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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나의 삶이고 인생이고 전부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7월18일 11시11분    조회:12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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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고종훈
46살, 중년 고종훈은 말한다


축구명장 고종훈

재능이 최고의 절정에 오를수 있는 가장 관건적이고 확실한 요인은 결코 기질이 아니라 마음 또는 정신이다. 그 일을 꼭 하고싶다는 강렬한 욕망, 어떤 어려움도 견디여내리라는 강한 의지, 꼭 어떤 경지에 도달하고야말리라는 드팀없는 신념, 이런 내적인 또는 심적인 자기완성이 있어야만 기질을 바탕으로 재능이 그 자신의 체질적인 그리고 소망적인 한계까지 쭉 치달아오를수 있다.

  고종훈이 선수시설 연변팀의 령혼으로 될수 있은것은 기질적인 바탕에 심적인 자기완성이 있었기때문이였다. 직업의식, 그것이 직업축구선수의 심적인 자기완성인것이다.

  “축구요? 저의 삶이고 저의 인생이고 저의 전부죠. 공을 쫓아 뛸수 있다는것 자체가 너무 행복했습니다. 푸른 그라운드에서 90분을 보내는 그 자체가 너무 순수하지 않습니까?” 고종훈은 축구를 이렇게 해석했다.

  잔디밭에서 빛내온 청춘

  고종훈은 1965년 1월 4일 룡정시의 한 보통로동자가정에서 4남매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우로는 누님 한분과 형님 두분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지난 세기 50년대 말기와 60년대 초기에 축구선수로 활약했었는데 1958년 전 주 8개 현(시) 축구경기에서 룡정팀이 1등을 따낼 때의 주력선수였다. 고종훈은 바로 아버지의 영향과 가르침밑에 어릴적부터 집근처에 있는 경기장(원 룡정시인민경기장)에 나가서 축구기술을 무르익혔다.

  1977년, 고종훈은 룡정시체육학교의 학생모집에 합격되면서부터 축구인생의 발자국을 내디뎠다. 1982년에 그는 정식으로 길림성청년팀에 들어갔고 19살나던 해인 1984년부터는 길림성축구팀에 뽑혀 줄곧 주력선수로 활약했다. 혈기왕성하고 진취심이 강한 고종훈은 이때로부터 자기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축구선수로 될바엔 축구명장으로 되고 또 국가팀에도 들어가야 한다.” 고종훈은 이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기술을 련마해나갔다. 하여 그는 1985년에 국가청년팀에 들어갔고 2년후에는 서근보가 감독을 맡은 국가희망팀의 주력선수로 되였다. 1992년, 그는 마침내 꿈속에서도 바라마지않던 국가팀선수로 선발됐다. 그가 국가팀선수로 있던 나날에 중국팀은 아시아컵 3등, 히로시마아시아경기대회 2등이란 좋은 성적을 따냈다. 고종훈은 그때 벌써 하프선의 유력한 공방조직자로 소문이 자자했다.

  1997년의 어느날, 고종훈은 해나른해진 몸을 간신히 끌고 훈련장에 나섰다. 탈수로 인해 해쓱해진 얼굴, 초점을 잃은 두눈, 비지땀을 흘리며 숨이 턱에 닿아 훈련하는 그의 모습은 결사람들까지 눈시울이 뜨거워나게 했다. 고종훈이 훈련하는것을 지켜보는 최은택감독도 가슴이 뭉클해났다. 최감독은 분명 고종훈의 몸에서 직업선수의 경업정신이 맥맥히 흐르고있음을 보아냈다. 정말이지 연변팀 선수들이 모두 고종훈선수처럼 이런 정신상태를 가지고있다면 연변축구의 앞날은 굉장히 밝을것이라고 확신했다.

  고종훈은 직업축구련맹경기이래 연변팀의 하프선 조직핵심으로 자리를 지켰다. 수많은 눈물겨운 이야기를 남기면서…


운남홍탑 축구기지에서 축구꿈나무들에게 기량을 전수하고있는 고종훈

  중국축구 왜 이 지경이야?

  “중국축구 왜 이 지경이야?(中国足球没戏啦)”(주: 고종훈이 해석해준 함의에 따라 번역) 고종훈이 던진 이 한마디 발언은 당시 중국축구계에 큰 파장을 몰고 오기도 했다. 아직도 연변축구팬들은 이 말을 자주 입에 올린다.

  1998년 8월 9일, 제17륜 전위환도와의 원정경기는 연변오동팀으로 말하면 갑급보존의 관건경기였다. 황동춘의 선제꼴로 1대0으로 앞선 상황에서 당시 심판 왕연춘은 81분만에 김청의 어깨부위 공차단을 핸들링으로 판정, 상대에 페널티킥기회를 줬다. 또한 한국용병 로주섭의 반칙을 황경량선수의 반칙으로 인정하고 레드카드를 꺼내들어 황경량을 경기장에서 축출해버렸다. 경기결속을 앞두고 연변오동팀은 헤딩꼴을 허락해 결국 1대2 역전패를 당했다. 경기뒤 휴식실을 빠져나오며 고종훈은 중앙TV 카메라앞에서 상기 말을 던졌다. 이날 TV를 통해 경기를 시청한 연변축구팬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거리에 떨쳐나섰으며 중국축구협회는 신속히 연변축구협회에 공개 사과편지를 보내왔다. 중국축구협회의 조치로 1999시즌 왕연춘 국제급심판은 경기를 집법하지 못했다.

  “당시 너무 격분하고 억울한 나머지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뭔가 딱 한마디만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입에서 나오는대로 뱉었던 말이였습니다.” 중국축구계의 부패를 가장 함축성있게 정리한 명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가족

  “아마 가족이 없었다면 저는 그렇게 오래동안 선수생활을 하지 못했을겁니다. 가족이란 울타리와 응원군이 있었기에 포기하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싶습니다. 묵묵히, 말없이 뒤에서 저를 지켜주고 힘내라며 등을 토닥거려준것은 안해였거든요. 정말 고마운 사람입니다”

  고종훈은 1991년 4월 중매군의 소개로 연변대학 무용교원인 김향화를 만나 꿀처럼 달콤한 련애시절을 보내다가 1993년 12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1995년 8월에 사랑의 결정체인 아들 고준익이를 보았다. 준익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축구선수의 길을 걷고있다. 어린 나이지만 180센치의 신장에 괜찮은 공재주를 가졌다고 아버지 고종훈은 자랑한다. 준익이는 현재 상해시축구협회 산하의 축구클럽에 몸잠그고있다.

  인터뷰도중 고종훈은 수시로 안해에게 둘째아들 고명익(11살, 연길시중앙소학교)군의 향방을 묻고있었다. 다름아니라 아침부터(토요일) 친구들과 공차러 나간 아들이 아직도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였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인가보다. 명익이도 중앙소학교 축구팀 선수로 활약하고있다.

  연변을 떠났던 오해와 진실

  주체육운동학교 지도로 반년간 몸잠그고있던 고종훈은 2004년말 동료, 팬들의 비난을 들으며 연변을 떠났다. 당시 체단주보(体坛周报) 송청운기자의 소개를 받고 2004년 12월부터 2008년 8월까지 한국인이 운남홍탑 축구기지를 세맡아 운영하는 축구클럽의 지도로 있었다.

  “결코 돈때문이 아니였습니다. 당시 주체육운동학교의 선수모집, 훈련 등 일련의 시스템이 저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특히 술 한방울도 입에 대지 못하는 저로 말하면 이런 일을 해나가는것이 고역이였습니다…”

  고종훈은 운남에서 B급 감독증을 취득한 한편 많은 어린 아이들에게 축구꿈을 심어주고 기량을 전수해나갔다.

  고종훈은 자신을 변호하고 변명하는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다. 언론에 나서는것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그가 풀어놓은 당시 선택에 대한 진실이 더 믿음직스러울수밖에 없었다.

  지금 고종훈이 있어야 할 곳

  고종훈은 지금 연길 모 축구팀(축구동아리클럽)에서 활약하며 자신의 몸을 가꾸고있다.

  “언젠간 저도 프로선수들을 지도하고싶다는 생각은 하고있습니다. 그건 모든 축구인들의 꿈이니깐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지금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아이들 곁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인축구가 중요하다면 그들의 뿌리가 될 유소년축구는 훨씬 더 중요한거 아니겠습니까? 여건이 되면 어린이축구클럽을 운영해보고싶습니다. 좋은 뿌리를 내리게 하는 이 일이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취재를 마무릴즈음 고종훈은 “연변팀의 올시즌 상황에 대해 감독진과 선수단은 물론 사회 각계가 똘똘 뭉쳐 반드시 갑급보존을 실현해야 한다”면서 “연변에 프로축구가 없어서는 절대 안된다”고 심경을 내비쳤다.

  고종훈은 말한다. “하나의 공을 위해 그리고 하나의 목표를 위해, 11명이 함께 만들어가는 축구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1991년 11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고종훈은 길림성인민들과 고향연변인민들을 위해 축구사업에 그 한몸 다 바쳐왔다. 선후로 국가1급, 건장급 축구선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998 중국축구 “최우수하프선수”로 당선돼 금컵을 받아안았으며 연변의 “축구선생”, “길림성 10대 걸출한 청년” 등 휘황한 성적을 거두었다. /연변일보

  ▶ 1985년, 국가청년팀을 따라 전 쏘련 세계청소년선수권경기에 출전, 7등.

  ▶ 1987년, 국가희망팀을 따라 전 유고슬라비아 세계대학생경기대회에 출전, 4등.

  ▶ 1991년, 길림성축구팀 을급리그에서 갑급리그로 진급, 주전으로 활약.

  ▶ 1992년, 국가팀을 따라 타이에서 거행된 “국왕컵” 경기에 출전.

  ▶ 1992년, 국가팀을 따라 일본에서 거행된 “아시아컵”에 출전, 3등.

  ▶ 1994년, 국가팀을 따라 일본 히로시마에서 거행된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 2등.

  ▶ 1996년, 국가팀을 따라 유럽 5개국(독일, 화란, 쏘련, 체스꼬, 유고슬라비아) 방문친선경기에 출전

  ▶ 1997년, 연변오동팀 전국 갑A련맹경기에서 4등

  ▶ 1998년, 전국 갑A련맹경기 “최우수선수”로 선정, “최우수진영”에 합류, “최우수하프선수” 칭호 수상

  ▶ 1998년—2000년 연변오동팀 선수 겸 지도로 활약

  ▶ 2001년 북경관리(을급팀) 선수로 활약, 년말 현역에서 은퇴.

  ▶ 2004년 12월—2008년 8월 곤명에서 지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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