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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와 함께 해온 빛나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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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최동섭

 [길림신문 20211-11-15 김룡 기자]
—연변축구평론계 거장 최동섭부교수

소년시절부터 <학자>의 꿈을 키워

최동섭은 1933년 9월 17일(음력)에 룡정 조양천의 한 농민가정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여났다. 너나없이 가난에 실달렸던 그 시절, 최동섭가정도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였다. 《가난한 집 자식이 일찍 셈이 든다》고 소학교시절 최동섭은 어떻게 하나 공부를 잘해 출세해야 한다는 일념뿐이였다. 가난때문에 늘 학비를 물지 못해 서당에서 쫓기우군 하였다. 천진하지만 구지욕으로 불탔던 나어린 최동섭은 교실에서 쫓기우면 체면을 무릅쓰고 조용히 교실 한구석으로 찾아들어 선생님의 강의를 열심히 귀담아들었다. 지꿎은 공부열성때문이였는지 그의 성적은 항상 학급에서 상류에 속하였다.

최동섭은 공부를 잘했거니와 천부적인 운동체질을 갖추었다. 박달나무처럼 단단한 몸매, 강한 폭발력과 끈질긴 인내력을 구비한 그는 운동감각도 매우 출중했다.

1953년 전국 11개 도시 청년축구련맹경기에 참가한 연변팀선수들(중간 왼쪽 두번째 최동섭).

1942년 최동섭일가는 화룡 동성으로 이사를 하였다. 중학시절 최동섭은 학교축구팀에서 이름난 《하프선발동기》로 활약했다. 룡정고중(당시 연변제1고중)에 진학한후 학교축구팀에서 활약하던 최동섭은 1953년에 상해에서 열린 제1회 전국 11개 성, 시 청년축구경기에 참가하는 행운을 지녔다. 그번 경기에서 연변팀은 영예롭게 준우승을 따내 전국적으로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경기에서 출중한 개인기를 보여준 최동섭은 그해에 리태묵, 박만복 등과 함께 국가청년팀에 선발되였다. 8개월동안의 집중훈련은 매우 힘들고 간고했다. 국가청년팀에 들어갔지만 최동섭의 꿈은 항상 어엿한 대학생으로 되는것이였다. 집중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뒤 그는 머리를 동여매고 그동안 밀렸던 학과목들을 자습했으며 고중을 졸업하고 연변대학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사실 이 시기 그는 형님의 정치문제로 웽그리아 축구류학생모집에 탈락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64년 8개 도시 아이스하키경기에 참가한 연변팀.

대학에 진학해서부터는 공부에만 전념해 성공해보리라고 굳게 다진 그였지만 체육과의 인연을 끊을수는 없었다. 축구에 남다른 재질을 가진 그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선배들을 제치고 연변대학축구팀 주장으로 선출되였다. 《절반 스포츠인》이 되여 학업을 견지하는 한편 주급, 성급과 전국 축구경기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또한 연변아이스하키팀 선수였던 그는 겨울철이면 각종 아이스하키 경기로 숨돌릴수 없이 뛰여야만 했다. 대학교 4년 사이에 축구와 아이스하키 운동때문에 정상적인 수업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항상 학자로 되는 부푼 꿈때문에 심신의 피로를 무릅쓰고 밀린 공부를 보충하느라 늘 밤을 팼기에 학습성적은 항상 학급에서 3~4등으로 앞자리를 차지했다. 지식에 대한 갈구와 고심참담한 배움은 이후 그가 체육분야에서 이름난 학자로 자리를 굳혀가는데 밑거름이 되였다.

체육리론가로 부상하는 탐구의 길

1957년 여름, 최동섭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고 연변대학에 배치받아 교육심리학을 가르치게 되였다. 오매불망 바라던 숙망이 마침내 현실로 이루어진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들이닦친 반수정주의 열풍으로 대학교의 중요한 학과목중 하나인 교육심리학이 하루아침에 《수정주의 산물》로 치부되여 학교의 학과목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학교당위에서는 반복적인 토론을 거쳐 그를 체육교원자리에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최동섭은 조직의 배치대로 아이스하키교수를 한학기 맡았다. 한학기의 아이스하키 교수를 원만히 완수하자 학교에서는 그에게 다음 학기부터는 축구강의를 맡으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지도부의 긍정을 받으며 한학기, 한학기 체육교수를 견지해온 그는 마침내는 체육교원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되였다.

1964년 동북대학생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연변대학축구팀(첫줄 오른쪽 세번째 최동섭). 

최동섭선생은 체육에 대한 체계적인 리론탐구를 목표로 1961년에 북경체육학원에 시험을 쳤다. 공부에는 막힘이 없었던 그는 소원대로 구류함수(球类函授)—축구학과(4년)에 입학했다. 당시 길림성의 학생들중 졸업시에는 10여명밖에 학업을 견지하지 못했다. 최동섭선생은 자랑스럽게 10여명중의 한 학생으로, 우수졸업생으로 학교를 졸업하였다. 체육 리론과 실천의 완벽한 결합은 최동섭선생의 스포츠인생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였다. 1969년부터 그는 이미 축구계 리론권위로 부상해있었다.

1980년부터 연변대학 체육학부에서는 체육리론과 운동심리학 교수를 새로 시작하게 되였다. 최동섭선생에게 그동안 열심히 익혀온 지식들을 마음껏 활용할수 있는 활무대가 마련된것이다. 형님의 정치문제로 그의 입당요구를 보류해왔던 학교당위에서는 1981년 드디여 그의 입당을 허락하게 되였다. 입당후 15일만에 연변대학에서는 학교의 수요로 새로 내온 체육교연부 주임직에 최동섭선생을 임명하였다. 그의 체육리론과 교수실천에 대한 긍정이랄가 그는 1981년에 전국대학교 체육학부, 체육학원 체육교재편찬위원회의 20명 위원중 유일한 소수민족위원으로 선정되였다.

1958년 중경에서 있은 전국갑급축구예비팀련맹경기에 참가한 연변팀.

학교의 체육위원회 부주임을 맡아서부터 그는 체육사업을 단단히 틀어쥐며 기꺼운 성과들을 거두었다. 최동섭부교수는 당시 학교체육위원회 주임을 맡은 정판룡부교장의 적극적인 지지가 큰 힘이 되였다고 회고한다.

이 시기 그는 여러 급별의 심판원학습반과 감독학습반에서 책임지고 강의를 해주며 후에 연변의 심판계를 주름잡는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해낸다. 체육교연부 주임직에 있으면서 그는 동북조선족축구친목회 상무부회장, 연변체육총회 부회장, 연변고등학교체육협회 주임, 연변체육진흥회 부회장, 길림성고등학교체육협회 상무부회장, 길림성체육과학연구회 상무리사, 전국체육과학연구회 리사, 전국고등학교축구협회 상무리사 등 직무까지 맡고 체육분야를 주름잡아나갔다.

연변대학 축구팀과 배구팀을 전국 우승으로 이끌어

연변에서 처음으로 녀자축구교수를 시작한 것은 연변대학 체육학부의 최동섭교수였다.그는 1977년 3월부터 처음으로 연벼대학 체육학부 75년급 녀학생들에게 시점적으로 축구교수를 하였다. 한학기의 교수실천을 거쳐 녀성들도 축구운동을 할수있으므로 이 운동은 녀성들의 신체발육과 체질증장에 유리하며 의지와 품성양성에 좋은 점이 많다는 체험을 얻게 되였다. 그의 실천은 체육학부 지도자들의 열정적인 지지를 받고 1978년 8월부터 체육학부에서는 녀자축구과목을 정식으로 교수하게 되였다. 이렇게 연변대학에서 현대녀자축구운동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1984년 상해에서 열린 제3회 전국대학생녀자배구경기에서 우승을 한뒤 눈물을 흘리고있는 최동섭.

1980년부터 학교의 축구운동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빈번히 첩보를 전해왔다. 1980년 연변대학 남자축구팀은 전국대학생《3호》컵축구경기 우승, 1985년 전국대학생《장백산》컵축구경기 우승, 1987년 전국대학생《황과수》컵축구경기 우승,1989년 전국대학생 《소림콜라》컵축구경기 우승을 하는 등 말그대로 일파만파를 일으키며 학교인지도를 크게 높였다.

1984년 연변학교 녀자배구팀은 상해에서 열린 제3회 전국대학생녀자배구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해 또 한번 전국을 놀래웠다. 1985년 대련에서 열린 제4회 전국대학생녀자배구경기때 최동섭주임은 녀선수들한테 코신과 치마저고리를 맞춰주고 학교 남자축구팀과 대동하여 떠났다. 전국에 민족대학의 위상을 확실히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번 대회에서 연변대학녀자배구팀은 일련의 난관을 물리치고 재채 우승을 제패하는 감격을 누렸다.

1980년 전국대학생 《3호》컵 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연변대학축구팀(첫줄 왼쪽 2번째 최동섭).

1985년 전국대학생축구경기는 연변대학에서 주최하게 되였다. 헌데 그때만 해도 연변대학의 경기시설은 말할나위없이 초라하였다. 주석대조차 마련하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전국적인 경기대회를 주최한다는것은 연변대학으로 말하면 크나큰 영광이였고 또한 학교품위를 전시하는 한차례 중요한 대검열로 되였다. 학교지도부에서는 련며칠 회의를 소집하고 준비사업방안을 토의했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어려운것이 비용문제이였다. 이때 최동섭주임이 선뜻 나섰다. 사방으로 뛰여다니며 그 당시 돈으로 5만원을 해결하였고 경기 이틀전에 운동장정면에 콩크리트주석대를 보란듯이 일떠세웠다. 이 주석대가 바로 현재까지 사용하는 연변대학 남쪽경기장 주석대이다.

최동섭주임은 항상 바쁜 사람이였다. 축구팀, 배구팀의 정상적인 훈련을 위해서는 사방으로 자금지원을 받아야만 했다. 결국 이해 그는 일에 지쳐 한달동안 병원에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1979년 연변대학체육학부의 제1대 녀자축구선수들.

최동섭주임이 학교 체육위원회 부주임, 체육교연부 주임을 맡은 기간 학교 남자축구팀과 녀자배구팀은 학교지명도 향상에 돈으로 환산할수 없는 큰 기여를 했으며 사실 연변대학의 두개 브랜드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최동섭주임은 학교 남자축구팀을 위해 직접 학생모집에 나섰으며 각 분야를 돌며 운동경비를 한푼두푼 모았다. 눈물겹고 힘겨운 나날들이였다. 최동섭주임은 이렇게 현재 사회 각계에서 활약하고있는 축구인재, 유력한 일군들을 뜨거운 가슴으로 길러냈던것이다.

가족의 변고 하지만 축구생방송평론에 어김없이

최동섭선생은 1993년 부교수로 정년퇴직을 하였다. 1994년 10월 19일, 최동섭선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를 접하게 된다. 일본으로 류학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뜻밖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이였다. 아들은 심양체육학원을 졸업하고 길림공업대학 체육선생으로 배치되였다가 후에 연변주체육운동위원회 축구판공실로 전근, 학업을 위해 안해와 함께 일본에 나가 있던 상황이였다. 최동섭선생은 오열에 떨며 락루하기만 했다. 이틑날, 연변TV에 연변오동팀 홈경기 생방송평론을 해주기로 약속이 잡혀있음을 잊지 않고 그는 비감의 눈물을 감추고 생방송평론을 진행했다. 축구평론에 투신하며 그가 엮어낸 눈물겨운 이야기가 어찌 이뿐이랴. 1996년 그는 또 한번 눈물겹도록 가슴 아픈 사연을 남긴다. 그해 7월 연변현대팀이 북경국안팀과 연길시인민경기장에서 홈경기를 치르던 날, 그는 가장 가까운 혈육 하나를 또 잃었다. 《생떼》같은 맏사위를 잃은것이다. 당시 맏사위 김춘산은 연변대학 체육학원을 졸업하고 공상분야에서 한창 두각을 나타냈는데 간암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운명한것이다. 허나 항상 높은 사명감으로 추호도 흐트러질줄 모르는 성격의 소유자인 최동섭선생은 피눈물을 삼키며 오전에 사위추도식을 거행하고 오후에 연길시인민경기장에 나타났다.뭇사람들은 비통을 딛고 경기장에 나온 최동섭부교수에서 존경과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최동섭부부.

스포츠평론으로 행복한 만년

최동섭선생의 심도깊고 조리정연한 축구평론은 연변, 길림성, 나아가 한국과 조선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1996년 후반, 최동섭내외분은 둘째딸이 있는 청도에 1년간 있다가 최동섭부교수는 친구들과 제자들이 있는 연변으로 돌아왔다. 이후로부터 연변축구팬협회사업에 큰 일조를 했고 각종 언론매체들에 많은 우수한 평론과 문장을 실었다.

2004년 최동섭선생은 불행히 간암진단을 받았다. 최동섭부교수는 연변스포츠계에서 의미심장한 조언을 하였다. 《우리 민족 스포츠자료정리사업을 반드시 잘해야 합니다. 력사적인 임무로 간주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연변은 야구, 배구 등 할만한 전통경기종목은 반드시 다시 일으켜세워야 합니다. 체육도 하나의 과학인것입니다. 앞으로 연변스포츠 결책부문은 유능한 스포츠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했으면 좋겠습니다.》 연변스포츠계의 산 증인이며 연변축구평론계의 거장이 만년에 페부로 웨친 값비싼 조언이다. 연변스포를 항상 심장에 담고 빛나는 스포츠인생드라마를 엮어온 최동섭부교수, 그가 거둔 일련의 성과들은 연변스포츠 력사에 소중한 한페지로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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