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최수송-저명한 조각예술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3월24일 10시39분    조회:734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연변땅에 꽃피운 조각가의 꿈

-저명한 조각예술가 최수송선생의 조각인생을 살펴본다

[중국민족 2011-03-23 서정옥]
지난해 11월 초, 필자는 연변의 문인 몇분과 함께 연변에서 조각계의 일인자로 불리는 최수송선생의 안내로 도문시 교외 일광산에 위치한 두만강조각공원을 찾았다. 10월에 금방 개원한데다가 며칠전 눈이 내리고 날씨까지 추워 관람객은 우리 일행뿐이였다.  

“저기 보이는 저 작품입니다!” 

최수송선생이 발목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앞장에 서서 산비탈을 톺아 올랐다. 일흔 고개를 넘긴 로인이 아니라 젊은 미술 학도와도 같았다. 공원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명절”이라고 이름 지은 작품이 바로 최수송선생의 작품이였다. 바깥로인이 신이 나서 꽹과리를 치고 안로인이 흥에 겨워 춤을 추는 장면을 형상화한 작품이였다. 

“이 작품은 창작 동기와 령감이 언젠가 모아산에서 있었던 8.15로인절 행사에서 얻어진것입니다. 그때 허리가 많이 굽은 할머니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며 흥겨워하는것을 보고 아주 감동되였습니다.”

최수송선생은 연변대학 예술설계연구쎈터와 연변화원으로부터 도문에 세워지는 연변의 첫 조각공원에 출품할 조각작품을 주문받았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 고향에 세워지는 조각공원이라 출품할 작품은 어디가 달라도 달라야 했기때문이였다. 고민끝에 우리 민족 특유의 문화와 전통을 반영하는데 모를 박고 작품을 구상하였다. 인물조각에 조예가 깊은 그는 조선족로인의 형상을 부각하기로 했다. 최수송선생은 작품의 완벽성을 기하기 위해 연변가무단 무용배우 두사람을 청해 조선춤 동작을 하게 하면서 작품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서 조선족 전통악기인 장구나 북 대신 작은 꽹과리를 선택했는데 이에 대해 최수송선생은 인물조각에서 도구는 될수록 간단해야 하기때문이라고 했다. 

“이 조각을 만져보십시오. 찬 대리석이긴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듯한 감을 느낄수 있습니다. 조각은 색깔도 배경도 없는 공간예술이지만 사람들에게 상상의 나래를 펼쳐주고 그속에 내포한 이야기를 련상시켜줍니다. 즐거운 로인절 장면이 떠오르지 않아요?”

실내에 비치하는 미술작품과는 달리 조각작품은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거리나 광장, 건축물 앞에 비치하는 예술품으로서 사람들이 만질수 있는 특징을 감안해야 한다. 생활의 한순간을 나타내는것이 아니라 상징적 특징을 부각하는것이 바로 조각이라는것이다.

그날 두만강조각공원에서 두만강변에 자리잡은 “중국조선족무형문화재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겨 가면서 우리 일행은 최수송선생이 걸어온 조각예술의 길을 더듬는 시간을 가졌다. 

최수송선생의 부친은 도문에서 명의뿐만 아니라 명필로 유명한 분이였다. 약처방도 붓으로 쓰는 그는 아들이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배워주었다. 최수송선생은 매일 천자문을 종이가 검어질 때까지 쓰고 또 썼다. 소학교 때는 서예시합의 1등이 늘 그의 몫이였다. 특히 나무깎기에 남다른 취미가 있었다. 나무로 권총을 깎아 만들고 거기에 먹칠을 해서 가지고 나가면 진짜총 같아 친구들의 주문이 그치지 않았다.

중학교에 진급한후에는 소년궁에 가서 미술을 배웠으며 고중에 가서는 흙이나 점토로 조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각가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꼼꼼한 성격으로 매사에 완벽한 아들의 성미를 잘 아는 부친은 아들이 자기 뒤를 잇도록 의학을 전공할것을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부자간은 한동안 갈등이 심했다. 고중졸업을 앞두고 미술을 선택할것인가 아니면 의학을 선택할것인가 고민하던 그들 부자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상담하기로 했다. 그때 담임선생님은 그래도 본인의 장끼대로 미술을 선택하는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과 미술도 중의학과 마찬가지로 나이가 들수록 인기가 좋다고 하며 그의 부친을 설득했다.

최수송선생은 엄격한 시험을 거쳐 우수한 성적으로 중국 미술계의 최고학부이며 미술가의 요람인 중앙미술학원의  조각학부에 입학해 중앙미술학원 조각학부의 첫 조선족학생으로 되였다. 그가 입학한 때는 1959년,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행사로 수도 북경은 가는 곳마다 채색기가 나붓기고 경축의 분위기가 짙었다.
입학 당시 그들 반급은 학생이 도합 7명이였는데 련애하는 사람도 하나 없이 모두 공부만 하는 책벌레들이였다. 대학시절 6년간 그 역시 조각가의 꿈을 무르익히면서 오직 학습과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당시 조각학부 학부장이며 스승인 활전우교수는 프랑스류학생이였고 반급 담임교사이며 스승인 전소무교수는 쏘련 레닌그라드 레삔미술대학  류학생이였다. 그밖에도 저명한 서양화 화가 대택, 중국화 화가 육홍년 등 중국 미술계와 조각계의 최상급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들의 창작사상과 예술기교를 잘 습득하였다. 

최수송선생은 졸업후 “연변땅에 조각예술의 꽃을 피우리라”는 큰 꿈을 안고 결연히 고향인 연변으로 돌아왔다.

당시 연변은 민간예인들뿐 정통 조각가가 없었으며 조각예술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연변공예미술공사에 배치받은 그는 가무의 고향인 연변의 노래와 춤을 조각으로 표현할 장구적인 구상을 했다. 그러나 정부에서 중시하지 않고 군중들의 의식이 경직된 상태에서 애로가 많았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연구하고 창작하였다. 문화대혁명 때는 농촌에 공작대로 내려가 “모택동사상승리만세전람관”의 조각상과 “계급교육전람관”의 “과거의 고통을 회억하고 오늘의 행복을 생각하는” 주제의 조각품, 밀랍인형 같은것을 주로 만들었다. 

1987년에 최수송선생은 “전국 도시조각 설계창작 자격증서”를 획득하고 중국인민외교학회와 중앙미술학원 조각학부의 추천으로 2년간 일본 도꾜 환경조형연구소에 가서 연수할 기회를 가졌다.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결연히 편벽한 연변으로 돌아간 제자에 대해 늘 관심과 배려를 돌리던 중국 조각계의 거목 전소무교수가  일본 연수의 기회를 마련해준것이였다.  

연변에 가면 곳곳에서 최수송선생의 조각작품을 볼수 있다. 연길 주도서관 락성을 위해 창작한 “로신”, 화룡시에 있는 “황소”, 연길시 영빈교두의 “풍작”, 화룡예술극장앞에 있는 “상모춤”,  “장고춤”, 두만강조각공원의 “명절”등 작품이 모두 그가 창작한것이다.  

연변 태생인 최수송선생은 특히 연변 황소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고있었다. 농촌에 내려가 농사일을 하던 힘든 나날을 함께 해준 황소를 어느 땐가 작품으로 재현하려고 늘 생각하고있었다. 농촌에 공작대로 내려간 이튿날 한 농민이 황소를 메운 수레에 거름을 가득 싣고 와서 “최선생, 우리 출비하기오.”하던 일이 인상 깊었다고 한다. 봄이면 쟁기를 메워 밭을 갈고 가을이면 수레를 메워 땔나무하러 다니기도 하던 황소는 단순한 가축의 의미를 넘어 농사를 짓는데 없어서는 안될 소중한 존재였다. “황소”를 창작할 때 그는 조각에 쓸 석재를 구하기 위해 직접 산동성에 가서 여러 산들을 돌아보고 붉은 화강암을 골라 산아래로 굴리고 대형 뜨락또르에 실어 연변으로 가져왔다.

최수송선생은 생활은 예술의 원천이며 생활과 예술은 분리할수 없는것이라고 말한다. 연길시 영빈교두에 세워진 조각작품 “풍작”은 조선족처녀가 사과배를 담은 광주리를 이고가는 장면을 형상화한것이다. 이 작품은  문화대혁명 직전 룡정과수농장으로 의무로동하러 갔을 때 령감을 얻은것이라고 했다. 그날 마침 장춘영화촬영소에서 룡정과수농장에 가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는데 민족옷차림을 한 조선족처녀들이 사과배를 따서 이고 가는 장면이 인상이 깊었던것이다. 이 작품은 연변미술가협회로부터 연변의 첫 석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50여년간 조각예술의 매력에 심취되여 늘 철과 쇠사슬, 흙, 나무붙이와 씨름하는, 먼지가 많고 어지러운 직업을 선택하였지만 그는 산책할 때 혹은 차를 타고 가다가 자기가 창작한 조각작품을 볼 때면 자부심으로 차넘친다고 말한다. 중국조각가협회 회원이며 공예미술학회 고급회원인 최수송선생은 여전히 조각작업을 멈추지 않고있다. 자신의 직업을 더없이 사랑하는 그는 조각작품을 창작할 때면 나이를 잊고 흙반죽, 망치질, 조각칼 새김질 등 힘겨운 일을 혼자서 완성하고있다. 

중국조선족의 원로 조각예술가로서 조각예술을 지향하는 젊은 학도들에게 하고싶은 부탁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조각예술은 독학으로 성공하기 힘드므로 정규적인 예술교육과정을 거치고 쇠몽둥이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인내력을 가지고 기본공 수련에 만전을 기하라는것이라고 했다.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1958년, 봄, 김 철은 귀향한다. 그가 맨 배낭에는 전쟁의 초연 속에서 쓴 '전선 시초'1백 여 편이 들어 있었다. 해란 강변엔느 새움이 돋고 있었다. 연변 땅을 밟으며 가슴이 벅찼다. 즉흥시가 떠올랐다. "이른 봄 해란 강에 아지랑이 피는 데/귀환병과 처녀는 고향 길을 거닐었네/담벽 같은 앞가슴에 주렁진 훈장은/결결한...
  • 2005-10-25
  • 북경 킹스카이정보기술휴한회사 김호동사장 중국의 “실리콘벨리”로 불리는 북경의 중관촌, 중국 IT시장을 선도하는 북경시장에서 민족기업가인 김호동사장도 중한 상무교류를 바탕으로 프로그램 개발, 사이트 개설 등으로 선두역할을 하고있다. 길림성 도문시 출신인 김호씨는 1988년 7월 중앙민족대학 물리학부를 졸업하...
  • 2005-10-24
  • 1700여개 한국기업 입주 상주 한국인 8000여명 대련은 중국 동북3성의 대외개방 및 경제개발의 창구로서 가장 큰 해안무역도시이다. “대대련건설”(大大連建設) 가속화와 중한량국간 경제관계의 진일보 발전으로 한국굴지기업들의 대대련투자가 발빠른 행보를 거듭하고있다. 특히 올해 한국 조선업계에서 선두주자로 달리고...
  • 2005-10-24
  • [원제: 일반인도 “항천꿈”실현 가능] 할빈공대 김영덕교수 신주시리즈 우주선 청사진 그려 최근 기자의 취재를 받은 할빈공업대학 항천학원 김영덕교수는 “몇천년후 과학자들은 우주에서 실험을 하고 일반인들도 우주려행꿈을 실현할수 있게 된다”고 하면서 향후 중국항천사업발전의 미래를 전망하고 우주선이 우주를 비...
  • 2005-10-24
  • 김상기 일가는 길림시 교외의 가반가에 눌러 앉았다. 길림시에서 서북쪽으로 공장구역-하다만을 지난 송화강 나루터를 지나면 불과 십리도 못 되는 시골이었다. 일명 북길림이라 했다. "길림시에서 동쪽으로 이십 리를 가면 신길림이 있었죠. 일본인 마을이었지요. 만주석유회사도 있고, 잘사는 동네였습니다. 신길림에 사는...
  • 2005-10-24
  • 전남-곡성군 입면 삼오리, 넓지 않은 벌판, 옥답이 많았다. 그의 아버지-김상기는 유년기, 엿 궤짝을 둘러메고 정처 없이 흘렀다. 그러다 거지가 됐다. 울산에서 또래 거지를 만나 친구가 됐다. 부둣가로 놀려 갔다가 일본의 화물선과 인연이 된다. 화부다 됐다. 화물선은 일본 시모노세키에 있는 큰 화물선 회사 소속이었다...
  • 2005-10-21
  • [원제: 어려움속에서 성공한 행운아] 2005-10-20 10:21:37 어려운 가정형편에서 마음씨 고운 뭇사람들의 도움으로 끝까지 학습에 노력하여 중국의 명문대학인 절강대학에 입학한 정춘매학생은 참으로 행운아였다. 집이 흑룡강성동녕현삼차구진에 있는 정춘매학생의 가정은 본래 생활형편이 괜찮았다. 그런데 자녀의 공부뒤바...
  • 2005-10-20
  • 중국은 요즘 101세를 일기로 지난 17일 세상을 떠난 원로 문학가 바진(巴金) 중국작가협회 회장에 대한 추모 열기가 가득하다. 그가 오랫동안 살았고 숨을 거둔 상하이를 비롯해 그가 설립을 주도했던 현대문학관이 있는 베이징, 1904년 그가 태어난 쓰촨성 청두 등에서 추도 행사가 한창이다. 중국 신문들은 엄청난 지면을...
  • 2005-10-20
  • 유년 시절의 대가족 사진. 왼쪽에서 세번째에 외할머니가 파금을 안고 있고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파금의 모친이다. 오랜 투병생활 끝에 17일 세상을 등진 파금(巴金)은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으며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1904년 11월24일 사천(四川)성 성도(成都)에서 태어났다. 본...
  • 2005-10-20
  • 항미원조시기 파금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작가였다. 1952년 3월 31일에 평양에 도착하였고 4월이후로는 개성 제1선으로 나갔다. 그는 친히 항미원조전쟁에 참가하여 《영웅들속에서 생활》하였고 10월에야 귀국하였다. 그후 1965년까지 그는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에 대해 노래하는 글들을 많이 썼다. 이 시...
  • 2005-10-20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