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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근- 중국 조선족 문화거장 표연예술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10년12월29일 11시18분    조회:7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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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어방송넷 2010-12-22 글 : 김학송 (전 연변극단 서기 겸 업무단장, 현재 연변가문단 창작실, 편극, 문학편집, 서류당안실 주임, 행정당지부서기)]

리영근(1930.12-2010.9)
웃음의 빈 자리

 —고 중국 조선족 문화거장 표연예술가 리영근선생을 추모하여

 지난 2010년 9월 2일 웃음의 왕별 고 리영근선생은 고향 저멀리 장춘시에서 뇌혈전과 당뇨병 치료에 효과를 보지 못 하고 향년 81세로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소식을 접한 연변가무단 령도들과 당년의 동사자들 재직 후배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다.

리퇴직한 많은 로선배님들은 신체상황이 여이치 못하여 장례식에 참여 못하지만 마음을 담아 술을 부어 고인께 “부디 잘 가시라”는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의 전화가 련이어 왔었다.

2010년 9월4일, 중공연변주위와 문화국에서는 분분히 해당 일군을 파견하였고 부분적인 직장의 령도와 연극부의 부분적 배우들은 자각적으로 고인의 장례식에 참가하고저 이른 새벽에 단위의 버스에 올랐다. 나는 그의와 함께 보냈던 추억에 잠겼다…

새해 벽두을 앞두고 웃음의 왕별을 기다리는 시청자들은 언제면 한번 더 그이가 출연하는 연극소품이나 일인극을 다시 볼수 있을까 하는 기대가 앞설것이다. 하지만 전국을 들성케하였고 예술계의 인끼를 끌었던 우리의 웃음의 자리는 비였다. 웃음의 왕별은 다시는 무대나 영상에 새로운 작품속의 인물형상을 부각할 수 없고 빈 자리만 조용히 남기고 고향멀리 타향에서 저 세상 별 자리로 옴겨 가셨다.

전날, 나는 그이의 추도사를 쓰기 위하여 당안을 한장한장 펼쳐 갔기에 그이의 성장 발자취를 더 알게 되였고 지난 과거지사는 나로 하여금 감동을 받지않을수가 없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읽어 보았다. 그이의 성장 사연은 나로 하여금 수차 격동과 감탄을 안겨 주었다.

1930년 12월 20일(양력 1월19일) 룡정에에서 부친 리승룡과 어머니 현금선의 아들로 태여나 훈춘에서 첫돐생일을 쇴다고 자서전에 밝혔다. 그이는 1937년 2월부터 1942년 12월 사이 훈춘현일완전소학교에서 소학시절을 보냈고 1943년 2월부터 1946년 10월 5일까지 훈춘현혙립중학교에서 중학시 절을 마감한다.

중학시절 그는 벌써 자체로 극본을 써서 연출을 보고 직접 출연해 인기끌었다. 그때 그 학교에는 일본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배선생이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선생은 쒝스피어극을 학생들에게 맡게 수개하여 련습시켜서 주위의 농촌을 다니며 연극하였기에 그에 대한 소문은 동네방네에서 어린것이 연극을 심통히도 잘 논다는 칭찬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졸업한 그의 원 리상은 조선에 나가서 공부를 더 하는것이 였다. 하지만 가난으로 집에서 책과 동무하며 나날을 보냈다. 1946년 11월부터 1947 년 7월 사이에는 훈춘현 보안단문공대의 김홍철이라는 분이 찾아와서 연극을 함께 해보자며 이끌어 주어 집에서 배를 곯지 말고 밥도 준다는데 해보겠다고 따라 나섰다. 이때로부터 리영근선생의 연극인생의 길이 펼쳐진다.

그이가 처음으로 극본을 받고 보니 연극《혈채》였다. 극중에서 그는 돼지몰이 역을 감당한다. 이 연극이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받은 전문단체 연극 대본이자 연극 전업인생 첫 밝자욱이였다. 그후 그는 배우 겸 창작조 조장을 맡고 연극예술인생 을 더 높은 차원으로 올리려고 많은 세계명작들을 탐독한다.

그이는 연극《마도의 려명》에서 역을 맡으면서 또 한층 진보한다.

당시 참군열조가 세찬시대에 신체 상황으로 참군까지 안되자 그는 공부를 더해 보겠다고 조선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문공대(훈춘연극단)에서는 그에게 문예부 부장직을 주면서 극구 만류하여 계속 연극에 몰두한다.

 

      1957년 구 쏘련연극<보로예부 의사>에서의 이영근

1947년 10월부터 1948년 7월까지는 훈춘현 제2동포태촌에서 농사업을 종하면서 연극활동을 진행한다. 그러다 1948년7월부터 1951년7월사이에는 훈춘현문예공작대에서 연극활동에 종사한다. 그에 앞서 전직이 두 사람중 단장을 내놓고 그이 뿐이였고 그다음 직원들은 극본에 따라 채용되였다고 한다. 그당시 영화관은 문공단에서 관리 했는데 그는 숙질실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면서 단장한테서 연극 초기 극작법을 배웠 다고 밝혔다. 그시기 그는 연극《돌아선 사람》,《쑥떡이》,《형제》등 항미원조를 동원하는 극본도 써서 공연을 계속이어 간다.

1951년 초봄, 그이들의 공연은 연길에까지 와서 공연되였는데 당시 연변문공단 연극조 책임자와 배우들도 그들의 공연을 관람한 것이 인연이되여 1951 년 11월 29일 부터 1956년 1월 29일까지 연변문공단 배우로 극본(삼노인)도 쓰면서 종자배우로 인기배우로 인민의 애대를 받는 배우로 성장의 길에서 분투해 왔다. 당시 연극과 “삼노 인” 극이 어찌나 환영을 받았는지 1년에 하향공연이 200여일도 더 되였다고 한다.

관객의 수요에 만족을 주고저 중공연변주위와 주 문화처(현 주문화국)에서는 성과 중앙에 중국 조선족자치주연극단을 창립할데 대한 보고를 앞두고 룡정문공단의 부분적 배우들을 선출하여 련합공연으로 조선 명작 연극《춘양전》을 련습하여 공연하였는데 인산인해를 이루는 대 경관속에서 성과와 큰 사회적 반향을 이르켰다고 한다. 이와 함께 중앙문화부에서도 창립을 비준하여 1956년 1월 31일 조선족 수부인 연길에서 연변조선족연극단이 탄생하여 리영근선생을 비롯한 연직원들은 희열로 들끓었다.

향후 “문화대혁명”시기에는 그이도 검은 돌풍에 휘말려 농촌에 똘리워 농사일도 하고 벽동공장에서 땡땡 내리 비치는 여름 삼복철에도 불가마에서 구운 벽돌을 날라 내오다나니 가슴과 배 가죽은 데서 아리다 못해 죽을 지경이였다고 한다. “그때 죽지 않은것이 다행이였다.”고 말씀한적도 있다..

쥐구멍에도 해빛들 날이 있다고 만상풍파을 격어오던 어느날 통지를 받고 단위로 다시 돌아와 연극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두번째 해방을 맞은 기분이였다고 한다.

나는 며칠동안 밤낯 그의 자료들을 보며 고인에 대한 충분한 긍정과 공적을 참답게 남겨야한다는 의념으로 그이와 다년간 함께 순회공연을 다니며 들었던 이야기 들과 내가 친히 함께 겪었던 일들을 더듬어 보노라니 이왕지사들이 텔레비죤 화면 처럼 펼쳐지는듯 싶었다… 

가난에 쪼들렸던 어린시절 연극을 보기 위하여 류랑극단 홍보마차를 따라 다니며 홍보를 해주고 팔목에 검은 도장을 찍히우고는 극장 입장을 허용 받았던 일, 후일 소학교와 중학시절에 문예선전대에서 “호랑이” 역을 하여 “호랑이” 별호를 가졌던 소년시절, 1945년 광복을 맞으며 훈춘보안단 문공대(1946.11-1951.7), 연변문공단(연변 가무단 전신. 1950- 1956.1), 연변연극 단(1956.1-2005.12), 연변가무단(2006.1-2010.9.2) 등 전업예술단체에서 인끼를 한 몸에 안으면서 연극표연예술과 창작에 근 60년을 예술 이라는 외길에 필생의 정력과 피땀을 빛 뿌려온 예술인생이였고 인민의 애대를 받는 배우였으며, 배우들의 존경하는 선생이시였다.

   

       1958년 연극<뻐국새는 또 운다>에서 주인공역 리영근

중공당원, 부현급간부, 국가1급배우인 리영근선생은 중국조선족연극계의 제1대 원로예술가이며 조선족연극의 계승과 발전 및 인재배양에 마멸할수없는 공적을 이룩 하였었다.

그이가 연극전업단체에서 불태웠던 60여년간 참여한 극목만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중 주요한 극목들만 살펴보면《혈채》,《춘양전》,《심청전》,《뻐국새는 또 운다》,《장백의 아들》,《초유록》,《네온등 아래에 선 초병》,《털없는 개》등 70여 부이고 단막극으로는《사위감 점고》,《바람》등 20여부이며 “삼로인” 창작작품과 출연된 작품으로는《새로운 장정》, 《며느리 자랑》등 30 여부였고 주요창작, 출연된 소품으로는《심각한 검토서》,《우리 집 문제》,《림시선수 2번》등 20여부이다.

그외 만담《개구리 오락회》,일인극《보고전의 보고》와 같은 작품은 해학적이고도 유머가 찰찰 흐르는 기량을 보여 주었었다. 이상의 작품들은 모두다 그이가 친히 창작하고 출연한 작품들로서 사회의 공명을 일으킨 작품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0년 연극<장백의 아들>에서 사사끼 역을 맡은 리영극

  

    1982년 연극<첫봄>에서 생산대주임겸 원 생산대 대장 역을 맡은 리영근

영화《첫봄》중 그이가 맡은 배역은 반면 1호 인물 리귀남이다. 그이의 독특한 연기는 지금까지도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고 있다.

특히는 그이가 환갑을 앞두고 참여한 희극《털없는 개》중의 주인공 성구형상은 조선족 사회는 물론, 전국과 해외에까지 돌풍을 일으켜 큰 센세이쇼 환락에 빠지게 했다. 이는 연극사의 일대 격변이였으며 60여년 전업연극사의 일대 변혁이였다. 지금 도 “성구”라는 극속의 인물을 떠 올리면 웃음이 저절로 앞선다. 

거장도 이삭줏이가 있었기에 풍년벌 쾌감의 감미로움을 맛 본다. 그이의 많고 많은 인생풍파는 바로 거장으로 달려가는 필연적인 체감의 행로였기에 작은것도 버리지 않고 루적한 보람으로 거장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이룩하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이는 연극 생애60여년래 100여부의 작품에서 출중히도 자신이 맡은 인물을 생 동한 형상으로 부각하였었다. 그이는 연극무대, 텔레비죤극, 영화, 영화배음, 소품, TV소품 등 각종 예술령력에 참가하시여 성공적으로 부동한 년령, 부동한 인물 성격 과 형상, 부동한 인물 내심세계를 창조하여 조선족관객과 형제민족 관객들 앞에 나타 나 보여 주었기에 그렇게도 깊은 인상을 남기시였다.

그이의 기본공은 그렇게도 무궁 무진하였고 풍부한 표현력은 인물부각에서 준확도가 높았고 생동하였으며 특히는 창 의사로와 개척의식 및 관찰력에서는 문화수양과 인간수양의 이미지를 돌출히 보여 주 었었다.

세상은 공증했다. 열심히 일을한 사람한테는 그 언제든지 영광을 긍정해 주었다.

중국 조선족 전업단체연극예술에 종사하면서 그의만치 성과와 영예를 안으신분 여직 몇분이라면 그이는 두번째 안에서 달렸을 것이다. 그이의 성과을 긍정코자 그이 는 국무원수당금을 향수 받는 영예를 지녔고 무수한 예술형상을 창조한 선생은 중국 문화부연극축제에서 조선족배우들중 유일하게 문화부 개인 표연예술연기상을 수상했 으며 지금껏 그이만이 “중국연극예술계’금사자컵 금상’표연상”을 수상했다.

또 동북3 성축제에서도 연기1등상, 길림성 연기1등상, 길림성“장백산문예상”, 길림성정부에서 수여한 “대공1차기입”, 길림성“덕예겸비”우수회원영예상, 자치주“진달래연기상”, 주 주위와 주문련의 “덕예겸비”우수회원영예상, 최우수 코메디배우상 등등 수많은 국직 국직한 상과 영예를 쌓아올린 문화예술의 공신이다.

나라에서도 대형기념활동마다 공신들을 잊지 않았다. 2007년, 길림성정부에서는 중국백년연극기념활동에서 그이 한테 “돌출한 공헌상 칭호” 영예상을 수여하였고 동 년, 중공연변주위와 자치주정부에서도 50년래 “민족문화사업의 돌출한 공헌 인물”로 추대하여 특수영예칭호 및 영예증서와 상패를 수여하였다.

그이의 사적과 공적은《중국희곡가 대사전》에, “휘황한 20세기 중국대기록·길림 권”에, 《중국조선족인물록》등 서적에 수록되여 기리였다.

사회적으로는 중국연극가협회 회원, 중국연극예술연구협회 회원, 중국소수민족연 극가협회 회원, 길림성연극가협회 회원, 연변주문련 고문, 연변연극가협회 회원, 부주 석, 고문, 연변텔레비방송국 문예부 초빙 편집고문, 배우 등 직에 겸직하였으며 1979 년부터 연변주정협 제5, 6, 7기의 위원으로 활약하셨다.

중국 조선족 사회의 웃음의 발굴자, 웃음의 조립자, 웃음의 생산자로 자리 매김을 하신던 선생은 웃음의 빈 자리만 남기시고 너무도 조용히 저세상으로 가셨다.

추도식에 참가하고 그날 밤으로 연길에 돌아온 나는 추모의 글을 쓰려고 몇 번이 고 노트복을 펼쳤다가도 어쩐지 선생의 사망을 너무 빨리 이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 아서였는지 감히 서두도 못 떼고는 닫아버리군하였다.

특히는 새해 벽두인 양력설과 음력설 등 명절을 앞두고 있는 이 시각 어쩐지 주 위에서 울리는 웃음소리만 들어도 리영근선생이 살아생전에 남기신 매개 작품속 인물 들이 영화 필림마냥 나의 머리에 떠 오른다. 이는 아마 거장으로서의 그이의 형상이 이내 마음에 깊숙이 자리잡은 원인 때문일것이다.

1979년, 나는 그이가 출연한 연극《장백의 아들》에서 리원길 역으로 출연되였 을 때 처음으로 깊은 인상을 받았다면 이는 무대를 통하여 내가 그이를 알게 되였다 면 1983년, 나는 중앙희곡학원에서 조선족배우반 학생모집 시험장에서 그이를 비롯한 선생들 앞에서 지망생으로 시험을 받던 시각이 현실생활속에 리영근선생과 근거리 대면이였다.

당시 그이가 시험내용과 이것저것에 대한 질문이 없었다면 나는 연극속 의 “리원길” 역을 감당했던 선생을 알아 보지 못 햇을 것이다. 시험관으로 7명중 3명 은 희곡학원 표연계주임을 비롯한 선생이였고 4명은 연변연극계, 방송계의 선생들이 였는데 그중 연변연극계 원로인 리영근선생도 계셨다.

그날 선생은 다른 연변 시험 관선생들과 함께 내가 표연한 무언소품“눈”을 보시고 눈굽을 찍으시며 “표연을 훌륭 히 완성하였다”며 누가 쓴 소품인가 물으셨다. 나는 내가 수필을 보고 각색한것이라 고 하자 그이는 “그래 글 재간도 있구먼 …”하면서 주위의 시험관들을 보시며 호탈하 게 웃으시는 것이였다. 그 당시 그 웃음은 나로 하여금 얼마간의 긴장을 풀어 주었다 면 인츰 뇌리에 바람처럼 스쳐간것은 연극 《장백의 아들》에서의 간사하고 음험한 “리원길” 역이 떠오르자 나는 키드득 웃었다.

그후 내가 연극단에 입단하였을 당시 그이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의 계몽선생인 리동철선생한테 그이가 왜 보이지 않는가고 물었다. 연출로 계셨던 리동철선생은 “영근동무는 중앙희곡학원조선족연극반 대사교원 겸 반주임으로 중임을 맡고 북경에 계신다”고 하셨다. 후일 대사선생으로 그이의 부인인 배우 전정자선생도 북경으로 가시여 함께 대사과 담당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안부를 전했다.

1984년으로부터 1988년사이 그이는 중앙희곡학원 조선족 연극학부 표연반 대사 교사를 맡으며 사업하시는 사이 조선말 대사과 교학을 위하여 70여만자나되는 교재 를 편집, 집필하여 교학에 사용하셨다.

 

   중앙희곡학원표연계 조선족반 학생들에게 대사과를 상학하시는 리영근

1988년7월, 당시 배우 겸 엄무과에서 편집, 예술당안을 책임졌던 나는 리영근 선생님이 졸업생23명을 이끌고 연변예술극장에서 졸업작품으로 일본연극《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며칠전부터 공연에 상응한 사무를 련계하며 그이와 접촉할 시 간을 가졌다.

나의 인사를 받으시며 선생은 “오? 나 자네를 기억하네 집이 룡정이지 무언소품<눈>을 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구먼, 잘 됐네. 인젠 함께 공작하게 되였으 니 자네 소원도 성취됐겠자 손잡고 잘해 보세…” 이 대화가 그이와 나의 첫 언어 교류의 시작이였다. 어쩐지 엄격한 모습 보다는 친절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그후 선생과 나는 함께 사업하면서 많은 면에서 교감을 가졌다. 내가 맡은 역을 보시고는 차근차근 결함을 지적해 주셨고 또 내가 쓴 작품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세심 히 심혈을 몰부으며 수개해 주셨다.

더욱 잊혀지지 않는 일은 그이가 퇴직한 후 재 초빙되여 연극《교회당 종소리》 의 연출(합작) 겸 배우로 활약하던 그 당시 선생은 둘째딸 결혼식을 앞둔때 였다. 선 생은 련습실에서 홀로 밥곽을 펼쳐 놓고 한편으로는 식사를 하면서 극본을 들여다 보 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마늘을 까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 말없이 마늘을 까자 선생은 “밥은?” 하면서 함께 들자고 하셨다.

나는 먹고 오는 길이라며 선생을 계속 살폈다. 선생은 마늘을 까서는 비닐주머니에 담는것이였다. 그제야 나는 선생이 식사시 자시 자고 마늘 까는것이 아님을 알았고 극본 연구를 하시는 선생에께 방애가 되지 않게 조용히 마늘 겁질만 벗겻다.

내가 숙소의 보온병을 들고 물고뿌에 물을 부어드리자 선생은 미소를 지으시며 “내 꼬락서니 우습지?” 나는 “아니요.”하고는 계속 마늘을 깠다.

선생은 함께 마늘을 까면서 “고맙소. 남들이 다 쉴때 점심 잠이나 쉬고 올거지…, 공연이 나 때문에 동무의 작품연구의 시간을 랑비 시켰구먼…”

나는 아니라고 하면서 겨울 김치철도 아닌데 무슨 마늘을 이리 많이…” 그러자 선생은 빙그레 웃으시며 “둘째 딸년이 며칠후 결혼한다네. 이게 지금의 부모 꼴이네” 그러시며 “인생이 연극과 같다니깐… 우리가 하고 있는 연극사업 자체가 모두 생활 에서 오지 연극을 하자면 생활에 눈길을 많이 돌리고 많이 살쳐 보며 많은 정서적 기억을 축적해 두게 이것이 연극인에게는 그 무었보다도 좋은 선생으로 되고 큰 재부 로 빛을 뿌릴때가 있네.” 그러시며 선생은 먼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시더 니 “세 상이 동무를 어떻게 희롱하던, 어떻게 슬프게 하던, 그 어떤 고통을 주던 실망 하지 마오. 바다에 빠졌 더라도 짚 한오리만 보여도 잡으려고 끝까지 뻐덕거려 보우 나중에 웃을 때가 있을거우…. 흐흐흐…”

나는 너무나 감동되였다. 부모의 책임을 다 하시는 아버지, 그러시면서도 연극인 의 정신이 푹 담겨져 있는 반백이된 선생의 모습을 다시 보면서 그의 프로정신이 빛 뿌리는 뜻한 깊은 장면과 타이름을 나는 마음에 아로 새겼다. 아니 인간세상을 살아 가는 그이의 철학은 나에게 깊은 귀감으로 남는다. 남들 같으면 퇴직을 일삼아 출 가하는 딸을 앞두고 이렇게 마늘이나 까며 바삐 돌아칠 수 있었을까.

그후 1995년, 그이는 시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 주임 김영건선생의 초빙 으로 “주말극장” 새 프로젝트 편집고문으로 추대되여서부터 김영건 주임의 높은 조 직능력, 관찰능력, 판단력 및 과단성이 마음에 드신다고 당시 함께 “주 말극장”프로 제작팀 기획성원이였던 나에게 몇 번이고 자랑하시며 예술은 이 같이 아이디어를 뽐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야 새로운 프로그램 즉 시청자들이 안방에 많이 모이게 된다니까 …” 참으로 그랬다.

당시 “주말극장”프로 시간이되면 모두들 앞 다투어 텔 레비챠넬을 찾군하였고 시청률도 제일 높은 프로로 부상되였었다. 이렇게 시작 된 새 길에서 아니 퇴직후 직접 창작, 연출, 출연을 맡으며2003년 춘절문예야회까지 언제나 웃음을 뿜는 자리에 나타나 석조여광의 웃음의 광야를 빛 뿌려 주셨다. 아마 불완전 한 통계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기에는 시청률을 제일 많이 올린 년대기가 “주말 극 장” 시대가 아닌가고 말하고 싶다.

그는 텔레시죤 시청자들을 위해 1989년에 처음으 로 출연하셨던 단막극”사위감 점고”로부터 시작하여 2003년 춘절야회에 출연한 “코메 디 가족모임” 종목까지 통계를 해 보면 장장14년이란 사이에 줄곧 근경예술인 텔레 비죤 시청문화을 위해 공헌한 공신이였다. 물론 14년을 시청자들을 위해 뛰고 뛰고 또 뛰였다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그이가 창작, 연출, 출연한 작품들을 대라면 조선족사회의 그 누구나를 물론하고 수선먼저 단막극“사위감 점고”, 소품“우리집 문제”, “차길”, 일인극“보고전의 보고”, “렬사증 문제” 등등 작품들을 인츰 입에 올릴것이다….

  

          1996, 소품<차길>에 출연한 리영근

향후 선생과 함께 순회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그중에서도 “리영근 100쇼 소품야 회” 순회공연때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당시 나는 예술과 과장 겸 공연경영부 경 리직을 맡으면서 경제도급을 맡았었다. 물론 공연회수도 보장되여야 했었다. 제목 자 체가 “리영근 무대생애 50주년 ‘100쇼’ 소품야회”인 만큼 주체는 어디까지나 선생 본 이였다.

기획부터 선생님의 신체상황을 고려하여 축하소품으로 몇 부를 넣어 구성하 려고 하였지만 선생은 이미 자신의 공연할 소품을 수두룩이 준비하여 편집실에 넘겼 고 또 자신감을 비쳤기 때문에 그 작품중에서 선택하여 전반 “야회”의 구성을 짯다.

그 작품들로는 단막극“림시선수 2번”(리영근작), 번역 개편소품“부디 안녕히”(리영근 번역 개편), “출생소동” 등 작품들이였다. 1996년 당시 선생님은 66세였지만 인생전부 를 연극이라는 무대에서 인생을 녹이며 달려온 50년인 만큼 힘들어도 할수 있다고 하셨다.

공연은 대 성황리에 인기를 끌어 희극《털없는 개》공연의 돌풍의 힘과 더불어 큰 센세이쇼를 불러 일으켰었다. 주위와 주정부 및 사회단체와 개체호들까지 분분히 후원하고 성원을 아끼지 않은데서 연길에서의 기념공연은 대 성황속에서 막을 내리웠 다. 그이가 4년간 북경에서 가르쳤던 학생들도 선생의 무대생애 기념공연을 관람하고 뜻깊은 기념사진도 남겼다.

당시 선생의 얼굴에는 땀으로 흠벅젖어 있었는지라 감격 의 눈물은 기쁨의 희열과 융합되다나니 그 누구도 발견할 수 없었다. 다만 사진 초점 을 마추던 나만이 렌즈를 당겨오는 순간 가슴이 뭉쿨함을 느겼다. 선생님은 땀을 닥는것이 아니라 눈물을 닥고 있었다.

50년을 달려온 무대에서 그이는 아마 처음으로 자신의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외의 눈물은 모두 배역속 인물의 감정세계의 눈물이였으니 말이다. 그날 그는 기념공연에 참가한 모든 동사자들에 게 “수고 했소” 란 인사말과 함께 일일이 악수를 하셨다.

 

  

      1991-1-95년, 희극<털없는 개>중 주인공 성구 역을 맡은 리영근

 

그후 각 현시 극장마다 이소식를 듣고 앞다투어 당지에 와서 공연해 줄걸 요청해 왔었다. 전주 순회공연은 가는곳마다 잔치날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공연팀이 화룡시남평구락부에서 일이 생길줄이야. 그것도 나 때문에. 나는 당시 공연대 대장 겸 무대감독을 맡은 한석봉선생과 함께 무대 장치 직전 구락부 정황을 료해하려고 구락부 무대에서 무대장치를 할 현장을 돌아 보고 내려 오던중 2층에서 구락부 무대 조명을 먼저 꺼버리는 통에 측막 옆 층계로 내려 오다가 벽돌로된 층계가 뭉청 파손된것 때문에 나는 그만 2메터 반도 넘는 악대 복석에 떨어져 정신을 잃었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리영근선생을 비롯한 연직원들이 내 주위를 둘어서서 왼족 눈 옆으로부터 내리 14곳을 꾀매고 있을 때였다. 나는 눈물에 잠겨 있는 동사자들을 더는 볼수가 없어 슬며시 눈을 감고 아품을 참았다. 그런데 선생은 내 손을 잡고 내 이름을 부르며 “아품을 참지 말고 아푸면 아푼것만치 소리를 치라이… “ 그 한마디만 지금껏 기억에 남았으니 내가 아마 또 혼미상태에 잠겼으리라 믿는다. 

시간이 얼마 흘렸는지 내가 눈을 뜨고 시계를 보니 공연시간이 이미 30여분이나 지난지라 나는 옷을 둘쳐입고 구락부로 향했다. 마침 한부의 소품을 마치고 퇴장을 하시던 선생은 붕대로 머리를 싸매고 무대뒤 구석진 곳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내 한테로 달려 오더니 “왜 이러오? 엉? 피를 얼마나 흘렸는데 어서 들어가 휴식하오.” 그러시면서 내 손을 억세게 잡고 나를 안아 주는 것이였다.

내가 “선생님도 차사고 를 당하여 머리로부터 팔, 다리에 붕대를 동이고서도 연변병원 앞에서 관심과 사랑을 안고 몰려온 몇 천명 관객들에게 “연극은 죽지않았습니다.” 라는 구호를 부르고는 그 모습 그대로 현장에서 공연을 하지않았습니까. 나도 선생님한테서 그 정신을 배웠습 니다. 그러시자 선생님은 “좋소. 좋소. 이 모습 이 정신 좋다니깐…” 그리고는 걸상을 찾아다 나한테 가져다 주고는 꼼짝 말고 앉아만 있으라고 분부하시고는 옷을 갈아 입고 다음 푸로로 등장하셨지요.

조직과 리영근선생은 나를 보고 집에 돌아가 휴식하면서 치료하라고 하면서 조직에 련락하였지만 나는 리영근선생의 프로정신에 감동되였던 순간들을 생각하고 뜻깊은 선생의 기념공연을 포기하고 집으로 갈수없었다.

선생님은 때마다 식사를 끝낸다음에는 가만히 나한테 다가와 닭알 두알을 호주머니에 넣어 주면서 “또 다른 사람을 주지말고 동무가 꼭 먹어야 하오. 피를 보충하는데 빠르다니깐…” 그리고는 “오늘 처치하려 안 가오”하며 문의하고 재촉하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잃었던 아버지가 나타나 내 옆을 지켜주는 듯한 감동을 받군하였다. 그 선로의 순회공연은 약 20여일만에 끝났다.

며칠후, 퇴근 시간을 앞두고 선생은 나의 사무실 문을 열더니 “점심에 시간을 좀 비워주오. 나와 함께 작품 토론을 좀 하기오.”라고 하시는것이였다. 나는 응락했다. 그이와 함께 도착한 곳은 다름아닌 그의 저댁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모님 전정자선생이 행주치마자락에 손을 닦으며 내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눈물지으며 “집에 애기엄마가 얼마나 놀랐겠소.

자자 보기요…” 하시면서 내 상처자국을 만지시고는 눈물을 닦으시였다. 리영근선생님은 “아니 동무, 배 곱푸다니, 신이나 벗게 손을 놓고 말하오.” 나는 함께 웃었다. 주방에는 벌써 정성들여 갖춰놓은 음식들이 가득했다.

내가 재간없는 술을 사냥을 하자 선생은 “한잔만 하자이, 죽음에서 살아온 축하잔 말이오. 내나 동무나 죽음의 문턱을 건넜던 사람이야.” 그 뒤를 이어 선생의 인생의 동반자이고 연극의 동사자인 부인 전정자선생도 “그래 나도 함께 축하하겠소. 한잔만 드오.” 나는 눈물반 술반이라 할까. 온 마음에 부모의 깊은 사랑과 관심속에 잠긴 기분에 또 선생의 과거 지사를 들으며 웃음속에서의 한잔 한잔에 선생님들이 짚어주는 맛나는 채를 감미하면서 얼마나 먹었는지 모른다.

내가 밥상에서 송구스러워 할때 마다 선생님은 “일은 겪어 봐야 안다니까…”하면서 “우리가 만난지가 10여년이되지만 어쩐지 나는 동무와 만난지 30년도 넘는 친구가 돼 보이우. 앞으로 연극이라는 길에서 서로 도우며 힘내 보자구. 우린 친구야 친구 자 들자구… 함께 연극에 미쳐 보자구…” 나는 너무나도 편안하게 보냈던 그 날을 평생 잊지 안을것이다. 그이는 이 같이 사랑도 넘쳤을 뿐더러 연극사업을 사랑하는 후배들에게 시시각각 힘을 주고 신심을 주며 이끌어 주셨다.

2004년 가을, 나는 공무로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와 성문화청에서 사무를 끝내고 주숙처에서 선생한테 문안 전화를 드렸다. 선생은 다짜고짜로 일 끝나는대로 댁에 오라고 하셨다. 전정자선생님도 기다리겠다고 하시고는 울먹이며 뒷 말을 잇지 못하고는 전화를 놓는 것이였다. 고향을 떠난지가 2년이 넘었으니 그리움 때문이였을 거라고 생했다.

나는 년세가 많으신분들이라 문안 전화만 들이려고 했는데 그런일이 아니였다. 저녁 식사시간도 이른데 전정자선생 한테서 또 전화가 걸려 왔다. 올때까지 기다 릴테니 일 보는 즉석에서 오라고 하셨다. 나는 동사자와 함께 댁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전정자선생이 큰 대문 앞에서 우리 일행을 기다릴줄이야… 나는 차에서 급히 내려 어머님 품에 안기듯 선생의 품에 안겼다. 선생님은 눈물을 닦으시며 “그래 거멀이(함께 공연 다닐때 항상 나를 보고 ‘거멀’이라고 불러 주셨다. 친구라는 듯) 올줄 알았다니깐…”

리영근선생도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내 손을 덥석 잡아쥐더니 ”보라니깐 다른 사람은 몰라도 꼭 온다구 하잽데…” 리영근선생은 창문으로 그 광경을 보셨던지 언녕부터 눈가에 이슬을 담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나를 가운데 앉히고는 동사들에 대한 정황, 극단의 운영 정황에 대해 대답할 기회도 주지않고 련줄포 문의를 제기 했다. 나는 그속에서 고향의 동사자와 극단의 운명에 대해 얼마나 많은 근심에 나날을 보냈을가 하는 감동에 조용히 모든 문의에 대답해 주셨다.

  

        2006년 필자가 리영근선생의 댁에서 남긴 기념사진

 

그날 밤, 나는 인생의 귀감으로 될 두 선생의 과거지사를 너무나도 많이 들었다. 내가 밤도 깊었는데 휴식하시라고 하자 선생님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못 가오. “오늘은 함께 밤을 새도 즐겁소.” 그러시며 전정자선생은 내 웃옷을 다른 방에 감추어 놓고는 저녁 상을 차렸다. 그날밤 인생의 이야기는 장편드라마였다. 격정과 감동, 현념과 운명의 발자취가 담긴 아름다운 문화거장의 력사의 편장이였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날 밤 이야기는 나에게 연극력사와 그이들의 과거지사를 탐독한 시각이 아니였던가 고민해 본단. 너무나도 부모의 집에서 뜨거운 사랑을 한 가슴으로 감동하며 포근한 어머니 아버지 품에서 행복을 만끽한 뜨거운 기분이였다.

2006년, 연변연극단 건단50주년 경축행사시 내외간은 어김없이 참석하셨다. 유감 이라면 리영근선생님의 신체 상황이 그번 보다 만히 좋지 못하셨다. 그해 두분은 흥안고대성양로원에서 있으시면서 치료를 받으셨다.

다행히 그기간 나는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화광장” 감독을 맡은 리상호선생에게 리선생이 연길에 계시는데 지금 촬영하는 것이 유일한 기회라고 전했다.(전일 문의할때는 장춘에 계셨음) 날자가 약속되자 나는 인츰 각항 문자, 사진, 영상자료를 수집하여 제공했다.

리상호감독으로 촬영은 성공적으로 되여 방송되였다. 어쩐지 나는 큰 잔치를 치른 기분이였다. 조선족 문화거장에 대한 존경이라할가 후배의 책임감이라 할가 아니 시기상조였다고 해야 적절할것이다. 이점은 그 이듬해 더 증실되였다.

2007년, 자식들의 효도로 덩실한 별장 같은 댁으로 또 다시 이사를 앞두고 리영근선생은 사랑하는 안해를 잃었었다. 추도식 직전 편치않은 선생님댁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비감에 잠겨 있을 거라고 한 방금까지 생각을 확 날려 보냈다. 선생은 웃는 모습으로 쏘파에 앉아 일일이 당년에 동사자들과 후배, 제자들의 손을 잡아주며 와주어 고맙다고 하시였다. 하지만 나는 그이의 눈속에 꽉 차 있는 눈물을 보았다.

그 웃음속에 담겨져 있는 비애에는 누구 보다도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슬품이 술렁이고 있음을 감안할수가 있었다. 왜 그렇지 않으랴. 50여년 인생풍파, 인생고락을 함께 딛고 헤가르며 달려온 반려가 아닌가?! 제일 마지막으로 자리를 뜨는 나에게 손짓하던 선생은 눈물을 닦더니 넉두리를 하셨다. 슬품의 폭팔이였다.

나는 달려가 선생님의 량손을 꼭 감샀다. 선생님은 락노하시며 “내가 먼저 죽어야 되는데…” 그 한 마디에는 안해에 대한 깊은 사랑의 정이 푹욱 담겨져 있었다……. 이 시각이 선생과 나와의 마자막 만남으로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장례식날, 고 리영근선생의 둘째아드님이 우리 일행의 마중을 하려 나왔었다.

버스는 둘째아들 학삼의 차 뒤를 따라 장춘시 빈의관에 도착하였다. 우리의 일행은 가족을 따라 사체실에서 고인에게 묵도로 마음의 바램을 숙원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선 나는 깜짝 놀랐다. 장례식장 안에는 고인을 추모하고저 꽉 차 있었다. 내 생각과는 정 반대였다. 타향이기에 그렇게 많은 분들이 참여할 줄은 생각지도 못 했다.

북경, 청도, 연변 등 지에서 사업하는 그의 제자들인 박춘우, 최웅래, 박송희도 이미 현지에 와 있었다. 비록 고향을 떠나 있는 몸이지만 은사의 은혜는 절때 잊지 않을 거라며 눈물을 훔친다.

고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각 단체들과 개인들이 올린 화환은 례식장 안 주변에 빈틈없이 메우고 있다.

추도곡속에서 자식들과 형제, 손군들 그리고 사면팔방에서 찾아온 동사자들과 친구들, 그리고 성문화청, 주위선전부, 주문화국에서 파견한 대표들 및 해당일군들은 물뿌린듯 조용히 묵묵히 고인을 추모했다.

연변가무단을 대표하여 연극 주관단장이 단위의 위탁을 받고 추도사를 드렸다.

고 리영근선생은 60여년간 문예와 연극사업중에서 강렬한 사업심과 드높은 책임감으로 당에 충성하였고 고심히 엄무를 연찬하였으며 일터를 사랑하였고 원칙성이 강하였으며 동지들과 단결하고 열정적으로 방조하였으며 일마다 공증하길 추구하고 렴정자률적으로 사업해온 일생이였다.

그는 정직하게 살아온 일생이였고 동사자들과 허 심히 탐구하고 후배를 사랑하고 잘 이끌었기에 사업에서나 생활에서 전범적 작용을 놀았었다. 그이는 수차 단위에서 우수사업자로 선출되였었다. 그이는 중국문예발전과 조선족연극예술사업을 위해 마멸할수 없는 거대한 공헌을 하였다.

장내에서는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순간순간의 장면을 렌즈에 담던 나는 뭐가 잘 못 된 곳이 있나하여 주변을 살피고 조용이 물었더니 하는 말들이 “이렇게 훌륭한 분인줄 우리는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라고 하면서 머리를 끄덕이군 하였다.

그렇다. 리영근선생의 서거는 우리 동사자들은 훌륭한 동지를 잃었으며 조선족 연극예술발전의 견증인을 잃었다. 그이의 근면하고 나를 잃고 사업하는 헌신정신과 소박하고 근검절약하는 우량한 작풍, 고상한 품덕과 부지런한 진취심은 우리가 따라 배워야 할 본보기라고 본다. 자식들은 자애로운 아버지를 잃었다.

죽음은 재생을 당겨 올수 없는 만큼 우리는 고인의 훌륭한 사업작풍과 정신을 이어 가며 맡은바 사업에서 실제 행동으로 보답해야 하지않을가. 이것이 고인에 대한 진정한 정이 담긴 추모의 자세가 아닐가.

우리는 웃음의 왕별, 문화거장의 마멸할수 없는 공적을 쌓아온 고인으로 하여 무한한 긍지와 자랑을 안게 되였으며 조선족 연극인들은 훌륭한 선생, 선배를 잃게 되여 비통에 잠겼지만 그이의 사적과 정신으로 쌓아 올린 성과와 영예로 하여 자호감과 뿌듯한 긍지감에 감개 무량함을 억제 못 한다. 빛나는 력사를 장식하였기에…

장춘을 떠나기 직전, 길림성 이동총공사 부총경리로 사업하는 큰 사위와 딸 춘실, 련통 음악프로젝트 경리로 사업하는 둘째딸 학실 내외간, 큰아들 춘삼, 둘째아들 학삼 이들 형제간들의 사업터의 동사자들과 가족, 친속들 등등 상객들은 분분히 고인의 업적에 감탄하면서 칭찬과 감동과 긍지로 고인에 대한 존경으로 입을 모이며 고인을 추모했었다.

중국 조선족 연극계는 훌륭한 프로정신의 선구자를 잃었고 인민들은 웃음의 왕별을 잃었다. 하지만 그이가 남긴 사업정신과 인생관은 영원히 후세에 사라지지 않는 광야로 빛 뿌려줄 것이다.

고 리영근선생의 지상에서의 웃음의 빈자리는 비였어도 살아 생전에 남긴 유머와 웃음소리는 계속 전해갈 것입니다.

선생이 가시는 곳에서도 항상 웃음소리 넘치리라 명복을 빌겠습니다. 고 리영근선생께서 가시는 그 어떤 곳도 항상 웃음소리 끝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의 표연기교는 행복의 웃음소리 펼치여 갑니다.

선생님의 터치워 놓은 폭소의 향은 만고장존할 겁니다.

선생님의 웃음의 빈 자리에 애절한 침묵이 흐릅니다.

선생님의 웃음의 빈 자리에 비애를 넘어 짙은 향이 날립니다……

고 리영근선생의 명복을 다시 한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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