 일하여 관현악단의 필요성을 보여주고싶다. 즉 일을 많이 해야 그 중요성을 알려 정부차원이나 사회적으로 지지를 받을수 있을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내가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하고있다”고 밝혔다. 이어 “대도시에 비해 연변에는 악대지휘가 부족한바 선배들의 계주봉을 이어받은 나로서는 반드시 이를 발전시켜야 하는 임무를 안고있다”고 앞으로 후배양성에 치중할 각오를 밝혔다.

한편 이미 나이도 30대중반에 이른 조예천씨는 그동안 사업때문에 결혼이라는것을 생각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안달아하는 부모님들을 보며 미안한 마음을 금할수 없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물론 그동안 가무단 지도부와 선배들이 그의 혼인문제에 깊은 관심을 돌리며 처녀들을 소개했지만 웬지 연분이 없어 모두 이루어지지 못했다. 특히 부모님들이 손주비위를 하며 심지어 조예천씨의 사촌누나네 애를 데려다 친손녀처럼 이뻐하는것을 보고는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런 조예천씨에게 드디여 연분이 찾아온듯하다. 지인의 소개로 한달전에 만난 처녀와 현재 교제중인데 조예천씨의 느낌으로는 처녀가 키도 크고 용모도 단아한데다가 마음씨도 착한 등 전통조선족녀성의 형상을 갖춰 자신의 마음속 리상형이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교제중에 있는 두 사람은 적어도 2~3일에 한번씩은 만나서 외식도 하고 산책도 하며 문화, 가정, 음악 등에 대해 담론할라치면 서너시간은 어떻게 지나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처녀의 신분에 대해 조예천씨는 그저 장씨이며 예술분야에서 사업한다는것만 밝히고 더이상의 말은 아꼈다. 그러면서 여건이 되면 래년에는 꼭 결혼할 타산임을 밝혔다.

아무튼 조예천씨가 좋은 연분을 만났다면 하루빨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이후 사업에서도 더욱 큰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본다.          


연변라지TV신문   전일봉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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