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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인맥으로 쌓아올린 성공의 금자탑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8월23일 09시26분    조회:11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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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오광훈
[료녕조선문보 2011-08-23 김창영 기자]

참다운 인맥으로 쌓아올린 성공의 금자탑
료녕성 철령방정종이박스유한책임회사 오광훈리사장을 만나본다



오광훈리사장

오광훈(吴光勋) 프로필

1969년 1월 13일 철령시 출생

1987년 9월-1991년 7월 대련리공대학

1991년 10월-1996년 8월 철령시 은주구민정국

1996년 8월-1997년 4월 중공철령시 은주구위원회 조직부

1997년 4월-1999년 10월 철령시종이박스공장 공장장

2000년 4월-현재 철령방정종이박스유한책임회사 리사장

현재 철령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부회장



료녕성 철령방정종이박스유한책임회사 오광훈리사장은 사영기업의 법인대표이자 철령시 은주구민정국에 적을 둔 공무원 두가지 신분으로 성공한 기업인이다. 굳이 그의 두가지 신분을 언급하는데는 한낱 공무원에서 기업인으로의 성장과 또한 기업인으로서 공무원신분의 보류가 우리에게 주는 계시가 크기때문이다.

그와 마주앉아 기업성장과정을 소개받으며 공무원이나 기업인에 앞서 참다운 그의 인간성에 진한 감동을 받았다. 철령시 소재 조선족기업 100여개중 60여개를 리드하고있는 철령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오광훈씨는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인맥구축과 성실한 인맥관리가 회사의 생명선》이라고 일가견을 폈다.

정계진출의 꿈을 접고

오광훈씨의 기업《입문》은 우연이면서도 필연적이였다. 1991년 대련리공대학을 졸업한 그는 철령시 은주구민정국에 배치받아 5년간 근무하던중 철령시 은주구후비간부양성명단에 들어 구민정국에 적을 두고 국유기업인 철령시종이박스공장에 파견돼 공장장조리로 반년간 사업한바 있는데 그때 그는 뛰여난 기업경영능력을 과시했다. 1996년 중공철령시 은주구위원회 조직부에 전근되여 반년도 안된 1997년 4월, 철령시종이박스공장이 혼란상태에 처하자 철령시민정국의 제의로 나젊은 오광훈씨는 조직관계를 다시 민정국으로 옮기고 철령시종이박스공장의 공장장으로 공식 취임하게 된다.

1958년에 설립된 이 공장은 전민소유제 국유기업으로 당시 관리부진으로 생존위기에 처해있었는데 그는 한달남짓 조사를 거쳐 현존의 공장을 파산시키고 새로운 공장을 설립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철령시위와 시정부는 수차에 걸친 현장판공과 평가를 거쳐 최종 파산신청을 비준하였다. 기업파산에 뒤따르는 문제가 붙자 그는 밤낮으로 뛰여다니며 문제를 해결하였고 최종 철령시 은주구현대포장공장을 설립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오광훈씨는 철령시에서 처음으로 국영기업 파산과 기업전형(转型)을 주도하여 상급령도들의 주목을 받았다.

1999년 철령시의 첫 부현급간부 공개선발이 있자 오광훈씨는 은주구 부구장에 과감히 도전하였다. 100여명이 참여한 치렬한 경쟁을 벌였는데 1차 서면시험에서 1등을, 2차 면접시험에서 또 1등을 따내며 최종 3명 인선에 올라 오광훈씨는 년령, 조직관계, 학력과 실지사업경험 등 여러면에서 다른 두사람보다 더 유력한 조건을 갖춘 부구장 후선인감이였다. 허나 3차 종합검증에서 탈락돼 그는 정계진출의 꿈을 고스란히 가슴에 간직할수밖에 없었다.

단돈 만원으로 만든어낸 《기적》

《과감히 미련을 버리자.》 며칠동안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굳힌 오광훈씨는 단위에 찾아가 자체로 회사를 경영하겠다고 제출했다. 민정국에서는 조직관계와 관련서류를 보류할테니 언제든지 돌아오라며 선뜻이 승낙해주었다.

그러나 종이박스공장을 꾸리려면 200여만원의 엄청난 자금이 수요되였는데 당시 오광훈씨에겐 단돈 1만원밖에 없었다. 그는 알심들여 작성한 사업계획서를 들고 철령시신용합작사(현재 상업은행)를 찾아갔다. 당시 신용합작사주임은 사업계획서를 세심히 훑어보고는 총투자액의 3분의 2를 해결해주겠다며 1차적으로 35만원의 대부금을 내주었다.

신용합작사에서 그에게 선선히 대부금을 내준데는 리유가 있었다. 오광훈씨가 철령시종이박스공장의 공장장으로 부임된 첫해인 1998년 설날아침이였다. 그믐날 저녁 당직을 서고 아침부터 새해의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고있는데 낯모를 두사람이 공장장사무실문을 떼고 들어섰다. 의아해하는 오광훈씨를 보고 그중 한사람이 같이 온 분이 신용합작사주임이라고 소개했다. 신용합작사주임도 의아해하기는 마찬가지, 이 공장에 새로 젊은 공장장이 부임돼 왔다는 사실을 알고있었으나 설날 아침 공장에 나와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고있을줄이야. 후에 안 일이지만 설련휴가 지나 출근한 첫날 그 주임은 직원들에게 오광훈이 공장장으로 있는 한 철령시종이박스공장은 희망이 보인다고 하였다는것이다.

오광훈씨는 35만원 돈으로 한 국유기업의 비여있는 700여평방메터의 창고를 세낸 뒤 당시 56만원에 달하는 생산시설은 또 《관계》를 통해 먼저 28만원을 지불하고 구입하였다. 1999년 12월 25일, 생산라인장치를 끝낸 오광훈씨가 신용사주임을 찾아가자 공장에 내려와 직접 확인한 신용사주임은 생산시설을 담보로 대부금 50만원을 추가했다. 오광훈씨는 또 60만원에 달하는 인쇄기를 먼저 30만원을 지불하고 구입하여 이듬해부터 공장을 본격 가동했다.

참다운 인맥은 회사의 생명선

2000년 4월에 생산에 들어간 철령방정종이박스유한책임회사는 그해 년말 700만원의 생산액을 기록하였고 현재는 년간생산액 4000여만원을 돌파하면서 일약 철령지역 종이박스업계의 거두로 자리매김했다. 회사가 오늘날이 있기까지 인맥을 중요시하고 인맥관리를 해온 오광훈씨의 감촉은 그 누구보다 큰것 같다.

1998년 오광훈씨가 철령시종이박스공장 공장장으로 있을 때다. 당시 할빈종이공장으로부터 종이 30톤을 구입하였었는데 제품이 요구에 도달하지 못해 아예 사용할수 없었다. 이에 제품을 반환하겠다고 하니 할빈종이공장의 젊은 업무원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더란다.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1년동안 전전긍긍하다 한달전 할빈종이공장에 입사하게 되였는데 이제 물건이 반품되면 어렵게 구한 이 일자리마저 잃게 된다는것이였다. 난처한 립장에 처한 오광훈씨는 고민끝에 기술공장장을 불러 30톤의 종이를 다른 용도로 사용할수 있는 대책을 문의하였고 기술공장장이 손해를 최소화할수 있는 방안을 제안하자 오광훈씨는 문제의 30톤 종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다.

1999년 음력설을 앞두고 이 업무원이 또 오광훈을 찾아왔다. 추운 겨울철에 솜옷도 입지 않았는데 1년동안 할빈에 돌아가지 않고 심양에서 일을 보고있었고 할빈종이공장의 제품이 여의치 않아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던것이다. 오광훈씨는 그를 격려하며 오리털잠바를 사서 주었다.

2000년 7월 이 업무원이 오광훈씨를 느닷없이 찾아왔다. 오광훈씨가 자체로 회사를 설립했다는 소식을 듣고 오광훈씨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하루 1만 5000개의 종이박스오다를 가져왔던것이다.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광훈씨는 그 오다를 가공하고있다 한다.

민족사회발전에 우리 기업인이 적극 나서야

《기업이 아무리 크고 리윤이 아무리 많아도 민족사회를 위해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 존재가치를 운운하기 어렵다.》 철령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이면서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부회장인 오광훈리사장의 말이다.

철령시조선족기업가협회는 설립되여서 현재까지 회원사들에게 대내, 대외 교류의 장을 마련하여 상호 정보교환은 물론 기업들간 협력을 도모하는데 진력해왔다. 조선, 한국의 기업인들과의 교류외 국내 동업종 기업의 고찰활동을 해마다 조직하여 회원사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사회자선사업에도 린색하지 않았는데 철령, 개원지구의 곤난학생들에게 학비를 보태주었는가 하면 우수학생들을 장려하는 등 이 한 사업에만도 지금까지 30여만원을 투입했다. 해마다 철령시조선족문화관이 주최하는 광장문화문예공연활동에도 거금을 투입하여 철령시조선족사회의 정례행사로 자리매김하는데 응분의 기여를 했고 철령시조선족로인협회와 개원시조선족로인협회의 활동경비를 해결해줌으로써 로인을 공경하는 우리 민족의 우량풍속을 계승발양하는데 앞장서고있다.

그는 철령지역 조선족기업현황에 대해 《아직 조선족기업인과 조선족기업인이 경영하는 기업이 적다. 조선족기업인이 경영하는 기업이라 해도 규모가 한족기업들에 비해 작을뿐더러 경제적수익도 상대적으로 적다.》면서 《기업인들 스스로 정책에 대한 리해능력을 키우고 인문자질, 업무자질, 관리능력을 제고시켜야 하는 동시에 기업인간의 횡적 종적 교류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는 또 《민족기업의 근본적인 발전과 부흥에 있어서 민족교육을 떠날수 없다. 민족인재양성은 결국 민족경제를 포함한 민족의 생존과 직결되여 있다. 민족인재양성에 있어서 민족기업인들의 책임과 의무도 막중하다》고 피력했다.




철령방정종이박스유한책임회사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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